고인돌 1140개 불가리아, 부여족 후예 ‘불가르족’이 세워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현대 불가리아의 최초의 독립국가는 부여족 출신 아스파루흐(Asparukh) 칸이 AD 681년에 건국한 ‘불가리아 제1제국’(First Bulgarian Empire, 681~1018)이다.
고조선 서쪽 지키던 ‘불리지’ 군단, 발칸반도로 이주하여 5만 동로마군 격파, 681년 ‘불가리아 제1제국’ 건국
부여식 성곽에 ‘아사달’ 호칭 구역, 단군 숭배, 삼신 할머니 신앙 흔적,‘발칸’ 명칭, 고조선어 ‘밝산’서 유래
일찍이 고조선 연방 서변 국경을 지키는 병력에 ‘불리지’(不離支)라는 고조선 후국 부여 기마민족 군단이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불리지’와 ‘불령지’(不令支, 고중국 발음은 ‘부리ᅌ지’)는 동일한 나라의 다른 한자 차음 표기이며 고조선 후국 부여족 무장이 거느린 기마부대족으로, 정복하는 지방마다 자기 부족의 ‘불’(弗, 不)을 넣어 이름을 짓는 특징을 가졌다고 기록했다(『조선상고사』).
BC 664년 고중국 동주(東周) 제(齊)의 환공(桓公)이 조(曹), 허(許), 연(燕), 진(晋), 노(魯) 등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조선을 공격해서 고조선-동주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불리지(=불령지)는 고죽·산융(훈족)·불도하 등과 함께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해서 제환공의 고중국 연합국과 싸워 물리쳤다. 불리지가 고조선 문명 후예임의 명백한 증거이다.
이 불리지가 그 후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불가르족’(Bulgars)으로 호칭되고, 그 일부가 발칸반도에 들어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했다.
‘불리지’는 반농반목의 고조선 후국
불리지의 뜻은 고조선어의 음차로서 ‘부르+지(치)’인데 ‘부르’는 부여족을 의미하고, ‘지(치)’는 장관·장군·가(加)의 뜻이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직책이 莫離支(막리지)인데, 신채호 선생에 따르면 마리치[마리(首, 머리+치(相)]로서 ‘머리 장관’(=首相)의 뜻이다. 즉 불리지는 ‘불가’(부여족 加)와 동일한 뜻이다.
BC 108년 고조선 멸망 후 ‘불리지(=불가족)’는 반농반목(半農半牧)의 후국으로 존재했다. 농경에 묶여 떠날 수 없는 소수만 남고 유목민들은 모두 북방으로 후퇴했다. 이후 ‘오호(五胡) 16국’ 시대에 반격하여 ‘한’(漢, 전한)을 멸망시켰지만, 다시 후퇴하여 서방으로 이동해 카프카스 지방으로 들어가 정착했다. 이때부터는 한자문화권을 벗어나서 ‘불가(르)’족으로 불리었다.
원래 고조선 후국에서는 ‘가’(加, 伽, ga, gar)가 독립해 ‘왕’이 되면 ‘가한’(khahan) 혹은 ‘칸’(kan)이라 불렀다. 불리지 역시 서방으로 이동해 불가족으로 불리었어도 그 족장은 고조선 후국의 명칭인 ‘칸’으로 호칭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룬시맨(Steven Runciman)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원불가리아족은 동방에서 왔지만 기원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유럽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북카프카스 지방 ‘온오구르 불가르’(Onogur Bulgar)족 족장이 조카 쿠브라트(Kubrat)와 함께 5세기 비잔틴 로마 황제 헤라크레이오스(Herakleios) 1세를 방문한 때부터이다. 동로마황제는 크리미아와 카프카스 방위를 위해 아발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동맹자를 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환대하여 ‘파트리키우스’(특권 시민계급)의 칭호를 주었고, 조카 쿠부라트는 인질로 콘스탄티노플에 남게 했다.
쿠부라트는 그 후 카프카스에 돌아와 족장이 되자 630~635년경 비잔틴 로마제국의 지지 아래 4갈래의 불가르족을 연합해, 아발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고(古)대불가리아’(Old Great Bulgaria)를 건국했다.
‘古 대불가리아’는 30년밖에 지속하지 못했다. 쿠부라트 왕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왕의 다섯 아들이 권력 승계 투쟁을 시작했다. 이 무렵 ‘하잘’(khazar)족의 침공으로 ‘古 대불가리아’ 부족연합은 붕괴했다. 쿠브라트의 큰아들 바트바얀(Batbayan)의 ‘쿠비 불가리아’(Kubi Bulgaria)는 하잘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 (Kotrag)는 북상하여 볼가강 중류에 독립국 ‘고추 불가리아’(Kocho Bulgaria)를 세웠다. 유럽인들은 이를 ‘볼가 불가리아’(Volga Bulgaria)라고 불렀다. 셋째 아들 아스파루흐(Asparukh)는 새 독립국을 세우려고 발칸반도로 들어갔다. 넷째 아들 쿠베르(Kuber)는 판노니아에 들어가 아발제국에 편입됐다. 다섯째 아들 알체크(Altsek)는 다뉴브강을 건너 비잔틴 동로마제국에 복속해 ‘알체코 공작’(Duke Alzeco)의 칭호를 받았다. 여기서 룬시맨이 ‘아들’로 기록한 것은 실제로는 ‘부족집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중에서 ‘볼가 불가리아’는 자기 영토의 큰 강을 불가강(후에‘볼가·Volga강’으로 변음)이라 했고, 그 동쪽 상류에 ‘곰강’(熊川, 후에 ‘가마·Kama강’으로 변음)이라는 부여족 명칭을 붙였다. 그들은 농경·목축·제철 및 피혁 수공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루흐가 인솔한 3만~5만 명의 불가르족은 발칸반도의 동북부 다뉴브강 하류 삼각지대에 진출해 정착하려다가 동로마제국이 거절하자, 결전을 감행했다. 아스파루흐의 기병대는 5만 명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681년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웠고, 오늘날 불가리아의 시작이다. 불가리아는 ‘불가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도자기·철기·유리 제조 유적도 발굴
아스파루흐 칸은 수도를 플리스카로 정했다. 최근 불가리아 고고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수도 플리스카의 성벽은 2중으로 되어있다. 외성은 21㎞의 긴 장방형 토성(土城)을 쌓고 주위엔 환호(環濠)를 파서 사람과 말이 건널 수 없게 했다. 내성은 돌로 석성 (石城)을 쌓아 그 안에 궁전과 ‘보야’(boyar·부여의 변음인 듯)라고 하는 귀족층의 거주지와 주요 시설을 두었다. 전형적 부여식 성곽이었다. 석성(내성) 안의 ‘아사달’(Asar-dere)이라 호칭된 구역에서는 고급 도자기·철기·유리 제조 유적이 발굴됐다. 수공업이 크게 발전한 증거이다. 외성 밖의 농촌에는 동로마 통치하의 속주로 살던 소수 원주민 트라키아족과 다수의 슬라브족이 거주했다. 주목할 것은 내성 왕궁과 귀족층 지역을 ‘아사달’로 호칭한 사실이다. 이것은 건국기의 불가리아 제1제국이 자기의 뿌리를 고조선·부여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국가종교는 최고 유일신으로 조상신이며 유일신인 단군(Tangra)을 숭배하는 단군 신앙이었다. 태양과 단군 신앙의 상징 조각들이 현재도 도처에 남아 있다. 출산과 양육에는 단군의 배필 ‘어마이’(Umay, Omay)의 점지와 가호를 신앙하였다. 고조선의 삼신 할머니 신앙과 동일한 유형이다.
나라 안의 명산에는 ‘발칸산’(밝산, 白山)의 이름을 붙이고, 제천행사를 하였다. ‘발칸산맥’, ‘발칸반도’의 명칭은 불가리아 제1제국이 붙인 이름이다. 서양인들은 그 뜻을 모르지만, 고조선어로 ‘밝산’(白山), ‘밝은 반도’의 뜻이다.
귀족의 무덤은 주로 고조선식 고인돌 무덤이다. 토닌(Dimitar Tonin)씨가 현재의 불가리아에서 지표조사 보고한 것만도 무려 1140여개나 된다. 이 고인돌은 철기시대의 것이어서, 입구에 돌을 잘 다듬어 사각형의 상징적 출입문을 만든 발전된 특징이 보인다. 기본구조는 그들 조상의 고조선문명 고인돌 양식을 계승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을 동방의 불가르(불리지)족이 민족 이동해 들어가 세웠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1.02.27 00:20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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