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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의 覺皇의 뜻

바람거사 2023. 7. 30. 01:20

부처를 표현하길 "깨달은 왕중의 왕인 황제다" 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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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의 중건 이야기

조선 숙종 25년에 '계파선사'가 장육전 중건불사 대발원의 기도를 올린지 백일로 회향을 맞이하게 되었다. 계파총섭(桂波總攝 : 총섭은 승군을 통솔하는 중요한 직권)은 아침공양을 마치고 대중스님들에게 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서 큰 불사를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승(化主僧)을 내어 큰 시주자를 얻어야 하느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승이라는 부촉이 있었다고 말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대중스님들은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사시(巳時)마지 때 대웅전에 두 항아리를 준비하고 계파스님이 만일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있다면 산승(山僧)과 함께 장육전 중건불사를 각별히 의논할까하오.”

산내 모든 대중들은 차례 차례 계파스님의 지시대로 시행하였으나 손에 밀가루 묻지 않은 스님은 없었다. 천여중 대중을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기대하는 스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더니만, 맨 나중에 시험해 본 공양주 스님의 손에 과연 밀가루가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스님들은 일제히 공양주 스님을 향해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승의 중임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공양주 스님에게 그대가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福力)이 천여명 대중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의 시험에서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꿈에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대성께서 지시한대로 시행한 것이니 그대는 문수대성께서 선택하신 화주승입니다. 그러므로 대 시주자를 잘 얻어 장육전 중창불사를 이루도록 합시다. ”

공양주 스님은 공양을 짓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전혀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껏 걱정허며 대웅전에 정좌(正坐)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그대는 걱정 하지말라. 내일 아침에 바로 화주를 위해 떠나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시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용기를 얻어 대웅전 부처님께 절을 하며 맡은 바 화주 소임을 잘 완수하도록 가호를 내리소서.’ 하고 일주문을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니 그의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노파는 자식도 없이 혼자서 움막에 사는데 절에 자주 올라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곤 하였으므로 공양주였던 스님과는 아주 친근히 지내온 터였다. 화주승은 노파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지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달라고 하랴 싶어서였다. 그러나 화주승은 간밤에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교시를 생각하고 노파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 ! 대시주이시여 ! 장육전을 지어주소서.” 이렇게 외치며 절을 계속 하였다. 노파는 처음엔 서로 익히 아는터라 농담으로 그러는 줄 여겼으나 스님의 진지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했다.

화주승은 하루종일 노파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 하기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다가 이윽고 화엄사를 향하여 합장하고 대 서원을 발했다.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보살이시여 ! 가호룰 내리소서.” 이렇게 원력을 아리며 수십번 절한 뒤 소()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으나 이미 이승 사람은 아니었다. 화주승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대경질색하여 그 길로 멀리 도망쳤다.

그후 오륙년이 흘러 한양성에 다달았다. 화창한 봄날 하루는 창덕궁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밖을 나와 놀던 어린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공주는 화주승을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와서 우리 스님이라면서 누더기 자락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나서부터 한쪽 손을 쥔채로 펴지 않았다. 화주승이 꼭 쥐고 있던 그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공주의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석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화주승을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조을 모두 듣고 감격하여 ! 장하도다. 노파의 깨끗한 원력으로 오늘의 공주로 환생했구나. 그 원력을 이루어 줘야 말고.”하며 장육전 건립의 대 서원을 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서는 공주를 위해 장육전을 중창할 비용을 하사하였고 장육전이 완성되자 사액(賜額)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하였다.

- 추가 이야기: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의상조사께서 조성 하였으나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는데,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가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채로 태어났으며 5년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각황전은 숙종25년∼28년(1699∼1703)에 중건 되었으며 정면 7칸,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 수법이 웅장하니 어느 것도 비교할바가 못되는 법당이다.

법당안에는 3불인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4보살인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부처님을 깨달은 왕보다 더 위인 황제(皇)라는 뜻으로 숙종은 '각황전'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편액은 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출처: 화엄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