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역사이야기

무능한 조정이 부른 임진왜란

바람거사 2023. 8. 11. 04:21

 

 

1591년, 10개월 만에 일본을 둘러보고 통신사가 귀국하여 선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5년부터 대륙침략의 의도를 구체화하였고, 1587년에 규수 정벌을 끝낸 후에 대마도주인 소요시시게에게 조선침략을 명하였다고 하며, 조선도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주청했는데, 부사 김성일(동인)은 그 낌새를 알면서도 전국이 혼란될 걸 우려하여 그렇지 않다며 엇갈린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부사의 입장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러나 1년 후에 16만의 왜군이 침략을 했는데 무방비상태에서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막지 못하고 한양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하였다. 조정은 의주가 위협이 되면 중국으로 파천을 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자, 유성룡은 전국에서 의병들이 총 궐기할 것이라 아뢰면서 파천을 극구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파격적으로 7품괘를 뛰어넘어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 좌수사로 보냈고, 이순신은 호남곡창지대로 북상하여 군량미를 확보하려고 했던 왜군을 연전연승의 해전으로 막았다. 또한 권율로 하여금  육상 방어를 맡게 하였는데, 그는 열세를 극복하고 '진주성대첩' ,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행주대첩'을 이끈 큰 공을 세웠다.   

 

조선조가 망하게 된 이유를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결국 반상의 차별을 극대화한 왜곡된 성리학이 원조라고 본다. 물론 불교를 국교로 만든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 다른 이념을 내세워야 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성리학은 변질이 되어 사대적이고 보수적으로 변하여 반상의 차별이 심화하게 만들었다. 조선조 초기에는 양반의 비율이 1% 미만이었고 천민도 과거에 과거에 급제하면 양반이 되었었다. 그리고 양반도 군역도 해야했지만, 점차적으로 온갖 비리를 다 하여 피해 갔고, 결국은 천민은 죽어도 천민이었으며 양반은 세금과 노역 군역의 혜택을 다 받고 지냈다. 그러므로 조선조 후반에 들어서는 매관매직이 성하면서 온갖 수법을 동원하여 천민이 양반으로 탈바꿈하여 철종 때는 양반의 비율이 70%가 넘었다고 한다. 결국 망국으로 가는 막다른 길로 조선조를 몰고 갔으며, 그 막다른 길을 더 빨리 가게 만든 조선의 무능한 왕은  선조, 인조와 고종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