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11월이면 평안남도 양덕군에 있는 중공군 묘지를 백발의 중국여인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이 여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정권에서 직접 안내하며 예를 갖추기 바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유송림(劉松林) 또는 유사제(劉思齊)라고도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첫째 며느리입니다. 비록 현재 중국정부의 요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북한에서 이 여인에 대해 신경을 써야할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남편의 묘소를 참배하는 유송림]
왜냐하면 유송림의 남편인 마오안닝(毛岸榮)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여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을 획득하고 죽을 때까지 철권 통치자로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오쩌둥의 첫째 아들은 사실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일부자료에는 자원해서 참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로 그는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마오안닝의 묘]
우리입장에서야 10월 25일 등장한 중공군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중공군의 참전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만약을 대비하여 18개 사단으로 구성된 25만의 동북 변방군을 만주일대에 배치해 두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중순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해 6·25전쟁에 개입할 것을 공공연히 천명하고는 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참전 이면에는 커다란 갈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를 평가절하 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대일본 전쟁 및 국공내전을 간신히 끝내고 국가를 건국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신생국이었으며 오히려 대만문제, 만주문제, 티베트문제 등 산적한 문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이 6·25전쟁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끼고 있던 난제들이었습니다.
[중국은 신생국이어서 국내에 산적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때 스탈린이 참전을 권유하는 전문을 보내왔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소련의 적극 개입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마오는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면 스탈린이 적어도 공군을 참전하여 줄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월 12일, 소련의 지원이 불가함을 통보 받은 마오는 만주에서 출병 준비를 하고 있던 펑떠화이(彭德懷)를 소환해 참전 여부를 재검토하였습니다.
[결국 마오쩌둥의 결단으로 참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린바오(林彪)나 까오강(高岡) 등 권력 실세 대부분이 파병유보를 주장했을 정도였고 상황도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대국과 국경을 마주할 수 없다는 고래의 원칙에 따라 파병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은 마오의 전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자 그의 장남을 참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마오안잉은 그의 어머니인 양카이훼이(楊開慧)가 국공내전 동안 국민당군에게 피살당한 후 겨우 목숨을 건져 세상을 전전하다가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유송림과 결혼하였는데, 불과 1년도 못되어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하여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갔습니다.
[마오안잉과 유송림]
하지만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껄끄러웠던지 펑떠화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그의 참전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전선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였던 마오안잉의 요구와 달리 후방의 사령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사령부가 미 공군의 맹폭을 받아 11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은 대의를 위해 유송림의 소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마오쩌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고 간단히 말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유송림은 눈물로 남편의 시신만이라도 중국으로 가져 올 것을 마오쩌둥에게 부탁하였지만 해외 파병 중 전사한 중국군은 현지에 묻힌다는 전통을 깰 수 없고 수많은 중공군 전사자들과 형평이 마지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유송림이 북한에 있는 마오안잉의 묘소를 찾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몇 회에 걸쳐 유엔군 최고지휘부와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의 아들들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그 역할을 다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피아를 떠나 자국의 국민들에게 지도층으로 모범이 되어줄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6·25전쟁사에는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있는데, 막상 이와 관련한 우리의 이야기는 찾기가 몹시 힘듭니다.
물론 당시 국군 최고지도부의 대부분이 불과 30대에 불과할 정도여서 이런 경우는 구조적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군을 포함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빛을 발한 예보다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경악할 만한 권력층 비리를 찾기 쉽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6·25전쟁에 참전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 지휘관과 그 아들이 동시에 참전하여 피를 흘린 경우는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휴전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대장과 그 아들 마크 빌 클라크(Mark Bill Clark) 육군대위의 경우인데, 아들 빌은 금화지구전투에서 중대장으로 복무도중 부상을 당하여 전역하게 되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휴전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 장군의 아들은 참전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6·25전쟁과 미군의 참전을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이처럼 고위 미군 장성이나 정치인의 자제들이 앞 다투어 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총 142명의 장성의 아들들이 참전하여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이 참전의사를 밝혔을 때 대부분의 부모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950년 12월 25일, 미 제24사단의 일선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샘 워커 ( Sam S. Walker 1925~ ) 대위는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호출 당하여 도쿄의 극동군사령부를 방문하였습니다. 야전의 말단 지휘관인 젊은 워커대위는 맥아더의 집무실에서 거물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샘이 경례를 하자 담담하면서도 서운한 표정의 맥아더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워커 대위! 부친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훌륭한 군인이었던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대장(사후 추서) 의 죽음은 우리 미국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나는 귀관에게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까지 운구하도록 지시한다.”
[전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대장의 묘]
샘 워커는 6·25전쟁 초기에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낙동강방어전과 북진을 이끌던 월튼 워커 중장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들 부자는 함께 6·25전쟁에 참전 중이었는데, 이틀 전 아버지가 전선을 시찰하던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을 하였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맥아더는 아들 샘으로 하여금 아버지 월튼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하도록 조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샘 워커대위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며 반대했습니다.
[방한한 콜린스 미 합참의장에게 아들 샘 워커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그는 자신처럼 군인이 된 아들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각하!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이고 지금 저희 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려운지 각하가 오히려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 중대장 교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버님 시신의 운구는 영현담당자들이 잘 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당장 전선으로 돌아가서 부대를 지휘하겠습니다.”
[당시는 1.4후퇴 직전이라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는 1.4후퇴 직전으로 전황이 몹시 어려웠던 상황이었고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 받았을 만큼 저돌적이었던 샘에게 후방 전보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것은 명령이다.”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맥아더는 그의 충실한 수하였던 월튼 워커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하였습니다. 때문에 혹시나 최전선에서 사상을 당할 수도 있던 그의 외아들을 안전한 본국으로 전보시킴과 동시에 유해를 직접 운구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유엔군사령관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가 이들 부자에게 베풀 수 있었던 최고의 배려였습니다.
[맥아더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사실 그것은 배려였습니다]
(평양에서 맥아더를 영접하는 월튼 워커)
하지만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던 샘은 전선에 계속 남기를 자원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격은 강골이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샘 워커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워싱턴의 육군성에 근무하게 되었지만 이후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며 1977년에 미 육군 최연소 대장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미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오른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입니다.
[미 육군대장 당시의 샘 워커]
이처럼 6.25전쟁에서 워커부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형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거대했던 6.25전쟁에서 워커부자처럼 공과 사를 구별하며 맡은바 책임을 다하였던 다른 예는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월튼 워커과 리지웨이에 이어 미 제8군 사령관이 되었던 인물은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였는데, 당시에 그의 외아들인 밴 플리트 2세(James Van Fleet Jr.)는 미 공군의 중위로 역시 6.25전쟁에 참전 중이었습니다.
[밴 플리트 미 제8군 사령관]
1952년 4월 2일, 밴 플리트 2세는 B-26 중형 폭격기를 조종하여 평양인근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실종되었습니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미 제5공군 사령관이었던 에베레스트 장군이 직접 밴 플리트에게 사고와 수색내용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밴 플리트는 묵묵히 보고를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습니다.
“밴 플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위험하고 무모하다.”
[실종된 벤 플리트 2세]
아버지가 외아들의 구출작전을 너무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었습니다. 혼자 남아 눈물을 흘렸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써 단호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보기 힘든 그리고 상당히 어렵지만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밴 플리트 장군은 이처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반세기 이상으로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쉽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우리들의 이러한 이야기를 찾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지도층 지도자들의 고의적인 군미필, 직위 남용으로 자녀에 대한 특혜, 비리 및 투기가 만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