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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창/추억의 경음악

함, 땡기고 픈 밤입니다~.

by 바람거사 2024. 9. 24.

70년대 서울에는 캬바레가 있는 곳이 네온 싸인 불빛이 젤 화려하게 비추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을지로, 청량리, 영등포 시장근처 등 말이죠-. 빙글 빙글 돌아 가는 조명등

아래에 바람난 아줌씨, 무스 바른 물찬  제비들의 쫒고 쫒기는 진 풍속에 밤이

깊어가지요-. 이런 풍경은 당시 상영하는 영화속에서도 잘 인용되었죠.

'빨간 마후라'나 심지어 '별들의 고향'의 술취한 경아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는데,

그 신파조 대사가 새삼 와 닿습니다. 빨간 립스틱에 술취한 목소리로 게슴츠레한

눈길을 깔며, '자기야, 나한텐 자기가 내 인생의 전부야, 자기, 날 버리면 않돼.

그렇지 않을 거지??' 

 



홍도야 우지마라 / 김영춘

사랑을 팔고 사는 꽃 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거둬 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우지마라". 한국인의 영원한 누이 홍도를 통해
가난하지만 정결했던 시대를 낭만적 감수성으로 떠올리게 하는
우리민족 정서의 부표와도 같은 연극이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홍도가
오빠의 친구인 대학생과 결혼하지만 시댁 식구의 박해로 쫓겨났다가
결국 살인미수까지 저지르게 된다는 이야기.

여성 수난극의 전형이자 "한국형 최루(催淚)극"의 원조가 될 만한
이 대중신파극의 명성에 비해, 이 극을 쓴 작가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임선규는 일제시대 최고 인기배우였던 문예봉의 남편이기도 하지만,
광복후 부부가 월북을 택하면서 우리의 기억속에서 스러져갔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유랑 극단들이 나중에 임의로 지은 이름이었고,
첫공연 때의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원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였다.
이 연극은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 전속극단이던
청춘좌에 의해 1936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초연되었다.
초만원을 이룬 관객들은 홍도의 불행 앞에서 한 몸이 되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종연 후에도 극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홍도는 오빠의 감동적인 변론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되는 후속편까지 제작되었고,
한꺼번에 전후편이 상연되기도 했다. 재공연은 쉬임없이 계속됐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30년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대중 신파극의
상징이 됐다.1940년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김영춘의 노래로 주제가 홍도야 우지마라’도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