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주]: 이 책 외에 10여 년 전에 동생이 보내준 책으로 '말과 침묵'이 있고, 류시화 시인이 엮은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다'와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다. 나는 나의 '가족의 온도'에서 감히 법정, 한용훈과 성철을 폄하하였다. 법정은 사회활동을 하다가 고립이 아닌 고독을 하려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수필가/시인이 되었고, 또 한용훈과 성철은 자신의 구도를 위해서 가족을 버린 파렴치한 면이 있어서 맘에 걸렸다.
*** 무소유 정신으로 유명했던 고승 ***
속명: 박재철(朴在喆-본관 밀양박씨), 1932년 11월 5일생~ 2010년 3월 11일(세수 77세, 법랍 55세), 출생지: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우수영, 학력: 목포공립상업중학교(31회), 목포상과대학 (중퇴), 해인사 법보전문강원 (대교과-졸업), 소속: 대한 불교조계종, 직업: 승려/수필가/번역가, 별명: 가야산 억새풀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1932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우수영에서 태어나 목포 공립상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상과대학교에 입했는데, 하필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게 되었고,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해 이듬해 승려 효봉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받고 1959년 27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순천 송광사 수련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서울 봉원사 다래헌(茶萊軒)에 살면서 운허와 함께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법정은 종교적이고 피안적인 글만 썼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불교계 인사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섰고 불교 승려로는 그 시절에 몇 안 되는 위인 같은 인물이었다. 만약에 법정스님이 없었다면 그 당시에는주로 기독교계(가톨릭,개신교 포함)가 주도했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불교는 불의에 침묵했다고끄러워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불교 승려들은 극우 개신교 목사들처럼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독재에 편승하여 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서지도 않았다.
생애 대부분을 암자나 산골에서 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속세와 담을 쌓지는 않았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개신교인이자 사회운동가 함석헌이 1970년에 만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김수환이나 강원용 등 타 종교인들과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씨알의 소리'편집회의는 주로 장준하나 김동길의 자택, 그리고 봉은사 다래헌으로 옮겨 다니면서 열렸는데, 어디를 가나 정보기관에서 따라다녔고, 봉은사에서는 그날의 모임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다고 담당 형사가 전화로 상부에 보고하는 장면을 마침 목격한 법정이 홧김에 그 자리에서 그 형사에게서 전화기를 빼앗아 형사가 보는 앞에서 돌에 내던져 깨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법정의 몇 안 되는 감정표현이었다.
속세와의 단절
그러다 1974년 임혁당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마다 생기는 증오심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본분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그곳에서 홀로 지내기 시작했고, 산문집 <무소유> (1976년)를 저술해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조류와는 다른 삶의 길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는데, 오늘날의 Temple stay의 원조가 됐다. 법정이 머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통과 현대, 불교와 대중의 소통이 있었다. 그는 관계의 단절자가 아닌 가교자였다.
무소유 외에도 여러 저서로 일약 유명해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자, 불일암( 佛日庵 ) 생활 17년째가 되던 1992년에 다시금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으로 이사를 가버리곤 법회 때나 가끔 산을 내려왔고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오두막 생활을 소개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5)와 <오두막 편지>(1999)를 저술했다.
길상사 시주
1994년에는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으며, 1996년엔 기생 출신으로 백석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으로부터 서울 도심의 요리집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가 되었다. 김영한은 10년 전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법정에게 자신의 전재산인 대원각 부지 7천여 평을 시주해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법정 본인은 10년 동안 받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 1996년에야 시주를 받아들였다. 이후 법정은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었고, 김영한은 3년 뒤인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뼈를 길상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으며 길상사에는 그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1997년 길상사를 개원했고, 이 자리에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수장 스테파노 김수환 이 참석해 직접 축사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법정은 평소에도 이해인 등 가톨릭계 인물들과 인연이 깊어 이를 계기로 김수환이 직접 축사를 온 것이었다. 법정 역시 1998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성탄전야미사에서 제대에 올라 강론을 하였다. 이때 법정이 "이 제단 위에 저를 올려주신 천주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특별 강연을 가져 종교 간의 화합을 보여 주었다.
길상사를 개원한 후 법정은 다시 강원도 오두막으로 돌아가 1년에 봄·가을 정기법회 때만 길상사로 내려와 법문을 설파하였고 2003년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길상사에서 법회를 가졌다.
입적
2010년 3월 11일에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세수 77세, 법랍 55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기일은 불교식 전통에 따라 매년 음력 1월 26일에 지낸다. 이건희 고 삼성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는 원불교신지로 120억 원을 기부했었다. 그리고 홍라희 여사가 주선하여 삼성 서울병원에 비밀리에 입원시켰으며, 3~4차례의 수술 및 항암치료 비용을 포함해 6200만 원가량을, 법정스님을 문병하러 갔다가 병원 측에 대납 의사를 전한 뒤 결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몸뚱이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 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사리는 찾지 말고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법정은 '사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저서들은 모두 절판, 품절되었다. 그 후 그가 쓴 책들의 수요가 늘어 일부 책들은 가격이 10만 원 가까이 치솟을 만큼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저작권자가 절판 유언을 남겼더라도 출판권은 출판사에게 있기 때문에 더 출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왔으나 3월 22일, 법정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은 그의 유언을 존중하여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쓴 책들의 가격은 10만 원 이상 가격이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혼란이 벌어지자, 법정의 저서에 대한 저작권을 양도받은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와 출판사 측은 2010년 말까지만 그의 저서를 판매하기로 결정하였다. 세부적으로는 2010년 7월 30일까지 그의 저서를 서점에 보급하고, 이를 같은 해 12월 31일까지만 판매토록 한 후에는 모두 수거하여 완전히 절판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출판가의 혼란은 다소 진정된 것으로 보인다.
훗날 개인 재산 소유로 문제가 되었던 혜민스님은 지난 2011년 SNS로 ”법정스님께서 무소유가 가능하셨던 것은 책 인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도나 주지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살 수 있어야, 그리고 또 어느 정도 베풀 능력이 있어야 아이러니하게도 무소유도 가능해진다”며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비판적인 견해를 전했다.
하지만, 실제 법정스님의 삶은 이와 달랐다. 지난 2010년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을 뜻하는 말)한 법정스님은 평생 30여 권의 책을 펴내 받은 인세 수십억 원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썼다. 그러나 잦은 해외 나들이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법정스님의 측근은 같은 해 조선일보에 ”스님께서는 통장에 일정 금액이 모이면 곧바로 기부하셨다”며 ”그렇게 하다 보니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당장 돈이 없어서 길상사에서 빌린 뒤에 갚으실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대표 저서
- 《개 식용 반대론》
- 《무소유》
- 《영혼의 모음》
- 《서 있는 사람들》
- 《말과 침묵》
- 《산방한담》
- 《텅 빈 충만》
- 《물 소리 바람 소리》
- 《버리고 떠나기》
- 《인도 기행》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
- 《산에는 꽃이 피네》
- 《오두막 편지》
- 《아름다운 마무리》
- 《홀로 사는 즐거움》
- 《일기일회》
-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
-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내가 사랑한 책들》
- 《숫타니파타》(번역)
<나무 위키/위키 미디어 일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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