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투어(1)- 뻬루 쿠스코편
몇 년 동안에 걸쳐 LA 나 NYC의 여행사를 통해서 시도를 하였지만, 최소인원이 차지 않았다는 이유와 지인 내외의 참여번복등의
이유로 미뤄졌다. 일정을 보면 비행기를 9번 갈아 타야하는 문제와 고지대를 많이 걷는 동안 고산병을 우려하여 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 같이 보였다. 하여튼, 우리는 그 동안 일정이 빡빡하고 자주 옮겨 다니는데 익숙하여 우리만이라도 강행하기로
하였다. 관절이 부실한 사람들한테는 무리가 따르니 더 늦기 전에 가려고 맘먹었으면 하루라도 빨리 다녀오는 게 좋을성 싶었다.
작년 9월부터 일정표를 받아본 후로 나름대로 역사적 배경이나 기후 등을 틈나는대로 들쳐봤고, 드디여 올 4/6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어메리칸 에어라인편으로 근 3시간 비행거리인 마이애미 경유하여 5시간반의 비행으로 뻬루 수도인 리마를 향해서
봄비가 추적거리는 오후에 장도에 올랐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오후 6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약 3시간 후에 마이애미공항에 1시간 먼저가는 현지시간으로 밤 10시 10분에
도착하였다. 이번 여행때는 짐을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위해서 백팩을 각각 메고 각자가 끄는 케리 온(Carry on) 가방으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항공사마다 제한 중량에 대한 수치가 달라서 필요하면 부쳐야한다는 걸 알았지만, 어메리칸 에어라인의 기준에
맞춰서 20#가 조금 못되게 꾸렸다. 문제는 남미에서 여러 항공사를 이용할 때는 무게가 초과 되면 부치기로 하였다. 그래도 앞으로
5시간 반동안 페루 리마까지 가는 비행기도 어메리칸 에어라인이라 다행이다. 때로 짐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호텔로 뒤늦게
배달이 되면 갈아 입을 옷은 물론 샤워도 못하게 될 우려가 있어서다.
마이애미 공항에서 1시간 40분을 기다리고 밤 12시가 다 되어 리마로 떠났다. 대략 5시간 반의 비행이지만, 저녁식사로 나온 기내식이
넘 한심하다. 몇 년전부터 경기가 퇴조된 후로는 이렇듯 마지못해서 내논 거같은 후진 음식이 나온다. 배가 고프니 아예 안먹을 수도
없어서 먹어야하지만, 어린애 주먹만한 빵에 간소한 샐러드와 후식용 크런치 바. 주식은 닭고기 쌀밥이라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지만,
어쩐지 American Airline 로고가 박힌 설탕과 소금을 넣은 팩이 좀 추레해보인다.
문제는 뻬루 리마에 새벽4시반무렵에 우리 둘만 도착하였는데, 여행사에서 알려준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아서 황당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스페니쉬로 겨우 인사나 하고 숫자나 샐 정도인데 난감한 상황에 쳐해서, 손짓 발짓을 다하여 게이트앞에 나와있는
택시기사한테 부탁하여 그 현지 가이드에게 여러차례 전화를 하였더니 불통되는 전화번호란다. 기가막혔다. 잠 한숨 못자고
머리가 핑핑도는 지친 몸을, 다음 행선지로 떠나는 9시 20분까지 좀 느긋하게 쉬려고 했던 생각은 쪽나고 말았다.
일단 커피와 물을 사마시면서 매점앞에서 죽치고 앉아서, 우리 둘 외에 시카고에서 오는 은퇴한 의사부부 10명이 우리보다 1시간
늦게 남미 항공사인 LAN으로 온다해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이 왔어도 가이드의 현신은 감감. 또 한 시간을 기다려서 뉴욕에서
때거지로 24명이 온 후에야 가이드가 나타났다. 구세주라는 생각보다 "이 자슥, 무슨 개떡같은 변명을 하는지나 알아보자."며
다가서서 다그치니, 죄송하단다. 자기는 오늘 나오기로 한 사람이 아닌 대타란다. 그 가이드가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잠적하여
급히 뉴욕 여행사의 부탁을 받고 7시15분에 뉴욕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주로 마중나온 대타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 친구왈, " 죄송하게 되었는데, 오늘 저를 만나게 된 걸 절대로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 의미는 여행이 시작되면 알게되었지만, 당장 지금은, 너무 황당하여
"아, 첫날부터 잠 못자서 골이 띵한데, 이게 무신 개떡같은 시추에이션인가?" 라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위 사진의 푸시시한 거사의 꾸리한 몰골이 심각하다.
그래도 나는 마이애미에서 이륙하고나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플라스틱 물컵에 1/3만 따라주는 레드와인을 마셨는데,
내가 한 번 더 시키고 집사람도 시켜서 내잔에 부어준 덕에 왼컵 한 잔을 다 마시고 토막 잠을 잔 덕에
그나마 집사람보다는 컨디션이 나은 편이었다.
비행기의 에코노믹 좌석에서는 발이 아래로 쳐져있어서, 장거리 여행때는 다리며 발도 붓고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다리를 이리저리 구부리고 집사람 좌석과 내 좌석을 터서 서로 교대로 엇갈리게 다리를 펴가면서 토막잠을 잤지만,
집사람은 잠자리가 이 모양이면 거의 뜬 눈으로 지샌다. 아, 예전에 한국에 중소기업 진흥공단 기술지도를 나갈 때, 6년동안 매번
비지니스석에 앉아서 느긋하게 음악을 들으며 이름있는 포도주를 실컷 마시고 안주로 가재와 훈제 연어고기를 음미하며
호텔 정식같이 나오는 기내식을 만끽하였는데, 그 호시절이 무지하게 그리워졌다. 그런데, 집사람이 불평을 하였다.
" 다음에도 이코노미석으로 밤 비행기를 타면, 다시는 해외여행 안간다." 난 속으로 대꾸를 하였다.
"미안혀-. 허지만, 며칠만 지나면 다 잊여버릴 거야. 조금만 참어-."
우여곡절끝에 잉카인들이 Inti 라고 칭하는 만물중에서 최고의 신인 태양을 맞으면서, 뻬루 리마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9시 2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안데스 산맥의 준령쪽으로 1시간 20분 날아가서 잉카제국의 수도이었던 쿠스코(Cuzco)로 날아갔다.
쿠스코는 리마에서 동남쪽으로 580km(363 miles), 고도 2,700m 이상이면 산소부족으로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는데,
3,400m인 고지대에 위치한다. 쿠스코는 13세기초부터 1533년 스페인의 피사로가 이끌던 170명도 채 안된사병들에게 한테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인 Atahualpa와 80,000명의 군인들이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정복되었다. 그 황제는 엄청난 금은보화를 주고 구명을
하였으나, 결국 반란죄로 화형을 언도받았지만, 잉카인들은 화형을 받으면 환생하지 못한다하여 Garrote라는 교수대를 이용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피사로는 그 후로 두 명의 꼭뚜각시 황제를 뒀다.
쿠스코는 이제 인구 36만명의 도시로 발전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잉카제국 당시의 인디오 후손들이며, 이제 이곳은 잉카유적을 찾는
고고학자나 관광객들이 연 200만명에 달하고, 수공업적인 면/모직물, 피혁가공 등 경공업이 발달되어있다.
매주 일요일에 쿠스코 광장에서는 1968년부터 1980년까지 군 독재체재의 잔재가 남아서 아직도 사열식이 열리는데,
운좋게 일정이 맞아서 축제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쿠스코 광장 가운데 분수대위에 세워진 태양의 신(Inti)
페루 가이드 10년차인 지 선생의 박식한 설명에 의하면, 잉카인들은 돌을 다듬을 때 쇠로된 정이나 망치를 사용하지 않았고, 강도가
높은 화강암(Binary Granite)으로 그 보다 낮은 암석을 다듬어서 모타르 없이 틈새없게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성벽이며 건물 벽을
축조하였다고 히였다. 오늘날에 와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반 철의 모르스 경도가 4.5 이며 화강암은 5.5~ 7.0 이다. 그러니
철보다 강한 화강암을 망치나 정대신에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도 많은 조사와 연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잉카제국의
군인들은 철기 대신에 주로 돌이나 구리뭉치를 매달은 몽둥이나 창, 화살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사용하였다.
사진의 왼편의 벽이 잉카인들이 축조한 벽이며, 오른쪽 벽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몰타르를 써서 축조한 벽으로 대비가 된다.
그런데 지진이 많은 이곳에서 잉카인들이 쌓은 벽은 깊이 1m나 되며 외부는 4각으로 보이나 내부는
기하학적으로 더 복잡한 형태로 깍아서 서로 끼워맞춰서 큰 지진에도 잘 견디게 만들었다.
코스코 광장의 한 편에 위치한 Qurikancha (원어로 quri gold, kancha walls - Inti Kancha )박물관은 옛 잉카의 태양 신전이었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후에 Santo Domingo 성당으로 개조를 하였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석벽으로 둘러싼 각 신들의 방들이 남아있다.
마치 현대적인 기구를 써서 곱게 다듬은 암석면이나 아귀가 맞아 틈새가 전혀 없는 축조술에 정복자들은 물론 지금도 모두 혀를 내둔다.
쿠스코에서 남동방향으로 175마일 떨어진 세계 최고도에 위치한 티티카카호수에서 온 인디오 여인이 Llama(Yama)와 더불어 사진을
찍게하고 1불정도의 팁을 받는데, 하루 평균 2불로 생활을 한다는 통계를 봤다. 모자가 높은 이유는 3800m이상의 고지대에 살면서
태양광선의 강력한 자외선을 차단하려고 높은 모자를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디오들의 체형이 왜소하고 살이 찐 이유는
산소결핍으로 심장의 무리를 줄이기 위해서 팔다리가 짧게 진화가 된 거고, 대체로 비대한 이유는 주식이 감자/옥수수이기 때문이다.
수명도 짧아서 50대로 보이는 여인들이 30대 후반이고, 평균수명이 여자가 57세, 남자가 55세란다. 빙하기때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살았던 우리들의 고대조상들의 일부가 베링해협을 건너 북미를 거쳐 남미대륙으로 1000년에 걸쳐 흘러 들어간 우리 한민족과 DNA가
가장 가까운 인디오들이기에 짠한 맘을 금할 수 없었다.
인디오 원주민들의 표정은 항시 그늘이 진 거 같은 모습인데, 그들의 수백년동안의 삶이 희망도 없이 가난한 생활에 찌든 삶을
이어오면서 포기를 한 탓인가보다. 일례로 페루 가이드 지 선생은 식구들이 나서서 일년동안 1 핵타르의 감자밭을 경작하여
추수를 도회지 상인들한테 의뢰하면 단돈 200불의 수입을 얻는다고 하였다. 4월초는 남반구에서는 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옥수수등의 추수가 끝나고 빈 옥수수대가 고산지대의 밭에 즐비하게 보였다.
파로라마로 찍어본 산성
쿠스코 외곽에 있는 산성으로 된 요새 Saksaywaman인데, 이곳을 지키던 잉카 군인들이 승리에 도취하여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화약이 거의 떨어져 절망으로 치닫던 스페인 정복자 168명이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야밤에 급습하여 모두 살륙하고 빼앗은 산성이다.
이 후로 잉카제국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패자의 역사는 얼룩지기 마련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쿠스코에 성당을 짓거나
광장바닥 등에 필요한 암석이 필요하면 비교적 가까운 이곳 산성요새의 돌을 마구 옮겨가는 바람에 원형을 유지 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튼, 모두들 고도가 3,700m가 되어 경사진 곳을 천천히 걸어가도 금방 숨이 차고 메시껍고 어지러웠다.
집사람이 1불 주고 원주민과 같이 끌려 온 유순한 야마와 같이 한 컷을-. 집사람의 키는 미국에서 작은 편인데
인디오 여인에 비하면 거인족에 속한다.
t석양에 물들어 가는 쿠스코 전경과 제일 높은 봉오리오르기 전에 세워논 표지판에서 인증샷을. 어둬져서 정상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계곡에 돌로만든 수로가 보인다. 정상에서 맑은 물이 그 수로를 타고 콸콸 거리며 마을로 흘러들어 오는데,
주민들이 필요할 때 그 물을 퍼서 식용이나 기타 용도로 사용하고 물은 근처의 우루밤바 강으로 합류한다.
2,870m에 위치한 우루밤바에 있는 호텔에서 첫 하루를 녹아 떨어져서 자고 나니, 피로가 많이 풀렸다. 약한 고산증세가 나타나서
갑작스레 움직이면 어지러웠다. 백두산의 높이가 2,744m 인데 어려서는 무척 높은 산으로 기억했는데, 새발의 피다.
다행히 호텔에서 WiFi가 열려져있어서 첨으로 시카고있는 식구들한테 안부와 사진도 보냈다.
오늘이 4/8이다. 아침나절에 마츄피츄로 떠나기 전, 민속마을 같은 곳을 들렸다. 마을 뒤켵에는 각종 선인장들이 가득하고,
4, 5000미터가 넘는 병풍같은 산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새파란 하늘에 금방 피어오른 뭉게 구름이 솜틀에서 나온 솜덩이같이
흩어지며 날리는 걸 보니 안데스 산정상을 지나는 기류가 센 모양이다.
조상의 유골까지 방에 모셔논 인디오들의 전통적인 생활터전
인디오들에게는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에 불과하다. 아마도 정복당한 후로 밋보이지 않으려고
선인장이며 나무가지 풀 따위로 만들어서 여기저기 걸어놨다.
곳곳에 성당이 있지만, 미사때 보면 불과 몇 사람만이 자리를 지킬 따름이라고 하였다. 통계로는 남미의 카톨릭 신자가
90% 이상이라 하지만, 인디오들의 믿음은 아직도 잉카제국시대처럼 무속신앙이다. 그래서 한국인들도 의료봉사나, 선물 꾸러미를
전달하며 선교를 온다고 하여도, 그들이 떠나고 나면 모두 다 일상으로 돌아가니 큰 변화가 없을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때로 이슬람권의 선교나 또 남미 오지, 동남아 불교권에서의 선교를 운운한다. 잠시동안 선교를 다녀와서는 마치
개종을 시키고 왔다는 듯이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인디오들은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무속신앙을 그들의 토착화된 생활에서
절대 떼어놓지 못한다.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300여년 동안 카톨릭을 퍼트렸지만, 그들은 엄밀히 말해서 카톨릭 신자가 아니다.
힌두교에 석가모니도 하나의 신으로 귀속시키고,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도 하나의 예언자로 들어놨듯이, 인디오들은 자기네들이
믿는 여러 신들의 하나로 간주할 뿐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미에 오기 전까지는 소나 말이 없었기에 새로 들여 온 소나 말이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게 되어 소를 무속신앙의 숭배대상으로 만들어서 인디오들이 사는 집의 지붕에 두 마리의 형상을 만들어
놨다가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에 대한 탄압을 하자 인디오들은 한결같이 십자가를 같이 매달아서 그 탄압을 피해갔다.
인디오들이 쉽게 단백질을 섭취하는 동물이 '기니아 피그' 라는 쥐과 동물로, 이젠 세계적으로 그 유순한 기질과 아담한 크기로
애완동물로 각광을 받고있다. 혹자는 남미 여행때 그 요리를 꼭 먹어보라고 하였지만, 머리까지 구운 모습을 보면 입맛이 싹 가신다고.
마추피츄로 가는 기차를 타로 가기 전에 우루밤바(Urubamba)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의 전통적인 생활주거지를 둘러보고 거리에 있는
가게가 아닌 그곳에서 도네이션 겸 기념으로 5불짜리 모자를 사서 썼다. 여름이 지나 햇볕이 그리 강하지 않으나 고산지대라 자외선이
강하여 내가 즐겨쓰는 베이스볼 캡은 부적절하다고 하였다. 그곳 원주민들은 물건을 팔 때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속삭이듯이 다가와
one dollar,또는 two dollar, five dollar를 부른다. 좀 비싸게 달라는 건 적당히 깍아서 말하면 팔기도 하고 그냥 스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다 공통통적인 얼굴 표정은 사거나 말거나 무표정이다.
다음 목적지는 이곳에서 다시 20분 정도 Machu Picchu(마추피츄- 오래된 산봉오리)로 가는 Ollantaytambo(오얀따이땀보)
열차 정거장으로 이동한다. 인디오의 언어인 Quechua 어원의 일부가 우리말과 흡사한 우랄 알타이 계인데, 보통 단어들이
북미 인디언들말과 같이 강하고 음절이 길다. 그 발음을 스페니쉬로 옯겨놔도 정확하게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계속)
'이야기 마당 >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미투어(3)-이과수 (0) | 2013.05.02 |
---|---|
남미투어(2)- 마추피츄/나스카 라인즈 (0) | 2013.04.30 |
지중해 크루즈 하이라이트(VII 종편) (0) | 2012.01.04 |
Uska Dara- 터키민요 (0) | 2011.11.22 |
Flamenco Dance In Barcelona (0) | 2011.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