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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당/세상사는 이야기

Photogeneralist Kevin Carter

by 바람거사 2020. 10. 10.

Carter's Pulitzer Prize winning photo

수단의 굶주린 소녀(Sudan South, Kevin Carter,1993)-1994년 퓰리쳐상 수상

 

카터가 이 소녀를 보게 된 것은 수단 남부의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이었다고 한다.

우연히 마주친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

위의 사진은 카터에게 사진작가 최고의 영예라는 '플리쳐 상'을 안겨주었지만, 그만큼의 비난을

가져다 준 사진이기도 했던 '수단의 굶주린 소녀'이다. 남 아프리카 분쟁지역의 사진기자인

는 이 사진으로 인해 받은 상을 기뻐했을까?  만약 그가 상을 받지 못했다면,

이런 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거사주: 인터넷 검색에서 찾아낸 그 소녀는 18년을 더 살았는데 말라리아로 사망)

 

(Kevin carter)

그는 1961년에 태어나 1994년에 자살한 사진기자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아파타이트

정책으로 소요가 극심하던 시절, 다른 동료 세명과 함께 Bang Bang Club으로 불렸던 사진사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총탄이 난무하고 연일 살인과 방화가 발생하는 전쟁터 같은 현장에서

두려움 없이 그리고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취재현장을 파고든다는 평판으로 남아공화국

외신기자들이 붙여준 Bang Bang Club 이다.

                                                   

보도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사진기자라고 부른다.그리고 사진기자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만이

분쟁지역에서 취재를 한다. 분쟁지역에서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은 누구나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보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좋은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인류가 빚어낸 최악의 자기 혐오인 전쟁(혹은 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 비극과 참상을

지구상의 나머지 인류에게 알려 더 이상의 비극을 막으려는 숭고한 의지 때문이다.

 

그는 지역의 작은 언론에서 시작해 후에 로이터,시그마 포토 등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보도사진가의 대부분은 늘 가난하게 살고 있고 케빈 카터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현장에서 늘 목도하게 되는 참상에 대해 늘 가슴 아파했다.

아프리카, 특히 그가 태어난 남아공화국에선 그 당시 분쟁으로 날이 지샜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피비린내가 가득힌 지옥 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를 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하나가 바짝 말라 죽어가는 아이들 아닌가.

그는 일하고 있던 매체에 휴가를 내고 항공료를 빌려 당시 기아가 극심했던 수단으로 향했다.

아요드란 곳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기아로 인한 희생자를 찍기 시작했다굶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이 미치길 갈망하며 넓은 숲으로 이동했다.

그는 한 소녀가 급식소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 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 왔다.

그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20분동안

기다렸지만, 독수리는 끝내 날개를 펼치지 않았다.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독수리는 살아 있는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 어린 소녀는 다시 급식센터로 향하는 어려운 발걸음을 이었다.

케빈 카터는 나무 아레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느님~" 하고 중얼거리면서 울기 시작 했다.

그의 수단 취재여행에 동행했던 동료 실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후 계속 침통해져 있었고

딸을 보고 싶다면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사진은 수단의 사진을 찾던 뉴욕타임즈로 보내졌고 1993 3 26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전세계에 사진이 전파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진이 아프리카의 참상의 아이콘이 된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유명해졌지만 일하던 매체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이듬해 4 12일에 퓰리쳐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보 받았다.

4 18일 그를 포함한 Bang Bang Club의 동료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0마일 떨어진 토코자

마을로 향했다. 폭력사태의 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정오가 되기 직전 좋은 사진을 찍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카터는 시내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라디오에서 동료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 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이란 소식도 함께.

케빈 카터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폭력사태가 더 격화되었음에도 다시

토코자에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켄이 아니라 내가 총알을 맞았어야 했다.'라고 술회했다.

 

퓰리쳐 상을 받으면서 많은 비난의 목소리도 접해야 했다.

케빈 카터 자신도 자주 고통스럽게 보도사진가의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곡 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 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현역 최고의 보도사진가중 한명인 제임스 나치웨이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그해 7 27일 케빈 카터는 33살의 나이에 자동자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결해 둔 채,

차 안에서 자살했다. 수 많은 참상을 지켜 본 카터는 남아공에선 흔하기 짝이 없는 마리화나를

자주 피웠고, 친구 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말년에는 마약에 기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상을 뜨면서 악몽과 불길함 따위로 범벅이 된 유서를 남겼다.

 '절망적이다.전화가 끊어졌다... 집세도 없고...양육비...빚갚을 돈...!!이 없다....

나는 살륙과 시체들과 분도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권총을 마구 쏘는 미친 사람,경찰, 살인자, 처형자 등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 말도 남겼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

 

<참조>: 권천학의 학 마을- blog.daum.net/chkwon1004/18358792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