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색의 오솔길

빛바랜 추억의 연서

바람거사 2010. 1. 30. 00:06

 

 

 

 

Yuri,

 

언젠가 얘기한  룻소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한눈에 반하여 홍안이 되어버린 그 아릿다운 시골 아낙만 곁에 있다면,

모든 걸 다 내동댕이치고, 그저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뒷뜰은 설악의로 연결되는 우거진 꽃댓잎이 칙칙하고,

그 사이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줄기가 뜨락의 조그만 연못에 이르더이다.

원두막 곁으로 늦게 핀 겹 벗꽃 만발하고,

박태기나무의 진분홍 모듬 꽃들이 잔잔한 설레임을 주더니,

송이 막국수 향긋한 향내에 취해버렸소.

캬~ 하며 연거푸 비워대는 소줏맛이 그 날은 그렇게도 달았지요.

 

눈 부신 햇볕이 짙 푸른 하늘과 산야를 물드리던 날,

언덕바지에 우뚝서서, 오늘 전투에 나가면 다시 살아서 돌아 오지 못할 것같아서인지,

추장은 근엄하게 말했다.

" 싸우다 죽기 좋은 날이다!"

그래, 오늘은 술 받는 날, 마시기 좋은 날,

어디, 꼬꾸라질 때까지 마셔 볼 거나?

  

수 년전 하조대에 들렀던 일이 떠 올라서 해 본 소립니다.

뒤 늦게 이리 그리워 할 줄 알았지.

솔직히 요샌 한동안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맘이 하늘 가득하답니다.

이 나이(?)에 그 놈의 시험까지 너무 움추려지게 만들어, 화딱지가 되게 나거든요.

그나마 나중에 결과나 좋게 나오길 바랜다지만.

헌데 말이요.

입산을 하고, 낙향을 하려면, 

입신양명이 우선한 다음 일이어야  그 순번이 맞을 거 아니겠소?

사실, 그 무슨 전제 조건이 있어야만 될 일은 아닌듯한데,

그리 생각하는 것도  사치스런 욕망이 아닐런지.

아니면,  무릉도원 꽃 동네에 틀어박혀 세월을 낚고 있으니,

괜스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요근래는, 메일은 고사하고,  

입빠른 소릴 해대기도 싫어서 일기까지도 쓰기 싫소이다.

헌데, 오늘 눈같이 하얀 크랩애플 꽃잎들이 온 천지에 어지러히 날리고,

자주빛 라일락 꽃덩이가 만발하여 그 향내가 뜰악에 가득하니,

숨겨졌던 정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이리 자판을 두드려 보네요.

이젠, 반갑게 내 글을 받아 볼 거라는 기대도 없이

내 감상으로 쓰고 있소-.

 

 

2004년 봄

노스부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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