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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의 비밀과 해설

바람거사 2021. 4. 25. 06:50

추가 수정 참조:   https://blog.naver.com/yl1ca/80100179039

 

추사체를 이룩한 위대한 서예가인 김정희, 자 원춘(元春), 호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은 북학자로 경학·사학·금석학 및 불교와 도교 등 문사철(文史哲)에 두루 박통한 대학자이다. 그러나 학자와 예술가로서의 진면목은 서예가로서의 명성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림에 나타난 복고성 때문에 보수적인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새롭게 부각되던 중인 계층을 적극적으로 성장시켜 미래를 준비한 그는 근대적·혁신적 성향이 두드러진 이른바 신지식인이다.
그러나 김정희를 따른 제자들은 사뭇 고답적이어서 스승과는 어긋난 시대 경향을 보여줬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던 김정희가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北京)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인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게 1844년(헌종 10)에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그는 이 그림에서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그림에는 오른쪽에 ‘歲寒圖(세한도)’라는 화제(畵題)와 ‘藕船是賞阮堂(우선시상완당)’이라는 관지(款識)를 쓰고 ‘正喜(정희)’와 ‘阮堂(완당)’이라는 도인(圖印)을 찍어 놓았다. 화가로서의 기교가 담긴 그림이 아닌, 단색조의 수묵, 그리고 마른 붓질과 필획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졌다. 끝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그 좌우로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다.

  ※ 歲寒(세한) :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
  ※ 歲寒松柏(세한송백) : 한겨울의 소나무와 잣나무, 어떤 역경 속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는 사람,

                                또는 그 지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한 동안 새로나온 서적들을 접하지 못하다 오늘 여러 신간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여러 신간 중,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여서인지, '『세한도』(박철상, 문학동네, 2010)'가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책에 대한 정보를 읽어보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세한도」의 '구상과 창작배경'의 비밀을 풀었다 한다. '세한도의 비밀?' 「세한도」에 그러한 비밀, 수수께끼가 있었던가?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니, 「세한도」의 구상과 창작 배경,, 무엇보다 이 그림이 어떠한 경위로 어느 시점에 그려지게 되었는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었고 이를 위 책에서 고증하였다고 한다. 간략히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위 책에서 저자는 추사의 「세한도」 그림의 원형은 12세기 송나라 소동파의 「언송도」(현재 전하지 않음)였으며, 이는 최근 발굴한 추사의 편찬서 『복초 재적 구』중 담계 옹방강의 「언송도」 그림에 관한 한 시구의 내용(고목이 된 소나무는 비스듬히 나뭇가지 드리우고 집에 기대어 있네.)에 근거하였고, 이 시는 20대 청년 추사가 연경 방문시 담계 옹방강의 서재에서 보게 되었다 한다. 흥미롭다. 그런데 이내 '의문'이 생긴다. "정말 지금까지 이 「세한도」에 관한 창작배경과 시점이 알려지지 않았었나?"

 

「세한도」에 관한 창작배경과 시점

추사 김정희, 「세한도」 발문 

                                      

"지난해(1843, 헌종 9)에,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 皇淸經世文編』(『황조 경세 문 편皇朝經世文編』)을(『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쫓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쫓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孔子께서, “일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전에도 똑같은 소나무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 浮沈에 따라 붙쫓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下邽 땅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榜을 써 붙여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

완당노인阮堂老人 씀." (한국 고전번역원 참조)

 

「세한도 歲寒圖」의 비밀?

동파 소식의 「언송도」가 어떤 그림이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지만 앞서 살펴본 담계 시의 한 구절로 미루어 보면 위 책에서와 같이 그 관계를 상정하여 볼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 형태는 중국을 포함한 동양미술에서 흔한 관습적 표현(Conventional Expression)이다. 지금 일일이 밝힐 수 없지만 위 시구와 비슷한 내용의 동양미술의 화론들도 상당수 존재할거라 생각된다. 또 추사와 같이 수 많은 문헌과 사료들을 접한 큰 학자가 한 시구의 내용을 모티브로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좀 무리한 추측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한가지 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추사가 예술을 사랑하고 폭넓은 신분의 사람들과 교류한 문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가 사대부라는 사실이다. 이는 추사가 여느 화론, 화기에 의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기보다 발문의 기록들(이상적의 도와 의를 좆는 행동) - 이상적, 사마천, 공자, 적공 - 을 모티브로 그 마음의 울림을 붓으로 표현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이러한 소담한 필치의 그림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 적공翟公고사

“한() 나라 때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실각하자 이내 그의 대문에는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그 뒤 그가 다시 정위가 되자 또 당초처럼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그는 대문에다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서봐야 교정을 알게 되고, 사업에서 망하고 흥해봐야 교태를 알게 되며, 벼슬길에서 귀천을 겪어봐야 교정이 나타난다.[一生一死,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熊, 一貴一賤, 交情乃見.]’라고 써 붙여 세상 사람들의 염량세태를 신랄하게 책망하였다.(『史記· 汲鄭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