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28에 동아 콘텐츠 본부장이 전달한 카톡 메시지에 매우 놀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서 온 상호(가명)에 대한 황당한 이메일 내용을 나한테 전해준 거다. 바로 고맙다는 답장을 미루고 먼저 알아봐야 할 거 같아서 상호와 친하게 지냈던 민규(가명)에게 연락하였다. 민규는 나한테 연락을 끊어버린 동안 상호한테 여러 차례 부탁한 종교나 철학 서적도 보내주고 또 민규의 아들 진로 문제를 상의할 겸 10여 년 전에 두 번이나 텍사스까지 가서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상호는 주류사회와 연관되는 일은 없고, 가족 모두가 세탁소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민규는 상호 처와 미혼인 셋째, 막내딸에게 맡기고 자기는 운동이나 하러 나간다고 하면서, 그의 처가 울면서 하소연하였고, 그 딸은 "아빠 같은 사람 만날까 봐 결혼하지 않는다."라고 했다면서, 크게 실망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로 민규는 그런 못된 놈이라 치부하고 절교하며 지냈다고 지난 방한 때 광양에서 50여 년 만에 만난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전달받은 이메일의 내용은 상호가 한 2년 전부터 날 찾는다고 하여 그의 처 친구가 시카고에 있어서 부탁을 했는데, 한인 지역사회나 교회에 전혀 관여할 일이 없는 시카고에서는 찾지 못했다고, 그런데 한국의 SNS로 내 이름을 검색하다가 지난 방한 때 인터뷰한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담당자에게 그가 지금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렇게 전달해 준 메시지에 알려준 상호와 세탁소 번호로 수차례 걸어봤으나 불통이 되어, 상호 처한테 걸어서 통화하였고 그동안에 일어난 놀랍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알게되었다.
뚱딴지같은 시한부 삶이라니? 세탁소 일 오래 하면 유독가스로 폐 질환을 앓기도 한다지만 뜻밖에도 심장의 동맥 판막 결손이 되어 인공 판막으로 대체해야 하는 상황인 거 같은데 제정신이 있을 때인지 무슨 이유로 수술을 거부하였단다. 그의 처가 잠시 후에 상호에게 전화를 건네줘서 통화를 하는데, 좀 이상하였다. 통화 중에 자주 웃으면서도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존댓말을 쓰고 또 말끝에 내 전화번호를 묻고. 다시 전화기를 집사람에게 건네주고 그의 처와 한동안 통화했는데, 인지기능이 심하게 나빠졌다는 것이다. 그런 증상이 언제 왔는지 매우 궁금하여 오늘 그의 처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더니, 바로 연락이 왔다.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게 아니고 집에서 지낸다고 하여, 그의 처와 같이 영상통화를 하였다. 40여 년 만에 서로 늙어빠진 얼굴을 보여줬다. 이 친구는 예전에도 이마가 벗어졌었는데, 이젠 머리카락이 거의 없고 얼굴은 좀 부은 듯 하지만 눈썹은 완전히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오늘도 내가 누구인지 혼동되는 모양이고 말이 어눌하여 청력이 별로 안 좋은 나와 대화하기가 어려웠는데, 또 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와는 소통이 잘 안 되어 잠시 그의 처한테 언제 발병하였고 또 정신력은 언제 흐려졌는가 물었더니, 몇 년 정도가 아니고 16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10여 년 전에 민규가 두 번이나 텍사스에 갔을 때 몰랐었냐고 하니까 그땐 그리 심하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왜 수술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마취를 하면 모든 게 더 나빠진 다고 하여 그대로 사는 날까지 지내기로 하였단다. 확실한 심장상태는 모르겠지만, 응급을 필요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큰 문제는 학창 시절부터 술을 즐겼던 그는 오랫동안 과음을 한 탓에 뇌 손상이 인지기능 저하를 하게 된 원인이 된 거다.
그런데 작년 2022년 8월부터 인지기능 저하가 심해졌고, 지난 올 5월부터 급격히 나빠졌다고 하였다. 그동안 심장수술은 하지 않은 데다 인지기능이 떨어진 채로 집에서 지낸다는데, 증세가 더 심해지면, 지금도 중증 같은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심장에 문제가 있는지, 자기의 생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수도 있으니 그나마 본인한테는 다행이라고 할까?
상호는 80년도 중반에 텍사스로 이주한다면서 정착되면 연락한다고 했었다. 그 후로 1978년에 한국을 떠나온 지 22년 만에 방한하면서 여러 동창을 만나면서 근 40년 동안 나한테는 무관심했다. 이제 이런 황당한 일이 생겼으니, 그동안에 괘씸하고 서운한 맘을 거두고 그를 만났던 동창에게 전화번호라고 물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되었다. 그때는 그가 새로운 환경에서 새 친구 사귀면서 지내고 싶었던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정신이 좀 있을 때인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2년 전에 날 찾아달라고 했지만, 실기한 게다.
그 후로 1월에 두 어 차례 영상 통화를 했지만, 별다른 얘길 나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나한테 존대를 하다가 끝에 가서는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도 하고, 실실 웃기만 하였다. 2월에 들어서서 나는 딴 세상에 사는 이 친구와 통화하는 게 더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제 그의 갈 길을 가야 할 거 같아서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의 처가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애 아빠가 통화하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고, 집사람이 잠시 통화한 모양이다. 그리고 2월이 지나고 3월 초 그의 처한테서 집사람한테 카톡 전화가 왔는데, 나를 바꿔달라고 하였지만, 화장실에 갔다고 핑계 대고 끊었는데, 집사람이 하는 말이 이 친구가 그날 아침에 쓰러지더니, 듣기는 하는 거 같은데 말을 못 한다고 하면서 그의 처한테 전화를 해보라고 하였지만, 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집사람은 마지막 전화 같은 데 해보라고 하여 정말로 그리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통화하겠다고 하여 전화연결을 해줬다. 그의 처는 애아빠가 말을 못 하여 귀에다 전화기를 대줄 터이니 말씀하시라고 하였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되었는데, 이렇게 만나보지도 못하고 말았다며, 맘 굳게 먹고 몸조리 잘하라는 얘기밖에 할 얘기가 없었다. 그의 심장 동맥 판막이 이제 제구실을 하지 못하여 오래 버티지 못할 거 같다. 그의 처는 "미안하고 고맙다."라고 하였다. 이제 그는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길로 들어설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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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1948년생)의 "방랑 삼천리(1968)"는 이 거사가 즐겨 불렀던 노래다. 낯선 서울에 유학 와서 고닯은 삶을 살던 때다. 60년대 말 초가을에 남대문 시장에서 싸구려 바지와 구두를 사고, 황혼이 질 무렵에 서울역으로 걸어오는데, 역 광장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던 이 노래가 가슴이 찡하게 심금을 울렸다. 그 후로 바로 배워서 회식 때마다 18번으로 불었는데, 상호가 제일 좋아했다. 미국에 와서도 술이 거나하게 된 그는 내 노래를 오랜만에 듣고 싶다며 눈을 지그시 감고 듣는 동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옛날보다 좀 못하지만, 역시 참 좋다-."라고 하면서-.
**** 자전적 장편소설 “가족의 온도”에서 발췌한 절친 얘기 ****
------ 공항에는 문희와 그녀의 동창 몇 사람 그리고 석주보다 일 년 먼저 온 대학동기 상호도 나와 있었다. 젤 먼저 문희의 웃음 먹은 상기된 얼굴을 보며 손을 잡아주고 다른 사람들한테 목례를 하며 간단한 인사를 하였다. 상호는 크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야, 드디어 왔구나! 씨뱅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게 상호다운 첫 화두였다.
“짜슥, 넌 여전하구나-.”
그래도 뒤늦게 오는 사람은 환영객이라도 있어서 아주 낯설지가 않았지만, 젤 먼저 왔던 사람들에겐 석주가 서울역에 첨 혼자 왔을 때같이 침이 마르고 상기된 얼굴에 어설프고 막연한 두려움에 반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될 것 같다. 몇 대의 차가 새로 옮긴 월세 아파트로 출발했다. 공항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반 시간 정도 가는데, 가로등이 한국같이 수은등이 아니고 누르스름한 백열등인 데다 차창에 스치는 암갈색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마치 폐허같이 도열해 있었다. 겨울이 길고 춥고 눈도 많이 오면서 바람도 매섭게 분다더니, 건물들이 투박스럽고 육중하게 보였다.
------- 주말이 되자 상호한테서 연락이 왔다. 미국에서는 술 한 잔을 마시더라도 한국 같은 분위가 아니라며 자기 집에서 한잔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상호는 뽑은 지 일 년밖에 안 된 번쩍거리는 승용차로 석주를 태우고 20여 분 걸려서 어느 허름한 아파트 빌딩으로 데리고 갔다. 어둠침침한 계단을 올라가서 복도의 맨 끝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어두운 방 안에 들어서자 주물로 만든 투박스러운 온수 라디에이터에서 나오는 열기로 숨이 턱 막혔다. 거실과 부엌 창을 조금 열어 놓으니 훅하며 밀려들어 온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면서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상호는 손잡이에 손때가 잔뜩 묻은 냉장고 문을 열고 돼지고기를 갈아서 요리한 스팸((Spam) 깡통을 꺼내고 맥주나 독한 위스키 대신 저렴한 1.5리터짜리 테이블 와인을 물컵 두 잔에 가득 부으면서 말했다.
“미국에 온 걸 축하해야 할 일인지 위로해줘야 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청춘을 위해서 건배하자!” 둘은 물 마시듯 한 잔을 금세 비우자, 상호는 바로 한 잔을 가득 채웠다.
“우리 집이 좀 지저분하지? 마누라가 밤 근무를 하니까, 청소나 빨래도 제 때 못하고 어린 딸년까지 생기는 바람에 정신없이 산다. 너도 잘 알다시피 나도 깔끔한 사람이 아닌 데다 이른 새벽엔 나도 또 일하러 가고 말이야.”
“자리를 잡는다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민 햇병아리들이 모두 다 이리 사는 거지. 아, 그런데 만규가 꼭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라. 네가 떠나기 전에 같이 대전에 있으면서도 떠나는 것도 몰랐다고 하면서 말이다.”
“만두? 걘 제대했냐?” 그러면서 피식 웃었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려라.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보니 모두 다 거추장스러운 기억들이다. 오로지 살기 위한 투쟁밖에 없지. 여기 내 손바닥을 봐라. 잡(Job) 찾으러 수없이 다니면서 핸들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다니니까 손바닥에 물이 잡히더라. 게다가 내가 별 기술이 있냐? 대학 때 공작실습 시간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난 데, 여기 와서 갈고 때리고 조이는 일을 하다 보니 이리되었다.”
석주는 그의 양손을 보니, 엄지 밑 손바닥의 가장자리에 물집이 잡혔다가 터진 후에 생긴 굳은살이 확실한 증거라도 되듯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오른 손목에 감긴 때 묻은 붕대를 보여주며 하도 망치질을 해서 팔목이 시리고 아파서 감고 다닌다고 하였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평생 망치질만 하겠냐? 다 참아내고 또 때가 되어야 무슨 일이고 하고픈 일을 할 수 있으니 지금은 기다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의사 한번 만나러 가도 몇 주 전에 약속해야 하니, 한국에서처럼 조급해하는 사람들에게 Take a time이나 Take it easy 하는 인사말을 쓰지.”
“하긴, 한국인들의 서두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조바심은 알아주지. 오늘내일 필요한 것도 아닌데 지금 가져다 놔야 하고, 좋은 것은 자기가 먼저 갖고, 타고 가야 하는 맘은 어느 때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조상들은 양반의 예절 법도에 따라 비가 와도 뛰지 않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여유 있게 식사를 했다는데, 아마 일제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편법을 배웠고, 또 6.25 전쟁이 또 한국인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나 보다.”
주정이 약한 포도주라도 연거푸 마시다 보니 상호의 검은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큰 눈을 지그시 감으며 열변을 토했다.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는 유대인들이 큰 장사는 다잡고 있거든. 여기 한인 타운은 유대인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고 한인들이 동양의 유대인이 되어서 그 뒤를 잇고 있지. 14세기에 베네치아에서 그들이 돈놀이를 많이 하면서도 성경에 쓰인 대로 자기끼리는 이자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구먼. 즈네들끼리는 똘똘 뭉치고 외부 사람들을 경계하고 쥐어짜고 말이다. 하여튼, 장기적인 계획이나 투자보다는 현금을 선호하고 단기적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것도 다 알고 보면 모두 모여서 살 땅이 없이 미래가 없는 남의 땅에서 산재해 살아오면서 터득한 사활의 신조 아니겠어?”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도 좁은 땅에서 많은 사람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편이 굳어져 지금의 대다수의 국민성이 되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과 무관한 경우엔 과잉친절을 보이고, 이권이 개입되면 많은 이들이 안면몰수하지.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된 과정에서 생긴 것이지 한국인들의 전통적 기질이라 생각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날 둘은 모처럼 취기가 올랐고, 그동안 밀린 얘길 실컷 나누다가, 술도 깰 겸 아직 쌀쌀한 날씨에 이슬비까지 내리는 스산한 공원에서 한동안 걷다가 다음 주말엔 석주네 아파트에서 만나기로 하고 늦은 오후에 돌아왔다.
-------- 그런데 이사 가기 전 2년 동안 석주는 아파트에서 가까운 공원에서 예전에 군 복무할 때처럼 주말엔 틈나는 대로 상호와 몇 시간씩 테니스를 하고 난 후에 석주네 아파트에 가서 문희가 열심히 차려준 생마늘을 곁들인 상추쌈과 불고기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제 막 적응해 가는 이민 햇병아리들의 고충을 털어놓고 어찌 살아야 하는 등의 문제로 매번 열을 올렸다. 상호는 사실 공학보다는 철학과 종교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 두고 있었고, 겉으로는 기독교를 신봉하였지만, 그의 삶의 방식을 보면 누구라도 그 속내를 가늠치 못하였다. 술도 억세게 좋아하고 종교와 철학적인 주제만 나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지기 때문에, 동창들보다 두어 살이 많은 데다 앞머리까지 벗어진 그는 검은 뿔테 안경에 항시 낡고 꾀죄죄한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다녔기에 별명이 ‘철학 교수’이었다.
“나는 말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다.”
“아니, 이제 연년생으로 딸을 둘씩이나 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찌 됐건 인생은 고독한 거지. 먹고살기 위해서 손목이 시려도 끝없이 망치질해야 하고. 마누라는 집안 살림은 제쳐놓고 밤낮으로 뺑뺑이 치며 일만 하고 말이야.”
“가진 거 없이 떠나온 우리가 그리 살아야 하는 거 아니냐?”
“난 말이다. 때가 되면 다 벗어던지고 모세처럼 저 광활한 애리조나 사막으로 들어갈 거다.”
그 후로 상호는 아들을 하나 꼭 두려고 했던지 몰라도 또 딸 하나를 더 낳았다. 그리고 어느 날 석주한테는 일언반구도 없이 어디론가 이사 가버렸고 수십 년이 흘렀지만, 만나기는커녕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석주가 미국 온 지 11년 만에 첨 방한한 후로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을 때, 만규가 여럿이 어울려 상호를 만났다며 전해주는 얘기가 전부였다. 오랜만에 모인 자리에서 상호는 지금 애리조나의 어느 소도시의 한인 타운에서 목회를 하려고 신학교에 다닌다고 하자, 입바른 얘길 잘하는 동창이 비아냥거렸다.
“야, 니가 목사가 되면, 이 세상에 목사 안 될 사람이 하나도 없겠다.”
이 한마디가 화근이 되어 서로 멱살잡이를 거세게 벌였다는 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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