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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주따라 갈리는 운명, " 비극의 '속헹'이 나였을 수도"

바람거사 2021. 2. 6. 08:14

(거사 첨언): 한국의 경제적인 성장은 과목할만해도 정치풍토나 국민정서는 개도국이나 저개발국가와도

비교가 안되는 최악의 과도기에 처해있는지 아니면, 전혀 희망이 없는 건지 둘 중 하나다.

 

한국일보- 밥상의 눈물: 입력 2021.02.06 04:30

 

값싼 노동력 아니라 인간입니다. 난 아채농장 근무 동명이인 '속헹', 계약서 7시간 실제론 11시간 일해-
"빨리빨리" "잔말 말고" 불호령, 소처럼 여기저기 품앗이 되기도. 2200만원 체불에 병까지 얻었죠.
"새 사장님 임금 제때 줘서 다행"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심 속헹(25)씨가 지난달 22일 충북 충주시 숙소에서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들고 있다. >이한호 기자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안녕하세요.둘째 딸 속헹이에요. 저는 매일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요. 한국의 날씨는 캄보디아에 비해 너무 추워요. 하지만 저는 매일 일할 수 있어요. 처음에 한국에 와서 일했던 사업장의 사장님은 임금을 제대로 안 줬어요. 매달 은행에 들려 통장을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 집어넣을때마다 한 푼의 금액도 채워지지 않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힘들었어요. 몸이 아픈데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도 못했구요. 다행히 저는 직장을 바꿨고 새로 만난 사장님은 임금을 규칙적으로 줘서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몇 년 지나지 않아 저는 캄보디아로 돌아갈거에요. 저는 열심히 애쓰고 있어요. 사랑하는 남동생들과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분투하며 가능한한 돈을 많이 벌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나중에 캄보디아로 돌아가서 아버지, 어머니와 언니, 두 동생을 행복하게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행운이 있길 바라요. 모든 가족들에게 행운이 있길 바라요.                           -막내딸 속행-

 

 

이름이 같아서 더욱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영하 18도 살을 에는 추위 속에 3,500km 떨어진 고향을 생각하며 포천 비닐하우스에서 삶을 마감한 속헹이 저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는 심 속헹(25)입니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여섯 살 터울 언니였던 누온 속헹과 이름이 같은 속헹입니다. 2018년 6월 한국에 온 뒤 저와 같은 비전문취업(E-9) 캄보디아 이주노동자가 20명 정도 불귀객(不歸客)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지난해 12월 20일 페이스북 캄보디아 커뮤니티에서 접한 속헹 언니의 사망 소식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 이유는 공교롭게도 저와 이름이 같기 때문이었죠.

 

동생들 위해 이주노동자 자처한 그녀

저의 코리안 드림은 슬픔과 좌절이 켜켜이 쌓인 와중에도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에 있는 남동생 2명이 학사모를 쓰는 모습을 보는 게 제 희망입니다. 저는 캄보디아에서 논일과 밭일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2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집안살림을 도맡았습니다. 언니는 결혼해 두 명의 조카까지 키우고 있어, 남동생들 학비를 지원해주기에도 빠듯합니다. 가족 중 대표로 E-9 이주노동자의 삶을 택한 것도 동생들 학비를 지원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학비 지원을 하고도, 여윳돈이 생긴다면 고향에 돌아가 생필품을 파는 작은 상점을 꾸리는 게 저의 코리안 드림 버킷리스트 중 하나입니다.

머나먼 한국에 오기 위해 고향에서 1년간 한국어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EPS-TOPIK)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시험에 통과했고, 농축산업(E-9-3) 업종에 지원했습니다. 제조업에 비해 임금은 적지만 부모님 밑에서 농사일을 도왔던 경험이 한국 농장주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천에서 사망한 속헹 언니의 농장에도 캄보디아 여성 5명 있었다고 하잖아요. 현재 제가 일하는 사업장의 노동자들도 전원 외국인이며, 이 가운데 여성이 80% 이상이나 됩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현재 일하고 있는 충북 충주 농장의 모습. 사진 왼쪽부터 짠다(28) 예익니(32) 속헹(25) 티에라(25) 보레이(32) 스레이라이(25) 이한호 기자

 

첫 사업장은 충북 충주 야채농장이었습니다. 비닐하우스 10동에서 상추와 토마토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게 일이었죠. 이 농장에는 저 말고도 이주노동자 2명이 이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손이 부족했던 모양인지, 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더군요.

매일 초과 노동 근로계약서는 허울 뿐

선임자들의 한숨이 어떤 의미인지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알게 됐습니다. 사장님이 사인을 하라고 내밀어준 근로계약서 내용과 현실 속 환경은 전혀 달랐습니다. 계약서에는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고 한달에 나흘 휴일이 보장된다고 기재돼 있었지만, 실제론 새벽 6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평균 10시간 30분씩 일했습니다. 휴일도 고작 이틀 뿐이었습니다. 계약서 내용과 딴판인데도 당당한 사장님 모습을 보면서 실망감은 점점 커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2018년 6월 28일부터 2020년 6월 7일까지 2년간 매일 초과 노동에 시달리며 일했습니다. 물론 계약서 내용 중 사장님이 철두철미하게 지킨 것도 있습니다. 초과수당과 휴일수당 없이 근로계약서에 기재된 기본 임금만 지급한 것과, 비닐하우스 숙소와 생쌀 제공에 따른 숙식비를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땅에 가장 가까이 있지만, 닿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하루에 30박스 되는 상추를 따기 위해선 하루 종일 발뒤꿈치를 들고 쪼그려 앉는 자세로 일해야 하기 때문이죠."

- 충북 충주 야채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E-9 이주노동자

 

근로계약서보다 30분 빠른 새벽 6시 30분에 시작되는 첫번째 일은 밤이슬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씌어둔 비닐을 벗기는 작업입니다. 특히 한로(寒露)가 되면 이슬을 머금은 비닐이 무거워 남성 노동자 없이 여성들로만 비닐을 벗겨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비닐하우스 10동의 비닐을 모두 벗기면 이미 하루를 다 보낸 것 마냥 기진맥진하지만, 그때부터 본격적인 일이 시작됩니다. 토마토를 수확해서 옮기고 나르는 일이 반복됩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사장님 목청에 놀라, 익지 않은 토마토를 따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표준근로계약서에는 농축산 업종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실상은 공장에서 비닐포장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 하지만 이들 노동자들은 농업 관련 종사를 하지 않았음에도 근로기준법 제63조에 따라 근로시간, 휴게, 휴일 적용에 예외가 되고 말았다. 사진=김이찬 '지구인의 정류장' 대표 제공

 

사업주 꼼수에 공장노동자로 일해

캄보디아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의 이주노동자 생활은 더욱 기상천외했습니다. 친구는 경기 이천에서 하우스작물을 재배하는 것으로 알고 한국에 왔는데, 실제론 잎채소와 같은 엽채류를 포장하는 공장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농업 분야 표준근로계약서에는 농장에서 근무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친구가 일한 곳은 농장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포장 공장이었습니다. 공장 소속 한국인 직원들이 농장주 신분으로 5명 미만씩 이주노동자를 채용한 뒤, 이들을 30명 이상 모아서 공장에서 일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친구는 서류상으론 농축산 업종으로 등록돼 있었지만, 실제론 제조업 분야에서 일했던 셈입이다.

 

왜 그럴까요. 농축산 업종은 제조업보다 한국인 사업주에게 이점이 많다고 합니다. 근로기준법 63조에 따라 근로시간과 휴일에 제한이 없다 보니, 합법적으로 장기간 노동을 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농축산 외국인노동자는 제조업 직원보다 보험료를 두 배나 납부하지만, 아파도 병원에 갈 시간이 없고, 농장주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네팔,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베트남 5개국 농어촌 이주노동자 12명이 자국언어로 쓴 편지. 편지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 쓸 순 없지만 이들은 한국의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열악한 주거시설과 노동환경으로 건강이 손상됐다는 내용을 담았다.

품앗이 이름으로 다른 사업장 차출

한국에서 처음 배운 문화는 ‘품앗이’였습니다. 농한기가 되면 사장님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사장님 동생이 운영하는 상추·토마토 농장으로 데려가 일을 시켰습니다. 때로는 사장님 친구가 운영하는 고추농장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왜 다른 사업장에서 일해야 하냐”고 묻자, 사장님은 “농촌의 품앗이 문화이니 잔말 말고 따르라”는 말만 돌아왔습니다. ‘품앗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는 거라고 하더군요. 근데 왜 우리는 품을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은 없을까요. 아무런 대가 없이 여러 사업장을 돌면서 일을 시키는 건 우리를 소나 말처럼 대여해주는 존재로 보기 때문일까요.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캄보디아 전통문화까지 바꿔놓았습니다. 지난해 겨울 저는 6년 전 만난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잠시 고향인 캄보디아로 돌아갔습니다. 본디 캄보디아에선 점쟁이가 정해준 날짜에 결혼하는 게 전통입니다. 하지만 본국에 돌아가기 위해선 한국인 사장님의 허가가 있어야 했기에 저에겐 사장님이 점쟁이였습니다. 사장님이 “일손이 부족하지 않은 농한기에 돌아가라”고 해서, 저는 예정된 결혼식 날짜를 연기하고 농한기에 맞춰 결혼하러 갔습니다. 저 같은 캄보디아 농촌 이주노동자들이 최근 겨울철에 결혼을 많이 하는 건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2,200만원 체불로 보험료 체납에 병까지

사장님에게 부당함을 알리고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는 결정적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지난해 2월부터 6월까지 사장님은 근로계약서에 적힌 기본 임금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휴일에 추가로 일했던 임금과 추가노동시간에 대한 임금도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없고, 동생들에게 학비를 전달하느라 건강보험료까지 체납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매일 사장님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해도 사장님은 “도망가면 불법 체류자가 될거니 가고 싶으면 가라”는 식의 말만 반복했습니다. 고된 노동과 스트레스에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습니다. 며칠째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치통이 심해서 사장님께 사정하고 병원에 가서 받은 진단결과는 '급성 충수염'이었습니다. 몸까지 병이 나니 살기 위해선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답이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밀린 임금을 받으려고 수소문하던 중 이주노동자는 건강보험료와 소득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지만, 정작 노동자로서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농어촌(5인 미만 사업장)에선 산재보험 가입이 의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산재보험에 가입됐다면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해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받을 수 있지만, 저 같은 농어촌 이주노동자는 대부분 예외였습니다. 이주노동자를 대변하는 시민단체 도움을 얻어 간신히 노동청에 1년 6개월치 임금인 2,190만원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는 게 이렇게 험난할 줄은 몰랐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 속헹(25)씨가 근무하는 충북 충주 농장의 모습. 이한호 기자

 

건강권·노동권 보호 기대하는 속헹의 꿈

3년 남짓 한국에서 여기저기 치이고 뜯기며 몸과 마음이 닳았지만, 저는 여전히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성실근로자가 되는 걸 목표로 합니다. 일부 이주노동자가 농어촌 사업주에게 인간 대접을 못 받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우리를 기계처럼 취급하진 않습니다. 예전 사장님의 임금체불로 인근 야채농장으로 일터를 옮겼는데, 새로운 사장님은 임금을 제때 지급하고, 아플 때는 자신의 차에 태워 함께 병원에 가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 덕분에 저에게 코리안 드림은 현재진행형 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농장주의 선의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포천의 누온 속헹과 충주 야채농장에서 일하는 심 속헹의 한국 생활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져서야 되겠습니까. 건강권과 노동권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마련돼, 이주노동자들이 눈물 흘리지 않는 농어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본 기사는 심 속헹(25)씨와 동행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