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수정*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92〉세한도, 제주기념관 그림 속 집 모양 재현 (입력 : 2014-04-10)
추사의 운명처럼 떠돌았던 세한도
세한도 또한 몽유도원도만큼이나 유명한 그림이다. 자세히 보면 별다른 구성도 없고 별다른 배경도 없고 사람도 없고 표정도 없이 나무 네 그루 아래 삐뚜름하게 그려진 집이 한 채 있을 뿐이다. 모든 선이 메마르고 강퍅한 선으로 빠르게 그어져 있는데, 인생사의 신산함이 절절이 배어 있다. 그리고 한 귀퉁이에 세한도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좀 무식하게 표현하자면 무척 ‘경제적인’ 그림이다. 그런데도 국보 180호에 조선 문인화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그림이다. 세한도 역시 몽유도원도처럼 본래 그림 폭은 70㎝ 남짓하지만, 그림과 추사가 직접 쓴 발문과 여러 명이 쓴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으로 10m가 넘을 정도로 길어졌다.
추사는 50대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9년에 걸친 긴 유배생활이었다. 게다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았던 그와 접촉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추사의 제자 중에 이상적이라는 중인 출신의 역관이 있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추사를 극진히 모시고, 구하기 힘든 책을 100권이 넘게 중국에서 구해서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이에 추사는 감복하고 그에게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을 한 점 선사한다. 그 그림이 바로 세한도이다.
세한이란 아주 추운 한겨울 날씨를 의미하며, 추사가 자신의 신세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는 1844년, 이름에 걸맞게 스산한 마음의 풍경을 종이에 옮기고 정성들여 구석구석에 의미를 배치했다. 우측 상단에 세한도라고 단정하지만 흐드러지게 예서로 크게 쓰고, 좌측에는 칸을 나누고 정성들인 해서체로 또박또박 그림을 그린 연유를 적어놓았다. 그리고 제목 옆에는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우선(이상적의 호) 보게나”라는 뜻이고, 그 아래 유인(遊印·글이나 그림이 시작하는 부분 아래에 찍는 낙관)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라는 문구가 찍혀 있다.
무척 절절하고 감동적인 스승의 선물이다. 이상적은 무릎 꿇어 감읍하며 그림을 받는다. 그 그림을 들고 청나라로 가서 16명의 문인에게 보여주고 사정을 설명하여 감동받은 문인들의 송시와 찬문 등을 받아 15m에 달하는 두루마리를 완성한다.
세한도의 운명은 몸과 정신이 한 곳에 머물지 못했던 추사의 운명처럼 무척 떠돌아다닌다. 이상적이 이 그림을 그의 제자 김병선에게, 김병선은 아들 김준학에게 물려주는데, 이후 민씨 집안을 거쳐 잠시 행방이 묘연하던 세한도는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청나라의 골동품 가게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 그림을 발견한 사람은 경성대에 재직 중이던 추사 연구가이기도 한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라는 일본인 교수였다. 그는 1926년 서울에 오게 되고 추사를 연구하며 추사의 작품을 찾기 위해 인사동과 베이징의 골동품상을 샅샅이 뒤져 김정희의 유작들을 찾아내고 연구하여 논문을 쓴다. 그리고 1943년 퇴직하며 세한도를 비롯한 다수의 추사작품을 일본의 본가로 가져간다.
일본으로 넘어간 세한도를 다시 우리나라로 가져온 사람은 유명한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었다. 그는 일본에 있는 후지쓰카의 집으로 찾아가 세한도를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의 부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손재형은 끈기 있게 무려 석 달 동안 후지쓰카의 집으로 출퇴근하며 요청이 아닌 통사정을 한다. 이에 감동한 후지쓰카는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보관할 만한 자격이 있다며 돈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돌려주어, 결국 세한도는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손재형은 돌아와 정인보, 이시영, 오세창 등에게 발문을 받고, 후에 받을 발문을 적을 여백까지 만들어 세한도를 완성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세한도를 지키겠노라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뛰어난 서예가이며, 우리의 전통 예술에 대한 안목으로는 당대의 최고라고 일컬어지던 손재형은 갑자기 정치에 뜻을 두게 되고, 그는 모든 재산을 걸고 국회의원 선거에 매달린다. 이때 세한도도 그가 저당 잡힌 재산 목록에 들어간다. 결국 손재형의 낙선과 더불어 세한도 역시 사채업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리저리 떠돌던 세한도를 마지막으로 손에 넣은 사람은 개성 출신의 미술 애호가 손세기라는 사람이었다. 세한도의 길고 긴 여정은 대강 여기에서 정리된다. 손세기는 그의 아들에게 세한도를 물려주었고, 세한도는 지금도 그 집안의 소유로 남아 있다. 그리고 몇 년 전 그것을 국가에 기탁하여 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데, 기탁은 소유권을 넘기는 것이 아니고 보관하는 주체가 보관과 동시에 전시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증과 다르다.
그리고 이틀 후 나의 사무실로 점잖은 신사가 한 분 찾아왔다. 그는 마침 새로 이사할 집을 고쳐야 하는데, 우연하게도 출장길에 비행기를 놓치고 여유가 생겨 서점에 들렀다가 내가 쓴 책을 읽고서, 설계를 의뢰하러 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던 이야기 말미에 그 집은 세한도 진품이 보관되었던 곳이라는 말을 했다. 나른한 오후의 공기로 멍해져 있던 나의 정신에 불이 번쩍 켜졌다. 마치 내가 그린 그림 속에서 폄하당했던 추사가 나에게 따지기 위해 이 일을 획책한 것은 아닐까 하는 과대망상이 흘러갔다.
추사의 흔적은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옆에 추사의 무덤이 있는 예산의 추사고택이나 그가 죽기 전 4년을 보낸 과천에서 만날 수 있다. 2013년 개관한 과천 주암동의 추사박물관에는 고맙게도 세한도를 돌려주었던 후지쓰카 지카시의 아들 아키나오가 과천시에 기증한 추사의 친필 간찰 및 청대 학자들의 서화류를 비롯한 1만여 점이 넘는 관련 유물이 있고, 특히 추사가 죽기 3일 전 쓴 봉은사 장경각의 ‘판전’ 현판도 복각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제주에 있는 추사기념관 또한 추사가 그의 서체를 완성한 장소이자 세한도를 그린 곳이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 추사의 유배지였던 대정읍에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로 2010년 다시 지어진 제주 추사기념관은 세한도의 집 모양을 그대로 빌려와 고졸하게 지은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다. 주변의 풍광에 고요히 묻히며 길게 엎드린 채 둥그런 창 하나만 달린 건물은, 지하 1층으로 들어가 전시를 보고 1층으로 올라와 화가 임옥상이 만든 추사 동상을 보고 나오는 간결한 동선을 지녔다. 나도 얼마 전 이곳에 들렀다가 실물 크기의 세한도 사본을 구했다. 물론 그림과 추사의 발문만 있는 것이다.
계사년(2013년) 여름 어느 저녁, 문득 추사가 그린 세한도를 따라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뭉툭한 붓과 탁한 먹으로 아주 거칠게 세한도를 따라 그리고는, 여백에 가득 세한도에 대한 세간의 과잉반응에 대한 불평들을 빽빽하게 적어 넣었다.
“이 그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것인가, 그리고 추사라는 인간이 실은 얼마나 깊이가 없는가…” 그런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수십년 동안 세한도가 잠겨 있던 집의 빗장이 풀리고, 그것을 지키던 이가 그것을 떠나보내고, 집은 그 신사에게 맡겼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치 세한도를 위해 지어졌던 집이 그림을 떠나보낸 허전함을 나에게 메워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았다.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연의 사슬이 세상을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라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세한도 대신, 설계를 맡게 된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보잘것없지만 다시 그린 세한도 한 장을 그려 그 집에 보내주고, 이 일의 전말을 기록했다.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낱 차가운 겨울이 돼서도 시들지 않는 곧은 지조와 굳은 절개뿐 아니라, 차가운 겨울이라는 계절에 또한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김정희, ‘세한도’ 발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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