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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당/여행 이야기

나이아가라 폴스 기행-1995

by 바람거사 2022. 6. 6.

                                                          

[캐나다 측에서 본 폭포 전경]

              

1995년 7월 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만규가 시험장비에 대한 기술 보충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여름 방학 중에 잠시 미네소타주에 올 계획이 있다고 전해왔다. 그 장비 제조업체는 국내 오퍼상의 부탁으로 싫든 좋든 앞으로의 영업적인 차원에서, 4박 5일 일정을 잡아줬는데, 비행기표는 서울-LA 왕복 이코노미 석에다, 국내선으로는 LA에서 미네소타까지 가는데 몇 군데를 기착하는 최저 염가 표에, ‘홀리데이 인’ 정도의 숙소를 예약해준 모양이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지도 못하는 데다, 초행길에 공항에서 예약된 렌터카를 찾아서, 대략 세 시간을 운전하여 그 회사로 찾아오라는 홀대이었지만, 마음은 몹시 들떠 있었다. 그곳 일을 끝내고, 이왕 온 김에 나를 만나서 사는 꼴도 좀 보고, 뵌 지가 제법 오래된 부모님께도 인사라도 하고 싶다고 하여 시카고를 들리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시카고 하면은 그 유명한 마피아의 두목이었던 알 카포네의 도시가 아니냐면서, 그게 옛날 일이지만, 지금도 분위기가 좀 험하지 않으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오면, 총구멍이 송송 뚫린 차들이 많이 다닌다고 엄포를 놨다. 사실 지금도 심각한 건 사실이다. 갱단의 숫자가 엄청 늘었고, 잘못 길을 들어서 그들의 각축장에 들어섰다간 자동차에 구멍이 나는 건 물론, 머리에도 구멍이 날 일이다. ‘드라이브 바이 슈팅’이라는 말은 차 타고 가면서 쏜다는 얘기인데, 마피아가 나오는 영화에서 보듯 옛날에는 다발이 붙은 기관총으로 무차별하게 쏘아 댔고, 지금은 자동권총으로 몇 발 쏘고 튄다고 할까? 그렇지만 그가 살고 있는 동네는 한참 북쪽 교외로 올라와 있으니 걱정 놓으라 했다. 그 친구는 LA로 출발하기 전까지 일주일을 잡아 놨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낼 터이니 걱정 말라고 하였고, 한 달 후 그의 첫 미국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대학 일 학년 때 나는 여름방학 전까지 입주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외지도를 끝내고 나면, 저녁 9시가 넘어갔고, 더욱이 기말시험기간이 비슷해서 몸과 맘의 여유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시험공부하면서 잠깐 쉬는 동안, 본관 앞에 있는 보랏빛 덩이 꽃이 포도송이같이 늘어지는 등나무를 올린 쉼터에서 잘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서로 뜻이 통하는 얘기를 나눈 후부터 더욱 친하게 되어, 가끔 상경하는 그 친구 형한테 갈 때도, 비가 오는 날 오후 마포 변두리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지금은 쓰레기 매립으로 난지도가 돼버렸지만, 갈대가 무성한 한강둔치까지 걸으면서 지금까지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에서 비약된 개떡 같은 인생론을 피력하면서 어지간히 묻어 다녔다. 그는 부모님에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대학을 갈 무렵에도 입학금이나 수험료, 용돈 등은, 속초에서 명태나 오징어를 떼어다가 서울 동대문시장에 넘기는 중간 상인의 일을 하는 형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 형을 만나러 같이 갔을 땐, 시장바닥을 한참을 이리저리 같이 돌아다니고 또 일이 다 끝나길 기다렸던 덕으로, 그 형은 중국집에서 짜장면보다 급수가 좀 높은 탕수육 같은 요리도 시켜 줘 모처럼 포식도 했었고, 근처 전파상에 가서 이어폰이 딸린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사줄 땐, 형이 없는 나에겐 부럽기도 하였다. 그 무렵에도 이 친구의 부친이 아직 살아 계셨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생활은 무척 어려워서 그는 오직 열심히 공부하는 길이 살길이라 생각하고, 중고등학교 때는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중학생 과외지도까지 하면서 독하게 살았다. 그래서인지 공부 욕심은 물론, 하고자 하는 일에 과욕이 따르는 것 같았고, 독설을 자주 하여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동창들도 있었지만, 소기의 목적을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투지도 있고, 의리를 항시 내세우면서, 고향이 전라도인 나를 만나기 전에는 전라도 사람들은 의리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하고 있었다. 그는 신입생 환영 막걸리 회식 때, 고향이 감자바위라고 소개하면서, 특유한 노래를 불러댄 후, 매번 회식 때는 18번으로 우대를 받았다.

 

친구나 연인의 조건이 아마 성격이 상이해도, 어떤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야 되지 않나 생각할 때, 무슨 일이든지 의기투합만 하면 바닥이 보일 때까지 끝내버린다든지, 술과 노래 부르기 따위를 억세게 좋아하는 따위 말이다. 그는 노력도 않으면서, 운 좋게 좋은 결과를 바라는 걸 제일 싫어하였고 게다가 독설까지 퍼부어서, 뜻이 맞지 않는 친구들과는 잘 사귀려 하지 안 했다. 반면 나는 포괄적이면서도, 사리에 밝은 처사를 우선했고, 철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친구는 나의 그런 면을 좋아했다. 그래서 대학 4년, 공군 장교 4년 반하고 사회생활 2년을 넘기면서 10년 지기가 되었었는데, 내가 이민을 떠나간 후로 10년이 지나는 동안 간혹 편지나 전화가 오가는 정도의 맥은 있었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세월이 훌쩍 흘러 가버렸다. 나는 11년 만에 첫 모국 방문 때, 그 친구가 공항에서 한 첫마디는,

“야, 이렇게 만나면, 정말 살아서 몇 번이나 만나겠냐?”

하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세월의 흐름은 지나고 봐야,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모든 걸 변하게 만들었나를 뒤늦게 알게 된다. 나도 풍운의 꿈을 안고 이역만리로 떠나왔지만, 별 뾰족한 성과도 없이 오랫동안 직장과 아파트, 대학원을 잇는 삼각지 대만을 돌고 또 돌면서 지냈다.

 

시카고는 산 같은 산 하나 없는 펀펀한 중부에 위치하여 동서부 관광을 하려면, 경비가 좀 들어도 비행기로 근처 대도시까지 날라 가서 렌터카로 돌아다닐 일정을 잡아야 구경다운 구경이 가능하고, 처음부터 자동차로 간다면, 열댓 시간 이상의 운전을 해야 하는 생고생을 자처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런대로 볼거리가 있는 위스콘신주에 있는 빙하로 깎여진 강가며 계곡이 있는 ‘위스콘신 델’을 1박 2일로 다녀와서 시카고 시내 관광으로 이틀을 보낸다 해도, 나머지 며칠 동안은 밤낮으로 얘기나 하면서 술만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고민을 잠자코 듣던 집사람이 얘길 꺼냈다.

“오시기 힘든 발걸음인데, 그렇게 해서 되겠어요? 다른 데는 몰라도, 시카고에 오시면 나이아가라 폭포는 다녀오셔야지요!”

“야, 벌써 8년이나 되었네. 그때 그 중고 중형차에 부모님, 애들 둘 그리고 한국에서 출장 온 동생에 나까지 6명이 고생을 바가지로 했지.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난다. 그래도 도중에 말썽 안 부린 건 천만다행이었지만 말이야.”

“노동절 휴무 때인데, 미리 호텔 예약을 안 해서 생고생했죠 뭐.”

“혼자서 16시간을 운전한 데다 서너 시간 동안 잠자리를 못 찾고 또 헤매는 바람에 아주 힘들었지. 동생이 국제면허라도 미리 준비했으면 좋았지만, 그러지도 못했고. 이젠, 캐나다 입국은 무비자라 신경 쓸 일이 아니고, 차도 4년밖에 안된 캐딜락인데, 잘 나가겠지. 어디 한 번 또 가봐? 이번이 세 번짼데, 눈에 훤하다. 그래, 그 정도는 다녀와야 되겠지?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말이야!" 

 

만규가 7월 15일 토요일 오후 예정대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을 했다. 저녁때는 모두같이 어머니 집에서 모여서 바비큐 파티를 하면서, 모처럼의 해후를 즐겼는데, 마침 그 친구가 중매하여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내 여동생을 김포에서 만난 지 16년 만에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리 본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날 그는 2박 3일 일정으로 나이아가라를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서, 미국에 오면 꼭 가고 싶은 데가 그 폭포와 그랜드 캐넌이라는 얘기를 하며 몹시 설레었다. 그러나 막상 와서, 연로한 아버지와 8년 전 교통사고로 거동이 부실하게 된 어머니 뒷바라지에, 개인 설계일로 바쁜 나의 생활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어찌할 바 몰라했다.. 나는 그래도 할 만하니까 일주일을 잡아 놓은 거니 괜찮다고 하였다 출발하기 전 골프 연습장에서 이 친구한테도 핸들을 맡길지도 모르는 상황이 생길지 몰라서 내차를 한 번 운전해보도록 했다.

“차가 너무 크고, 길눈도 어두워서 난 안 되겠다. 이거, 객지에서 사고라도 나면, 큰일 아니냐?”

그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지레 발뺌을 하는 바람에 서로 웃고 말았다.

 

7월 18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집사람이 준비해준 쌀과 소고기를 넣어서 볶은고추장이며, 구운 김과 멸치볶음, 단무지도 각기 봉지에 넣고, 소형 전기밥솥도 챙겼다. 여기서 오래 산 사람들이야, 햄버거나 핫도그로 하루 식사를 모두 때울 수 있지만, 이 친구로 봐서는 저녁식사라도 한식을 해야 할 거 같았다. 그리고 집사람이 말아준 김밥을 중간에 쉴 때 요기를 하기로 하고, 6시에 출발했다. 새벽을 가르며, 둘은 집에서 곧바로 5분이면 빠지는 I-294번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안개가 좀 끼어서 장정에 오르는 맘 자세가 설레기보다 차분하게 만들었다. 사실 590마일은 적은 거리는 아녔다. 남북의 총길이가 대략 690마일이고, 서울 부산 거리가 대략 280마일이니 두 배가 넘는다. 이번 나들이 때는 ‘리처드 클라이드만’의 부담 없이 들을만한 추억의 피아노곡과, 영화음악, 컨트리 송, 토로토풍의 한국 가요 테이프를 몇 개 더 가지고 갔다. 노면의 굴곡을 경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미국의 산야를 바라보며 ‘랜디 트라비스’의 서정적인 노래나 ‘달리 파튼’의 간드러진 노래가 잘 어울리지만, 템포가 좀 빠른 한국 정서가 듬뿍 베인 김연자의 트로트풍의 메들리 모음도 제격이었다. 고향의 산야를 털털거리며 달리는 시외버스에서 흐르는 구슬픈 가락을 떠 올려 봤다.

 

출발 후 2시간 반 만에 미시간주의 ‘칼라마주’에 도착해서 그 옛날과 마찬가지로 같은 휴게소엘 들렀다. 일정을 맞추려면, 화장실 들르고, 기지개도 켜고, 김밥 먹는 걸 10분 내로 끝내야 했다. 항상 대장정이 있을 때마다, 시간과 거리를 계산해본 경험이 있어서, 고속도로 순찰대의 출현이 가능한 주변 지형지물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당 7, 80 마일씩 달려도, 쉬고 먹고 하는 시간을 다 쳐서, 시간당 60마일로 계산하면, 대략 예정한 시간에 들어맞았다. 그렇게 따져서 오후 5시 정도 도착을 예상하고 달렸다. 오후 12시 무렵에 휴게소엘 들려서 햄버거를 시켜 먹는데, 이 친구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듯했다. 배가 고프면, 더 피곤할 것이니 억지라도 구겨 넣라고 얘기했더니, 대학시절에도 내가 그렇게 얘기를 했다는 말을 했다. 입맛과 소화는 달라서 억지라도 먹어야 기운이 안 떨어진다는 얘기였다.

 

5시간 후에 드디어 ‘나이아가라폴스’라는 타운에 들어와서도 이리저리 찾아 돌아다니다가 언덕바지에 있는 예약된 호텔을 찾았다. 그래도 하루 저녁에 근 100불 가깝게 냈는데, 미국 내의 ‘홀리데이 인’에 비하면, 누추하기 짝이 없는데도 유원지라서 그런지 몰라도 상당히 비싼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깔끔한 호텔에서 냄새가 짙은 반찬을 꺼내놓고 밥을 지워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곳에서 밥을 지어먹고 고리 한 음식 냄새를 피워야 하는 그들한테는 부담감이 덜 했다. 점심식사로 햄버거를 먹는 둥 마는 당한 그는 몹시 시장한 듯했다. 나는 서둘러서 쌀을 씻고 밥솥에 전원을 꽂고서, 밥이 되는 20여 분 동안 잠시 폭포를 보러 나왔다. 숙소는 폭포에서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계곡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급류 되어 흐르는 계곡은 호텔에서 한 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전에 두 번 왔을 때도 미국 쪽에서만 있었기에 이쪽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좀 색 다른 면이 있었지만, 배를 타고 폭포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올려다보는 장관을 경험했기에 그 감명은 사실 덜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위용에 넋을 잃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여간한 일에도 흥분이 될 만큼 감명을 받기가 쉽지가 않은데, 그는 그냥 ‘야―!’ 소리만을 내며 입을 벌린 채 고개만을 좌우로 젓고 있었다. 평생의 염원 중의 하나가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한 반 시간 동안 걸어가야만 폭포 바로 옆으로 갈 수 있었는데, 거길 다녀오면, 한 시간 이상이 걸릴 것 같아서 우선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나오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뜸이 잘 들어가는지 구수한 밤 냄새가 기막히게 후각을 자극하였다. 점심으로 별로 든 게 없었던 그는 눈을 크게 뜨면서 감탄하였다.

“야! 이 밥 냄새가 정말로 죽여주는구나. 세상에 이렇게 구수하게 느끼기는 첨이다.”

서로 편할 대로, 살아온 이곳 생활이라 나도 밥물 맞추는 데는 도가 터 있었다. 반찬 뚜껑을 다 열어젖히니, 단무지의 고린 냄새가 코를 자극하여 잠시 실룩거려 봤지만, 금방 후각은 둔해지고, 방문이나 단단히 닫고 우선 먹고 보자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먹어댔다.

“이렇게 맛있게 밥 먹는 것도 얼마만이지 모르겠다. 옛날 기본 군사훈련받을 때 생각이 나는구나. 한데, 한국에서야 10시간 운전을 스트레이트로 할 기회도 없지만, 네 스태미나도 끝내주는구나. 난, 이제 못할 것 같다. 옛날 대학 때 마라톤 할 때 알지? 야, 그땐 오기로 독하게 뛰었는데 말이다.”

“뭘, 여기서는 장거리 뛰었다 하면, 10시간 이상이지 뭐. 너도 봤지만 이놈의 땅덩이가 얼마나 크냐. 한국에서야, 밀리지 않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5시간이면 주파할걸? 전에 시카고에서 캔자스주의 ‘위치타’에 가는데 14시간 운전도 했고, 여기 우리 부모님하고 미국 측으로 왔을 땐, 다 와서 호텔방 찾느라 헤맨 거까지 20시간도 넘게 했는데. 그땐 졸리고 지쳐서 나도 모르게 눈도 감겨 정말 혼이 났었지.”

그 소릴 듣고 만규는 기가 막혀서 떨떠름하게 웃었다. 8시 반쯤 밖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수많은 관광객의 물결이며, 폭포에 색색으로 비치는 대형 스포트라이트가 긴 궤적을 그리고 있는 길거리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어원이 인디언 말인 ‘나이아가라’는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며 흘러내리는 물이라는 데, 그 굉음은 가슴을 떨리게 하고, 하늘 높이 치솟는 분무와 더불어 거대한 파노라마는 그곳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의 넋을 앗아서 돌부처로 만들고도 남았다. 밤이 깊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폭포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의 난간을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사 가지고 왔는데, 생각했던 만큼 신나게 마시질 못했다. 두병을 나눠 마셨지만, 나른한 졸음이 노도같이 밀려왔다.

 

7월 19일 아침이 되었다. 아침을 간단히 하고, 본격적인 관광을 나섰다. 그는 이런 곳을 혼자 온 것이 무척 아쉬운 듯, 남편과 애들 뒷바라지에 어디 구경 한 번도 제대로 못한 집사람이 생각난다고 했다. 이번에는 사진 구경이라도 해줄 요령으로 이곳저곳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많이 찍어댔다. 나는 비디오카메라로 작품을 만들 듯이, 연출까지 하면서 찍었다. 저쪽 폭포를 바라보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깔끔한 가로수와 돌계단이며 제라늄이 만발한 화단 길을 스쳐 오도록 하면서 ‘레디-고우’를 소리 없는 손 신호로 약속을 하면서 연속극의 한 장면을 찍듯이 찍었다.

“근데, 될 수 있으면 내 뒷모습은 찍지 마라. 이거 머리숱이 없어져, 정수리가 훤히 내보여서.”

김 교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대학에 다닐 때도 머리숱이 별로 없더니만, 이제는 절대량이 부족하게 되고 말았다는 불평을 하소연했다. “알았다. 알았어!”하면서 제법 조심을 했는데도 나중에 집에 와서 정리하면서 보니, 몇 차례 피치 못하게 찍히고 말았다.

 

계곡 옆에 나있는 차도를 따라 내륙 쪽으로 들어가면서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 극장에서, ‘아이맥스’라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보는 폭포의 내력과 장엄한 분위기는 실제보다 거창하게 보였다. 해가 들락날락하고, 거대한 호숫가라서 그런지 온도는 아주 쾌적하여, 걸어 다니기에는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전망대를 올라가서 전면에서 보는 말굽형의 폭포와 그 왼편에 있는 규모가 조금 작은 폭포를 한눈에 내려다보니, 물보라에 떠오르는 무지개가 계곡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의 ‘Goat Island’의 거의 끝부분 우측 호숫가에서 어머니가 사고 나기 두어 달 전인, 성한 모습으로 고전무용을 하시던 모습을 그려보면서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당시의 일만 생각하면, 미안스러운 맘이 매번 앞섰다.

 

사실 그때 그 여행을 하게 된 데는 어머니의 바람이 제일 큰 요인이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어머니는 고전무용으로 아르바이트까지 하여 가끔 사 남매한테 책값이나 용돈을 주시기도 했다. 이민 온 후 바쁘게 일을 하는 중에도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어느 무용선생한테 가르침도 받았고 또 공연도 하고,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서 춤 공양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공연장마다 따라다니면서 비디오를 열심히 찍었다.

 

어느 날, 부친의 한 지인이 옛날에 모 일간지 사진기자를 하였다는데, 그 양반이 어머니한테 보여준 학인지 갈매기인지 모르지만, 흰 새들이 나르는 나이아가라 폭포 사진을 보신 후, 그 폭포를 배경으로 선녀 복장을 하고 학과 더불어 춤을 추는 작품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셨나 본데, 아마도 학들이 유유히 날고 조용한 분위기의 ‘천지연’이나 ‘박연 폭포’ 같은 한국적인 풍경을 생각하셨나 보다. 그러나 그 후로는 구체적인 말씀은 하지 않았고, 그곳에 도착할 무렵에 녹음기가 있어야 된다는 말씀을 뒤늦게 하여, 시내에 다시 들러서 구입도 했고, 주차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이것저것 소도구를 끄집어내셨다. 선녀 의상을 꺼내어 입고 무대화장에 긴 머리 타래도 붙이고, 준비를 단단히 하셨다. 막상 그 걸 실행하는 데 있어 처음 우리 형제는 창피하다는 이유 때문에 난색을 표했다가, 어머니는 실망이 대단하여,

“너희들 창피한 것이 이 어미의 바람보다 더 중요하구나.”

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뜻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자, 형제는 바로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저 밑에 보이는 그 섬을 한참 동안 헤맨 끝에 적절한 곳을 물색하였다. 폭포의 굉음이 아늑하게 들려오고, 가끔 하늘로 높이 치솟는 물보라가 수증기같이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지만, 어머닌 가끔 굉음에 카세트의 춤곡이 파묻히는데도 하늘에서 갓 내려온 선녀가 긴 머리 타래를 느린 채, 눈이 부시게 흰옷을 걸치고, 부채를 휘저으며, 신선무를 추셨다. 난데없이 평소에 듣지도 못한 악기 소리가 나면서, 생전 보지도 못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러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갑작스러운 해프닝에 그들도 사진을 마구 찍고, 일부는 비디오도 찍어댔다. 그 후로 일 년 후에 사지마비가 되는 엄청난 사고를 당하셨다. 그리고 나는 아주 가끔 그 테이프를 볼 때마다 몹시 격해지면서 꺽꺽거리다가,

“언제 나아서 저렇게 춤을 다시 추실 수 있을는지. 아마도, 아마도 이제 모든 게 그리 될 거 같지 않을 거 같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되는 거야?”

퍽 쏟아지는 눈물을 질끈 훔치며, 창밖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길게 몰아쉬곤 했었다.

어머니는 종종 포기에 가까운 얘기를 하셨다.

“나으려면, 진즉 나았지. 자그마치 8년이다. 8년―.

그리고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셨다. 아마도 내가 사람의 한평생에 대해서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견해를 갖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고통에 일그러진 어머니의 얼굴을 매일 맞대고, 네발 달린 보행기로 질질 끌다시피 걸어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보아온 탓이 아녔을까?

 

밖에 나와 있어서 점심은 별수 없이 간단하게 햄버거로 때웠다. 이곳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배 타고, 폭포 아래까지 근접하는 유람을 하러 선착장에 내려갔다. 소낙비같이 쏟아지는 물보라 때문에 우비를 나눠주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여 땀이 쉬고 절여진 그 고린내는 불결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행으로 일회용을 나눠주었고 기념으로 가져가기도 하도록 하였다. 거센 파도에 배가 앞뒤로 쿨렁거리며 서행을 하면서 폭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안개는 이제 소낙비가 되어서 온몸에 쏟아 부치고 있었다. 높이 50여 미터에 폭이 근 800여 미터나 되는 폭포의 끝은 물안개로 잘 보이지 않고, 세찬 비바람과 배의 요동, 그 굉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흥분의 도가니에서 아우성을 쳤다. 사진을 찍으려 해도, 그곳에서는 불가능했고, 좀 아래로 내려와서 너 댓 장 찍어 줬다. 하선을 하고 길옆 공원으로 걸어 나와 긴 벤치에 기대앉았다. 아직도 그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이 친구는 집사람을 데리고 언제가 될 줄 모르지만, 다시 오고 싶다고 또 다짐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들이 제각기 인걸 보니, 세계 각처에서 모여들었나 보다. 유럽인을 위시해서 일본, 중국인들이 많았고, 가끔 한인들의 행렬도 보였다. 그리고 어느 한인 교회에서 단체로 왔는지 가이드가 앞서서 교회 이름이 쓰인 깃대를 들고 가는 걸 만규는 물끄러미 보면서 나에게 물었다.

“아직도 교회는 나가지 않냐?”

“글쎄다. 아직은. 아니지. 아직이 아니라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나갈 필요가 없는 게지.”

“지난번 우리 어머니가 혈압으로 쓸어지셨을 때, 형하고 누나는 무척 망설이더라고.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얼마가 들어가도 수술을 해야 되지 않느냐 따졌지. 그리고 결국 내가 모든 경비를 마련하여 수술비로 내고, 지성으로 기도를 했다. 수술을 했어도, 완전 회복이 힘들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의사들도 거의 완치가 된 걸 보고, 놀랐지. 지금은 개척교회 목사가 된 동생이 모시고 영주에 계신다. 난 말이다, 이제는 확실하게 기도의 힘을 믿게 되었고, 은혜라는 것도 믿는다. 야, 너도 되지도 않는 개똥철학에 지금까지 연연치 말고 빨리 구원을 찾아라.”

“난 그래, 요사이는 다른 종교는 물론이고 더욱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처사인 가를 생각한다. 이 세계에는 4대 종교는 물론이고, 비문명권에 있는 원시종교 까질 포함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아마존이나 보르네오 등의 오지에 있는 사람들이나, 가까이는 이곳 아메리칸 인디언들도 수 천년 동안 내려온 나름대로 어떤 종교의식에 젖어 살아오지 않았냐? 기독교 측에서 보면, 구원을 못 받은 불쌍한 영혼들이라고 가엽게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네들 나름대로 그렇게 살아왔지. 기독교는 사랑을 운운하면서 그 배타적인 정신은 알아줘야 해. 십자군의 원정이나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에서나, 아메리칸 인디언에게도, 중남미에서도 총칼로 일단 짓밟고, 그다음 선교사들의 행렬이 이어졌지. 그리고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문명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포교가 따라붙었어. 불쌍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미명 아래서 말이다. 얘기하면, 길어지고, 끝도 없는 얘기이니 길게 얘기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다, 자기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에서 믿고 사는 일이 아니냐?”

“야, 그동안 연구 많이 했구나. 하지만,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너 만큼 생각이 안 들어서 기독교를 믿겠니?”

“안다. 내가 뭐, 니체나, 릴케같이 ‘신은 죽었다’라고 하든지 ‘나는 그렇게 단순치 못하여 한 종교에 나를 맡길 수는 없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기독교에 귀의치 않는 것도 아니지. 한 풀 꺾고 편하게 받아주는 것이 종이 한 장 차이 아니냐? 한데, 근본적인 문제지만, 어쩜 유대인들의 존폐가 따른 각박한 땅에서 당하기만 하며 살았던 고대사를 미화하고 신격화하여 뿌리가 있는 민족이라고 꾸며 놓은 구약부터 기만을 당하는 느낌을 떨치기가 힘들다. 구약의 허구성 여부에 대해서 지난번 타임지에도 크게 났었지. 역사적인 기록과 상이한 점이 많다고 말이야. 공학을 평생 했다는 너도 그렇지만, 다 과학 무지에다 역사 무지의 소치다. 지난 2,000년 동안 우려먹었으면 충분치 않냐?”

“그건 사악한 맘을 가진 자들의 모략이다. 나는 누가 뭐라도 기도의 힘을 더욱 믿게 되었다.”

“너의 간절한 기도가 꼭 선의로 이뤄졌다 하여, 그 절대자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전장에 자식들을 보낸 부모들이 누구는 그 간절한 기도에 대한 주의 보답이 있어서 살아 돌아오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여 죽어 돌아오겠냐? 결국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도 오열하던 끝에 모두 주의 뜻으로 포기하며 받아줄 텐데. 그렇게 생각할 바엔 운명론자나 뭐 다를 게 있어? 어차피 모든 결정은 우리 자신이 하는 거고, 아전인수 격으로 결정을 해야 그래도 맘이라도 편치 않겠냐?”

“그래도, 시련을 주는 사탄의 유혹이라 생각하고 유일신 하느님을 믿을 뿐이다.”

“다행이지 뭐. 이 나이에 흔들리면 되겠어? 중생들 모두가 세칭 개똥철학을 운운하며 무종교인으로 자기 멋대로 산다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이 오겠지. 고명한 철학자라도 한 죄인의 영혼을 구하지 못 하는데, 일개 무명의 종교인은 그를 독실한 믿음으로 회계시켜 갱생을 하게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독실한 믿음으로 무장하여 선행과 이웃 사랑을 운운하고, 모든 인간사의 고통을 감내하며 천국에서의 영생을 바라보며 구원을 믿고 사는 것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부모들은 수시로 강도를 당하는 동네에서 목숨 걸고 장사하여 자식들 키워 놨더니, 자식들은 자기만의 신앙을 위해 선교사업이네 봉사활동이네 하면서, 아프리카나 동남아, 아마존 오지에 떠나가더라. 그동안 열심히 키워준 부모를 위해 얼마 동안이라도 봉사 좀 하면 안 되나? 모처럼 쉬는 날 자기네도 할 일이 많고, 교회일도 봐야 하니 시간이 없다 하여, 저녁나절 잠깐 얼굴만 내 보이고 변명만 늘어놓고 가버린다. 늙고 병들은 부모를 위해 좀 더 많은 봉사를 하면, 은혜를 못 받는 거냐? 나의 영혼을 위해서 교회엔 그렇게 헌신하면서, 산다는 게 사투인 병들고, 늙은 부모들을 위해서 하루라도 더 같이 지내는 것이 인간 된 도리가 아니겠니?”

내친김에 다시는 종교문제로 옥신각신 하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기회에 단단히 내 나름의 소견을 더 피력하고 싶었지만, 할 얘기는 다 한 듯싶었다. 그래서 아까 하다 말았던 얘기로 말을 바꿨다.

“네 형님이나 누님도, 이해를 할 수 있는 네가 이해를 해주고, 먼저 찾아가 뵈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 생활이 어려우니 망설였겠지. 어디 살 만큼 산 노인네라고 접어 뒀겠니? 이해도 젊은 사람이 더 잘한다더라. 나이가 들면, 괜스레 서럽고 옹졸해지는 거 아니냐? 네가 표를 내기 위해 어머니를 살려낸 건 아녔잖아? 소설이나 영화 속의 주인공은 좋은 일을 하면, 관객들이 그럴 보고 감동을 하지만, 이 넓은 세상을 무대로 사는 우리네는 그 누가 알아주기 위해서 그리 하겠냐? 때로 내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생전에 부모님을 위한답시고, 주변에서만 머무적거려도, 잔병이나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씀을 수시로 하며, 때로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시지. 우리나외는 온갖 화살을 그렇게 다 맞고 지낸다. 어떨 땐, 내 자신이 한없이 위축되고, 보잘것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 “아이고, 염병할! 개떡 같은 인생이다!”하면서 울부짖은 때도 있다. 오기가 나서 며칠 동안 전화 연락도 안 해봤지만, 걱정스러운 맘이 금방 살아나고, 또 막상 당하면, 하루 밤을 지내는 병시중을 하는데도, 감정이 앞서 서로 상처를 주는 얘기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니 말이야. 참고 또 참아도 쉽지가 않더라. 누가 날 알아주지 않아도, 그 누가 보고 있는 것같이 행동하려 하지만 그게 쉬운 노릇이 아니지. 훗날 불성실했던 나 자신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하려고 하는 거야. 주변에서는 속도 모르고, 대단한 효자효부다고 하지만 비 시계 웃고 말지.”

그런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줄곧 썬 글라스를 끼고 있었기에, 맘이 시큰하며 눈시울에 순간 뜨거운 눈물이 핑 돌아 버린 걸 그 친구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저 킁- 하고 목을 가라앉히고, 쓴웃음을 지으며 미국 측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연필 주는 예배당에 몰려다녔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가끔 따라간 산사에서 접해본 불교, 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교적인 도덕 관등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살아와서, 어느 순수 종교에 귀의하기는 힘이 든다는 생각을 했는데, 왜, 일부 민초들이 조선시대 때부터 유독 기독교에 몰입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을 해봤냐?”

“글쎄, 기독교가 흥한 서구 여러 나라들같이 축복받고 더 잘 살게 되는 거 아니겠니?”

“조선시대 반상의 제도에서 오는 억압된 계층들한테, 양반이나 상놈이 천주 앞에서는 다 똑같이 은총을 받는다는 설교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믿음이 전파되었지. 현실적으로 희망이 없고, 후손들한테도 역시 희망이 없는 처지에서, 큰 공감을 준 건 사실이었을 게야. 제정 러시아에 반기를 든 볼셰비즘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겠고. 예나 지금이나 배가 부르면 종교를 찾는 경향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 한국은 무종교인이 반이라 쳐도 미국이나 서구에서는 심각하게 줄어들고 있지. 일본도 우리나라같이 약 300년 전 기독교의 거센 파도가 조금 일다 말았지만, 결국 시들어지고 말았어. 일본에서는 초파일이나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냐? 특정 종교가 한 나라의 근간이 되는 곳도 있지만, 여러 분야에 전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얘기를 할 순 없다.”

얼마 동안이나 거기에 앉아 있었는지 엉덩이가 저려왔다. 결국 둘은 ‘내가 너를 무신론자로 만들려 하지 않을 테니까, 너도 날 기독교인으로 만들 생각은 하지 마라.’라는 피장파장의 결론을 보고 말았다.

 

늦은 오후가 되어 공원을 나서서 유락시설이 있는 시내로 들어왔다. 유명 관광지가 되다 보니 극도로 상업화가 잘 되어있지만, 그래도 유원지는 북적거려야 제 기분이 났다. 내일이면 또 장도에 올라야 한다는 부담감이 간간히 들어도, 그런 걱정은 우선은 접어두고 오늘 저녁이 이곳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들렸지만, 아쉬움도 커갔다. 그들이 떠나가도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붐비고, 또 감격할 것인데-.

 

그날 저녁에도 생각했던 만큼 맥주를 많이 마시지 못했다. 어제는 오늘의 관광을 위하여, 오늘 저녁에는 내일의 장도가 부담이 된듯했다. 그래도 역사적인 ‘나이아가라폴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해서 서너 병은 마셨다. 취기가 좀 오른 김 교수는 눈물이 글썽한 채로, 귀국하면 술 한 병 사들고, 이제 나이 들어가는 형님을 꼭 찾아 뵐 것을 다짐했다.

 

7월 20일 아침에 호텔 경비를 정산하고 5시 30분에 출발을 하여, 곧 ‘퀸 엘리자베스 웨이’에 들어서서 이제 우측으로 비구름이 낮게 끼여 있는 ‘온테리오’ 호수를 끼고 북서쪽으로 달렸다. 이른 아침이라 생각했더니, 구름 탓인 듯 어두웠고 빗방울도 제법 날려 윈드실드 와이퍼를 시간차로 맞춰 놨다. 마침 틀어 놓은 음악이 ‘지붕 위의 바이올린’ 중에서 ‘해는 뜨고, 지고’의 가냘픈 바이올린의 선율이 그 분위기에 걸맞아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했다. 수년 전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새벽에 빠져나오면서 느끼는 분위기와 흡사했다. 왠지 이런 날엔 서정적인 음악이 기분을 암울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기분이 더욱 좋았다. 그런 감상적인 분위가 잡힐 때마다, 어찌 됐건 작아도 놓친 고기가 아쉽듯이, 날 이해해 주지 못하고, 훌훌 떠나 버린 여인네를 그리워하며 안개 낀 산상에서 울부짖던 추억이 생뚱하게 생각나서 씩 웃어 봤다.

 

오후 2시 30분쯤 비가 좀 약해졌는데, 조금 있으면, ‘미시간’ 호수 옆에 있는 ‘워렌 듄’을 지나칠 거 같아, 잠시 들리고 싶어서 빠져나왔다. 파도치는 호숫가는 역시 바다와 같이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저쪽 수평선 너머에 시카고가 있다. 호숫가 쪽으로 향한 긴 건물이 있고, 넓은 주차장이 끝나는 곳과 연결된 높은 모래산이 우뚝 서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지만, 비가 오는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없어서 파장된 느낌였고 손을 잡고 모래밭을 걷는 연인들이며, 애들 몇 명이서 물장난 치는 모습이 쓸쓸할 정도로 한가해 보였다. 이 친구는 우산을 받고 저 만치서 서서 호수와 모래산을 바라보면서 뭔 가를 생각하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물가에 가서 손을 적시고, 몸을 일으키는데, 비에 젖은 40대 초반쯤의 한 백인 여자가 사진기 샤터를 눌러 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녀의 머리는 푹 젖어 있었고, 가슴과 허벅지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도록 옷이 제법 젖은 듯했는데, 내가 그녀의 싸구려 카메라를 받아 쥐고 샤터를 누르기 전까지 화사하게 웃으면서 포즈를 잡았다. 다시 그 카메라를 건네주면서, 근처에 사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곳 공장지대가 있는 타운에 산다고 얘기하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반문하였다. 시카고 근교에 사는데, 지금 저 친구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그녀는

“I've never been there, but I love to go and see the fall!”

그러면서 쓸쓸한 미소를 건넸다.

“Why did you come here on this rainy day alone?”

그녀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마치 어느 영화에서 보듯, 젖은 몸을 슬며시 비꼬면서, “시간이 있으면, 술 한 잔 사주지 않을래요?” 하는 식의 어울리고 싶다는 애틋한 표정을 지어 보냈다. 그걸 알아챘지만, 그 이상의 대화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역시 아쉬운 듯

“Bye! Have a nice day!”

를 힘없이 던지며, 다시 빗길을 재촉했다. 비에 젖은 쓸쓸해 보였던 그 백인 여자의 잔상이 고속도로에 들어와서도 얼마 동안 맘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 건수를 잡으려면, 비 오는 날 호수에 나가면 되려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었다. 이 친구가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이제 집에까지는 3시간 정도 달리면 상황이 종료될 일이었다. I-94번에서 I-294로 갈아타고, 시카고의 남단을 돌아 북북서 방향으로 달렸다. 비가 멈춰가면서 차들이 그렇게 밀리지는 않았으나, 오후 4시가 넘으면서 하행선은 엄청 밀려 있었다. 하늘은 아직도 검게 비구름이 깔려 있고, 헤드라이트의 행렬을 거슬러서 제법 빠르게 달렸다. 와이퍼가 가끔 삐그적하고 앞 유리창을 휘저었다. 잠시 후 우리 동네로 빠지는 톨게이트를 지나고 5시쯤 집에 도착했다. 이틀 만에 돌아온 집안이 새롭게 보이고 아늑하게 보였다. 12시간 동안의 긴 여로였는데, 만규는 집에 와서도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종합훈련 같은 강행군에 혀를 내둘렀다.

 

이틀 후, 그를 LA로 떠나보내면서, 3주 후 한국에서 재회를 약속했다. 중소기업 기술 지도를 한답시고 거의 매년 방한하는 한 여름 동안의 2주가 결코 긴 기간이 아녀도 은근히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갈 거 같은 무더위 속에서 기술 지도를 끝내고 금요일 오후에 올라와 짐 가방을 든 채로, 그가 약속해 놓은 음식점으로 갔다. 매년 만나는 몇 동창들도 이미 나와 있었고, 졸업 후 첨 만나는 동창도 나와 있었다. 반가움에 술 몇 잔이 돌아가고 분위기가 익어가자, 그는 지난번 미네소타에서 렌터카를 공항에서 픽업하고 빠져나오질 못해서 수 없이 뺑뺑이 친 일이며, 시카고에 갈 때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렌터카 반납하는 예행연습까지 했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오후에는 단지 심심해서 왕복 400마일을 도깨비같이 고속도로를 달려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거며, LA에 가서는 혼자 라스베이거스에 눈도장 찍으러 갔다 오는 도중에 펑크가 나서 적막한 사막에서 똥줄이 타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는 견인 차량을 불러 세워서 도움을 받아 해결한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타이어 때우는데 생 바가지를 서너 곱 쓴 일이며, 감격의 나이아가라 기행과 나의 끝내주는 운전 얘기를 그칠 줄 모르고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