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미국 이름은 Ken이다. 내가 그를 처음 봤던 기억은 대학 시절에 2년 선배로 같은 과는 아니지만, 당시 유행했던 미제군복을 검게 물들여서 입는 세칭 스모루 작업복을 주로 입고 다닌 모습이었다. 그 작업복은 그 당시에 많은 젊은이가 간편하고 스타일도 있어서 사시사철 입을 수 있었는데, 그는 볼 때마다 검은 비닐 책가방에 코리아 헤럴드 영어 신문을 들고 다니면서 갸름한 눈이 거의 감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으면서 후배한테도 항시 존댓말을 썼다. 그러다가 내가 2학년 때인 1969년에 덕수궁에서 열렸던 코리아 헤럴드 주최 영문 백일장에 갔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만났다.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연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던 박술음(1902~1983) 교수가 그날 제목을 크게 “Today Seoul”이라고 외쳤다. 영문으로 글을 쓰는 게 익숙지 못했던 나였고, 그 선배도 입선하지 못 했는데, 예전보다 조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과도 아녀서 특별히 만날 기회도 없이 몇 년이 지나고 그는 우리 모두같이 공군 무관 후보생 자격으로 공군에 입대하여 그 당시 대방동에 있었던 공군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년 후에 나 역시 공군에 입대하여 처음에 대구 전투 비행단에서 별 보기 운동하며 뺑뺑이 도는 근무하다가 대전 교육 사령부 교관으로 전속 갔고, 2년 반 후에 전역하였다. 그에 대한 소식은 그동안 알 수 없었는데, 2년이 조금 지나서 내가 현대 건설에 근무하는 동안에 나와 친하게 지냈던 우리 과 동창이 우리보다 2년 더 근무한 후에 대위로 전역하여 당시 창원에 있는 ‘현대양행’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선배와 같은 기숙사 방에서 지낸다는 얘길 들었다.
내 친구는 그가 매우 성실하고 어려운 집안을 잘 이끌어간다고 하였다. 그 무렵에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파견도 성행하였지만, 근무환경이 더 좋고 선배들이 주로 간 미국으로 기술 이민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직 미혼이라 배우자를 찾고 있을 때였다. 이런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친구는 그 선배가 내 여동생의 배필로 적격이라며, 서울에서 만남을 주선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왕십리와 온수동에 있었던 디젤엔진 구동 비상발전소 재조립 설치 담당 기사로 1년, 그리고 당시 울산 '유공'의 대형 구형 프로판 가스 탱크 설치 공사를 1년 걸쳐서 마치고 차기 공사 준비를 하려고 본사에 왔는데, 기계부에서는 나를 중동 바레인 디젤 발전소 설치 기계 담당으로 이미 낙점시켜 놨다. 현대에서 계속 근무한다면 재정적으로나 직위도 승승장구할 좋은 기회이지만, 나 역시 조만간 미국에 갈 처지라 아쉽게도 고사하고 잠시 본사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1978년 12월인데 나는 여동생한테 연락하여 나오게하고 어느 다방에서 모두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니 찬 바람에 모두 몸을 움츠리다가 따뜻한 국물 생각이 났다. 당시 광화문 사거리 근처에 있는 현대 건설 본사 건너편의 세종대로 곁 인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있었는데, 한 군데에 들어섰다. 우리는 어묵 국물에 어묵 꼬치를 맛나게 먹으면서 소주도 시켰다. 그런데 그 선배는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아주 적어서 평소에 술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첫 잔을 갑자기 먼저 원 샷으로 비우고 더 마시겠다고 하여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는 고개를 떨구며 어깨가 앞뒤로 흔들리도록 흐느끼는 바람에 나와 친구는 잠시 당황하여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 친구는 그를 데리고 돈암동 집으로 갔고, 나는 동생을 데리고 용산에 있는 병원 기숙사로 가면서 물었다.
“그 선배를 어찌 생각하냐?”
“글쎄요-. 그가 오랫동안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쌓인 스트레스가 터진 거 같은데, 이해는 됩니다.”
그리고 그 선배와 동생의 만남이 몇 차례 이어졌는데 서로 혼약을 하고 나도 돈암동 집에 찾아가서 홀어머니와 큰 누이한테 인사를 드렸고, 혼인날을 잡았다. 그는 돈암동 산기슭에 있는 고옥에서 시내가 훤히 보이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부친이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일찍 작고하여 홀어머니가 어린 삼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였고 후에 큰누이는 대학 진학도 혼인도 포기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서 동생들 학비며 가계를 꾸렸다.
그러고 보니, 1977년 7월에 둘째 동생 결혼, 1978년 9월에 나의 결혼, 그리고 1979년 3월에 이 동생의 결혼으로 2년 동안에 셋이 혼사를 치렀다. 나는 내가 출국하기 전에 그래도 현대에서 마련한 적금으로 전세방도 얻어서 동생들 모두 혼인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혼수경비도 마련해줬는데, 이 동생의 결혼 때는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서 결혼비용은 동생이 병원일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치렀다. 그 무렵 막냇동생은 공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남동생은 1983년 4월 초 중위 때, 내가 방문 초청으로 1980년에 어머니를 모셨고, 이듬해에 컴퓨터 조회가 없던 시절이라 부부가 모두 방문초청으로 미국에 들어가도 걸리지 않아서 1981년에 아버지도 무사히 모셨는데, 1984년 12월에 내가 시민권을 받을 때까지 불법체류를 하고 있던 부모님과 우리 내외와 첫째 동생 내외도 한참 적응하기에 바쁠 때라 금전적으로 여의치 못하여 참석지 못하고 얼마의 축의금만 보냈고, 둘째 동생과 큰집 형님 내외와 고모네 식구가 참석하여 성당에서 치른 사진과 후배 공사 생도들이 양쪽에 도열하여 군도를 쳐들고 세리머니를 하는 아래로 지나는 사진을 보면서 서운한 맘을 달랬다.
그 후로 그 선배는 한국 전력에 다니고 동생은 병원 일을 하면서 첫 딸도 보고 또 앞으로 혼자 계실 시어머니와 출가도 못 하고 집안일에 매달려 온 큰 누이의 스트레스를 받아주면 지내다가 1982년 1월에 우리가 사는 시카고로 떠나왔다.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가 어려울 걸 생각하여 큰딸을 한국에 남겨 놓고 왔는데, 그 딸이 훗날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 어려서 엄마 아빠가 자기를 떨쳐놓고 떠났다는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삐뚤어지는 성향을 보였다. 선배는 한국 전력에 있으면서 미국 Bechtel 회사에서 파견 나온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비파괴 검사원 자격증을 따는 과정을 열심히 배웠고 시카고에 온 후에 면허증을 발급받기 전에도 몇 번씩 버스를 바꿔 타면서 시카고 공항 근처의 한인 물류회사에 잠시 다녔다. 얼마 후에 Hartford 보험회사의 직원으로 비파괴 검사원이 되어서 원자력 발전소에 파견 근무를 시작하여 첫 직장으로 일리노이주의 Decatur 원전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 6월에 캘리포니아 Pismo Beach에서 가까운 원전으로 자리를 옮겨서 기후 좋은 동네에서 은퇴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연중 온화하고 경치 좋으면 뭐하나? 그 원전에서 영어도 잘 못하고 사교적이지 않은 데다 말수도 없는 선배는 심한 인종차별을 받으면서 일하는 동안, 동생은 여럿이 같이 먹도록 수시로 만두를 빚어서 가져가게 했다고 하였다.
선배이자 매제인 그는 어려서부터 어려운 집안 살림에 정신적으로 절약이 강하게 배어서 금전적으로 강한 애착이 있었다. 동생이 하는 말이 먼지라도 호주머니에 들어가면 내놓지 않을 정도라고 하였고, 몸이 성치 못한 어머니가 동생네가 사는 도시 근처에 몸에 아주 좋다는 온천이 있다 하여 어렵사리 가셨는데, 온탕에 업고 들락거린 수고도 많이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곳에서 가격이 좀 나가는 물건을 사는데, 현금이 없어서 선배의 신용카드를 쓰자고 했더니, 처음에는 안 된다고 기겁하여서, “이 사람아 내가 그 돈 보내줄 거니 걱정하지 말게!”라고도 하였단다. 그 후로도 이런저런 그의 고린전 한 푼도 아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70년도 초에 대방동에 있는 공군본부에 근무하면서 버스를 두 번 타야 돈암동 집에 가는데, 버스비 10~20원이 아까워서 20여 분 걸어서 노량진에 가서 한 번 타고 출퇴근을 하였단다.
그는 90년도 중반에 그의 모친이 임종이 가까웠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한국엘 가려고 하였는데, 모친이 작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한국행을 포기하고 얼마의 돈을 장례에 쓰라고 보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의 동생은 장남이 말도 안 되는 행태를 보인 거에 화가 나서 다시는 형의 얼굴을 안 보겠다면서 의절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방한하여도 끝내 연락도 못 하고 인천의 둘째 여동생 집에서 생각도 없이 일 주일 이상을 묵으면서 지내다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휴가 때는 두 부부가 어디라도 다녀와야 하는데, 시카고에 살던 부모님 집으로 휴가 와서 1~2주를 묵고 가는 일도 있어서 동생은 세월이 갈수록 맘속에 싫어지는 응어리가 점점 커가고 있었다. 그 후로도 시카고에 오기만 하면 우리 부부 앞에서 아주 심하게 말다툼하며, 동생은 더는 못 살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두 딸이 성장하면서 큰딸은 학업 상적이 월등하여 그 타운의 고등학교에서 1등이 하는 Valedictorian(발레딕터리안)을 하였고 LA에 있는 유명한 사립 여자 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무슨 연유로 학창 시절에 공부보다는 노는데 더 열중하여 졸업 후 큰 기대를 저버리고 향락 위주의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가서 원어민 교사를 하러 갔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곳에서 만난 연하의 남성과 결혼하여 득남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자립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되어서 부모 밑에서 얹혀서 살면서 어린 아들을 맡기고 부부가 Food Truck을 하기도 하였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접어버리고 계속해서 얹혀 지냈다. 수년이 지나도록 수입이 없자. 결국 엄마 아빠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어려서 자기를 한국에 버리고 떠난 거에 대한 보상으로 말이다.
선배는 은퇴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비파괴검사 장비에서 나오는 방사선에 알게 모르게 노출된 탓인지 암으로 신장 하나를 제거하고 또 염증이 심해진 쓸개가 터져서 제거하는 수술받고 회복 중에 세균 감염이 있어서 재수술 받고서 오랫동안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정신 상태가 변하여 움직이는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다. 집에서 요양을 못하여 비싼 요양원에 입원하였는데, 큰딸은 그런 아빠의 상태를 악이용하여 의료비 등 재산 문제를 자신이 잘 해결해 준다고 아빠를 먼저 꼬였고, 또 엄마도 꼬여서 퇴직 연금과 적금을 관리한다면서 목돈이 부족하게되자, 불법으로 벌금이 크게 부과되는 원금까지 빼돌려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로 수십 년을 살아 온 연립주택으로 된 허름한 콘도에서 해안이 가까운 멋있는 새집으로 이사시키고, 더불어서 자기네 집도 마련하였다. 이런 사실이 둘째 딸한테 알려지자 부모의 재산을 불법으로 악용한 법적 소송까지 벌였다는데 당연히 큰딸이 유죄가 될 것이 뻔하여, 그 이후로는 우리 내외도 소식 듣기가 너무 거북스러워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평생 아껴쓰고 저축한 돈이 그렇게 허무하게도 친 딸 손에 녹아 내렸으니, 버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미국에서도 재산이 어느 한계를 넘으면 극빈자 혜택을 받지 못하여 비싼 요양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법적 소송도 진행이 되는 동안에 재정적인 문제가 대두하였다. 그러다가 아마도 2023년부터 동생과 40이 넘었는데도 몇 해를 같이 지내던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로 직장 생활에만 전념하는 둘째 딸이 상의하여, 한국애서의 장기 체류를 하기위해서 거소증을 받고 보험 혜택을 받으면 의료비가 한 달에 $1,500 정도로 훨씬 저렴한 한국의 요양병원에 선배를 모시자는 데 동의하고, 그동안 두 부부가 열심히 믿었던 안식일교회의 한국 지부를 통해서 요양원을 알아보면서 거소증을 만든 후에 2024년 5월 말경에 안성에 소재한 요양병원으로 입원시켰다. 한국에 가서 입원하는 게 어떻냐고 물었을 땐 아주 싫다고 하였던 선배의 의지와는 달리 한 달에 $4~5,000도 넘는 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으니 강행하였다고 한다.
우리 내외가 방한 중인 지난해 2024년 7월 14일에 남도와 강원지역을 돌아보고 상경하는 길에, 언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이번에 꼭 들려보자고 하여 막냇동생 부부가 연락하여 1시간 면회를 허락받고 예약한 오후 3시에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반이 지난 선배를 만나보러 들렸다. 밖은 더웠지만, 실내는 시원하였고, 잠시 기다린 끝에 휠체어 탄 환자복의 초췌한 선배가 면회실로 들어왔다. 선배의 예전 얼굴의 모습이 남아 있지만, 바짝 마른 얼굴은 그런대로 좋아 보였다. 서울에서 만난 둘째 딸은 인지능력이 저하된 상태는 아니지만, 말을 잘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우리를 보고도 무표정에 아무 말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누구라고 소개를 하였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눈만 껌벅이며 표정이 없다.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오른손이 떠는데 파킨슨 증세까지 있어서 걷는 연습을 하면, 걷지 못하고 주춤거리기만 한다고 같이 온 사무장이 알려줬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여 기저귀를 차고 소변은 호스를 끼워서 주머니에 연결해 둔 상태였다. 사 온 자두를 씻어서 건네주니, 어금니가 없는지 잘 씹지 못하고 오물거리기만 하였다. 내가 이게 영어로 무슨 과일이냐고 물었더니, 머뭇거리길래 P자로 시작한다고 하였더니 그래도 Plum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한국-’이라고만 하였다. 그리고 누가 제일 보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둘째 딸이란다. 그리고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물으니까, 집에 가고 싶다고 하여, 내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우리 어머니도 병원에 입원하면 자주 집에 가자고 하셨기에-. 누구든지 집이 젤 좋은 게다. 이제 이런 처지에서 뭣을 할 것인가? 우리가 보기엔 중증은 아니더라도 인지능력이 상당히 저하된 거 같다. 그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데, 온종일 주로 뭐 하고 지내냐고 물으니까, 천정을 쳐다보며 지내는 표정을 하여서 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Ken은 서울 사대부고에 다닐 때 트럼펫을 불다가 결핵에 걸려서 휴학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왔기에 2년 선배인데도 몇 년을 쉬어서 내년에 80이 된다. 내 막냇동생도 서울 사대부고를 나왔고, 집사람 동문 중에 전 삼성 회장 이건희와 사대부고 동창이라며, 말끝마다. 건희는-, 건희는- 하던 말이 생각나서 비스게 웃음이 나온다. 매제는 이제 어쩔 도리없이 미국 집에 다시 갈 수도 없을 거고, 요양병원에 전입신고 하여서 거소증도 만들었으니, 그나마 남은 가족이 자주 방문하길 바라며 사는 날까지 큰 고통 없이 원만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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