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랑 타령

어느 술취한 밤의 국제전화

바람거사 2021. 1. 8. 02:59

 * 2010년에 올린 글에 지르박 음원을 추가하고 다시 올렸습니다.*

 

                                                 

벌써 4년 전인 2006년, 초겨울은 유래 없이 따뜻하였다. 한국도 역시 그러하다는 기사도 봤다. 그 해 연말 파티 모임에 가던 초저녁에는 주룩주룩 내리는 여름 비는 아니더라도 제법 세게 뿌리는 비로 인해서 기분이 몹시 설레었다. ‘야, 이거 LA나 Seattle 같구나. 여기 Chicago로 온 후로 12월 중순에 비가 온 건 정말 첨 아냐?’ 하면서 감격에 젖기도 하였다. 허지만, Chicago는 북위 42도에 위치하여 청진과 거의 같은 위치에 있어, 겨울이 길고, 춥기도 하거니와 남한 영토의 근 60%나 되는 거대한 Michigan 호수를 북동쪽에 끼고 있어서 여차하면 호수에서 증발하는 습기가 북동쪽에서 불어 닥치는 찬 공기로 인하여 엄청난 눈으로 둔갑하여 퍼부을 때도 있다. 얼마 전 Indiana와 Ohio 북쪽에 폭설이 그렇게 내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Chicago를 비껴갔지만, 매년 수차례 그리 내린다. 


오늘은 일요일 저녁인데, 낮에 워크아웃을 가지 못해서 지하실에 있는 트레드 밀에서 ‘야래향’을 선두로 지터박 접속곡을 연속으로 들으면서 한 시간 동안 뛰었다. 샤워를 하고나니 목도 마르고 하여 냉수 한 잔을 마시고 나서 포도주를 한두 잔 마신다는 것이, 그만 자근자근 거리며 내리는 겨울비 탓에 맘이 괜히 감상에 젖어 그만 한 병을 다 비워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이 난 끝에 한국에 있는 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였다.

 

Episode I:

 

지난번 방한 때 시간에 쫒기다보니 대학과 동창들과의 단체 만남은 꿈도 못 꾸고, 부평에 있는 GM 대우자동차 사업본부장으로 있는 동창한테 연락을 하여 떠나기 전날 점심을 같이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지금 마지막 교정을 보는 중인데 조만간 책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그가 드디어 얼마 전에 출간된 그 책을 부쳐왔기에, 전화를 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이 친구는 나처럼 멍청하게 대학원에서 6년 이상이나 허송세월 한 해외유학은 고사하고 한국에서 4년 동안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돌이지만, 처음 직장으로 GM코리아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근무를 하였다. 수년 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사문제의 극적인 타결이나 일 인 일 구역 제로 시작한 작업장 환경정리를 시발점으로 하여 생산성 혁신에 이르는 경영환경정리를 일궈내어 부도에 처한 부평공장을 다시 일으키게 한 전설적인 큰 일을 해냈다. 그래 너무도 자랑스러워, 무진장 칭찬을 해줬다.

 

그의 별명이 천연기념물이란다. 그 나이 먹을 때까지 용하게도 살아남아서 어려운 일을 잘 해내왔으니 말이다. 아니 그 보다 ‘어려운 일들을 잘해 내왔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얼마나 배웠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가 알고 느끼는 바를 어떻게 실천하는 가가 더 중요한 거라는 걸 보여줬다. 오랜 세월 동안 어렵사리 많은 공부를 해 놓고서도 나를 떠난 인연의 멍에에 얽매여, 이토록 초야에 묻혀서 세월을 낚는 나를 봐도 그렇다.

Episode II:

 

그 친구와의 전화를 끊고 나니 불현듯 그 전날 부천 상동에서 만난 성인 노래방 도우미였던 ‘미소’가 생각나서 석 달 전에 건네준 쪽지를 서랍에서 뒤져내어 살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011-82----하며 긴 전화번호를 눌러댔다. 서로들 눈이 맞은 구석도 물론 있었겠지만, 더욱이 술기운까지 올라,대뇌 속에 감성적인 돌기가 크게 돋아난 나머지, 풋정이 들어 건네 준 전화번호인데, 그래도 한 번쯤은 연락을 해 주는 게 예의(?)라고 내 나름대로 결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한밤 술기운이 조금 오른 나의 기분은 그렇다고 해도 한국은 오후 3시 무렵, 그녀는 맨송맨송한 정신으로 뭘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판에 이런 감상에 빠진 엉뚱한 전화가 걸려온다면?

 

그날 노래방에서 헤어질 때, 그 '미소'는 상기된 얼굴에  느끼한 눈길을 보내며 속삭였다. 

"오빠, 오늘 어디서 잘 거야~?"

"음, 집에서 자야지-. 오늘은-. 친구도 있는데-."

"아이~ !"

그리고 아쉽다며 핸드폰 전화번호를 적어줬었다. 

신호가 몇 차례 갔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감정 노름일까?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나도 뭐라 대꾸를 할 것 같은데, 맘의 준비를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여기 미국인데요.”
“누, 누구시죠~?”
“저, 지난 9월 초에 상동 노래방에서 만났던, 그---”
“아, 네, 그때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던 그 오빠?”

그래, 하루 밤 몇 시간 같이 노래하고 마시고 진하게 춤췄던 뜨내기인데, 지난 석 달 동안에 도우미를 계속하고 있었다면, 줄잡아서 백 명도 넘을 손님들과 비위를 맞추며 술과 노래와 희롱 속에서 절여 지냈을 터, 술이 깨인 대낮 말짱한 정신으로 반가이 기억을 해줬다. 잠시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그리고 상동에서 별로 멀지 않은 인천 계산 동에 산다고 하였다. 내년 봄에 혹 나오시면 꼭 연락을 달란다. 그땐  다른 노래방에 들러 실컷 부르고 마시며 춤이나 추면 되려나?

 

Episode III: 


이렇게 별난 전화 걸기에 발동이 걸리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정말이지 마지막이 되더라도 꼭 목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작년 가을에 인터넷을 통해서 35년 만에 극적으로 찾아낸 첫사랑 여고생. 지난해 겨울 두 어 달 동안 30여 통의 이 메일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연락이 끊어져 버렸었다. 그러다가 일 주 전에 연말연시를 맞아 전자카드를 보냈는데, 뜻밖에 답장이 왔다. 그동안 부군이 암 치료를 받느라고 그리 정신없이 지냈다고 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무슨 이유에서 다시 연락하고 싶지 않을 맘이 생겨 피해 버렸다는 생각을 한 터라, 그녀의 핸드폰 전화번호를 움켜쥐고 방한을 하였지만, 결국 통화해볼 엄두도 못 내고 귀국을 하였었다. 허지만 얼떨결에 오늘 밤에서야 걸고 말았다. 

“여보세요? 저 김 아무개입니다. 정말 오랜만이죠?”
“아니,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아, 작년에 연락해준 그 후배 교수가 수소문을 할 때, 거기서 알려준 걸, 그 친구가 바로 알려줬지요.”

그녀는 너무도 놀래어 목소리가 가볍게 떨고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 만큼 들은 그녀의 목소리이지만, 옛 날 그 여고생의 목소리의 색깔을 대번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얘기 끝에, “그때는 건축공학을 하러 독일엘 가고 싶다고 했었지요?”라고 물으니, 정말 그러했었다며, 그런 것까지 기억을 다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래서 난 기억한다기보다 예전에 기록을 해둔 것이 있어서 아는 거라고 얘길 하였다. 그랬더니, 하도 꼼꼼해서 그러실 거 같다는 얘길 하였다. 이렇게 전화해도 괜찮으냐고 하였더니, 다행히 반갑게 받아주며 그러하다고 하였다. 나이가 들면, 모두 다 그리 너그러워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는 첫사랑의 잔상이고 뭐고, 다 녹아 대뇌 속 그 어디로 이리저리 흩어져버렸고, 오로지 현실을 사는 중늙은이가 되어버렸다.

 

 

Episode IV: 


수년 전 우연히 T일보의 인터넷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기자 칼럼에 게재된 글을 대하게 되면서, 자기소개에 유난히도 개

인적인 얘길 많이 쓴 어느 여기자에게 관심이 쏠렸다. 그녀는 1년 동안 뉴욕 S대학에서 연구학자로 지내고 있었는데, 미

국 온 지 얼마 안 돼 9.11 테러참사를 목격하면서 전쟁과 테러가 보통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

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처럼의 연수기회를 얻어 공부만 할 작정이었지만, 이곳에서 보고 듣

고 느끼는 모든 것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쉬웠는데, 귀한 공간에 글을 올리게 되었다고 하면서, 참을 수 없는 솔직함

이 자기의 장점이자 치명적 약점이다 보니, 늘 너무나 솔직하게 글을 쓴 뒤 부끄러워하곤 하였는데, 이런 본인의 글이 주

는 특성이 또 다른 글쓰기와 삶 읽기 방식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녀의 그런 소개를 읽을 때만 해도 40을 갓 넘긴 중년의 여기자라는 점에서 완숙한 글을 쓰지 않겠나 하는 호기심이 있는 정도였었지만, 그녀가 쓴 글을 죽 읽어 보고 나선, 글 쓰는 재주를 따지기 전에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바람이 확실하고, 객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음, 한번 연락을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목마른 대화의 출구를 찾기 위해서 첫 메일을 썼었고, 반년이 넘도록 무수한 메일이 오가며 깊은 정 들이기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 뉴욕에 오셔서 같이 밥도 먹자고 하였지만, 집사람에게 무슨 이유를 대고 뉴욕으로 날아갈 수는 없을 일이었다.

 

그러다가 귀국 날짜가 다가오면서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계기가 있어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 고집스럽게 오리발을 내밀면서 길어질 뻔했던 꼬리를 내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예전의 자신을 되찾고 지성인(?)의 길을 고수하려 했던지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혀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 그렇게 단 한 마디로 기억의 일부를 지워버리자고 생각하는 자체가 소름이 낄 정도의 대단한 이기주의자이거나, 지금까지 처절한 고독에 절여져  예전의 자신을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제정신이 들어선 모양이니, 내 맘 한 구석 에는 아쉬움보다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해서 얘깃거리의 기본 구성요소인 ‘기승전결’을 갖추기는커녕, 전결 단계에 들어서다 말고 졸지에 꺼져 버린 것이었다. 마지막 보냈던 메일에서 절대로 전화를 안 한다고 하였지만, 술이 얼큰하게 취한 날이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으나 용케도 참았다. 그리 한 달이 지나니, 꽃사과나무 꽃 흐드러지게 피던 봄은 이제 여름으로 바꿔져 버렸다. 봄의 낭만 대신에 무더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지난 일 년 동안 머물렀던 뉴욕에서의 체류기간이 나고, 그동안 그나마 정들었던 아파트를 떠나 귀국을 하겠지. 그리고 한국에 들어가면, ‘누가 날 죽여줬으면-’ 하는 처절한 고독을 씹었던 어느 중년의 여기자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두텁게 재포장을 해버리고, 다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여러 사람들 중심에 서서 공주같이 지낼 것이니,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만난 우리들의 정들이기 놀이는 곧 망각해버릴 일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가슴을 짓 눌러왔던 멍에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리고서 맘의 어떤 준비도 없이 전에 알려준 핸드폰 전화를 눌러버렸다. 신호가 몇 차례 가고 오랜만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네, 여기 뉴욕에 있는 ---.” 

“어떻게 이 전화번호를 알았지요?”

 “전에 알려 줬잖아요.”

 “저, 앞으로 이리로 전화하지 말아욧!”

 “그리 하지요. 그런데, 잠깐, ---.” 

하였더니, 냅다 서둘러 끊어버렸다. 전엔 내가 끊으려 하면, 벌써 그러냐고 통사정을 했댔었는데 말이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치사하게 미련을 가지고 다시 어찌하자는 게 아닌데. 자네도 자기 하고픈 대로하였으니 나도 그리 하고픈 대로 할 수 있지만, 내가 그리하면 똑같이 배려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겠지? 하며 어처구니없게 씁쓸히 웃었다. 이럴 때는 고상이고 뭐고 다 떨쳐 버리고, 그 옛날 시골 장터나 유원지, 그 시절 삼류 카바레 등에서 접속곡으로 이어지는 이런 지터박 리듬에 맞춰 땀에 푹 젖도록 흔들어보는 게 상책이다. 아싸, 아싸~, 다 잊어버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