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랑 타령

<사랑 이야기> 안 해, 죽어도 안 해!(I)

바람거사 2021. 1. 3. 04:27

 

Liz Taylor

                                                                                첫눈에  반했다 : 

석이가 선옥을 첨 만난 때는 신촌에서 가정교사를 막 시작할 무렵인 1969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는데, 그 집 친척이라는 한 여대생과 함께 온 그녀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그녀가 미대생이라는 건 물감 케이스를 들고 있는 걸로 봐서 그리 짐작을 하였다. 오른 팔에는 몇 권의 책을 받쳐 들고 손목까지 내려온 실크같이 반짝거리는 엷은 베이지색 상의에 아보카도의 짙은 초록빛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반듯한 이마에 높은 콧날이 중심을 잡고, 짙게 쌍꺼풀진 눈시울아래 여리게 보이는 눈은 잘 익은 포도알같이 보였는데, 더욱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약간 작은 듯하지만, 도톰한 매무새의 입술이었다. 올백으로 귀 볼이 동실한 양 귀를 다 내놓으며 반지르하게 빚은 머리며 얼굴 윤곽이 순간 리즈 테일러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고, 무척 이지적이고 깔끔한 첫인상을 받고서는 그만 멍해져버렸다.

 

그날은 잠시 소개정도로 인사만하고 지나쳤는데, 그녀에 대한 첫 인상을 일기에 적었다가, 그가 가르치는 여고생이 훔쳐보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 후로 그 애는 선옥에 대한 표현을 두고두고 인용하면서, 

  “제 눈은 어때요? 제 것도 잘 익은 검은 포도 알 같지 않나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포도 알 같다는 얘긴 또 무슨 소리고?”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다 봤으니깐―.”

하며 석이를 놀려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눈웃음을 지으며 막말을 마구 하는 그 여고생이 당돌하였지만, 애교 넘치는 투정을 귀엽게 받아주었는데, 결국 시련의 우여곡절을 겪고 말았다.

 

그리고 현주네 집을 떠나 학교근처에서 다시 둥지를 틀고, 학교공부에다 과외지도에 여념이 없다보니, 몇 달 전까지 석이의 맘을 통째로 흔들어 놨던 현주에 대한 미련이나 선옥에 대한 관심까지도 흐려지면서, 그해 겨울방학을 보내고 봄 그리고 그룹지도로 바쁜 여름방학도 지나 3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얼마 후 가을이 깊어져가면서 석이는 불연듯 선옥이 생각나서, 두 어 차례 장문의 편지를 띄웠으나, 어느 날 잔뜩 기대를 하고 설레며 받은 편지에는,

   ‘보잘것없는 여잡니다.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선옥’

이라는 단 한 줄이 써져 있었다.

 

사실, 첫 만남에서 서로 강하게 끌렸던 데이트를 한 것도 아녔고, 단지 외적인 미모에 빠져 일방적인 연모가 일었던 것인데도, 근 1년 만에 서서히 늪에 빠지듯 그녀에게 다시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보낸 편지에 답장이 안 오자, 어떻게든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점심시간 전에 수많은 여학생들이 들락거리는 S 여대 정문 앞에 서서, 스케치북이나 물감 케이스를 들고 들어가는 학생을 붙잡고 양해를 구하고선 학교정문에서 그녀를 기다린다는 쪽지를 전해주도록 하였다. 여자 대학 정문 앞에서 여기저길 기웃거리며 얼쩡거리는 것이 참 궁상맞은 짓이라 생각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여튼, 이런 억지를 부려서 처음으로 안개 속을 걷는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1970년 10월 어느 날 워커힐로 올라가는 길은 안개가 짙게 껴서 한강이 전혀 내려 보이지도 않았다. 푸른 소나무며 전나무, 잡목들이 빼곡히 도열하고 있고, 산 쪽에서 밀어오는 기류에 짙은 안개의 흐름이 한강 쪽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유난히 큰 나무나 바위에 부딪칠 때는 마치 물결이 튀기듯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아스팔트길 옆으로 석이는 선옥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곧 바로 나왔기에 짙은 갈색의 떡갈나무로 된 케이스를 들고 스케치북을 끼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모습은 그의 선입관념과 맞물려 무척 돋보였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순수한 행위여서 더욱 관심을 가졌었고, 또 석이도 어려서 이래로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한참을 걸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선옥은 정성을 다해서 몇 차례 보낸 그의 편지에 대해서 ‘저한테 보내주신 글은 받는 사람 이름만 바꿔서 어느 누가 받아도 될 수필 같은 글이었습니다.’ 라고 얘기를 하면서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변명을 늘어 놨지만, 그저 감상적인 독백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분위기도 너무 좋았던 그날인데, 그녀는 속맘을 전혀 터주지 안 했기 때문에 대화의 진전이 별로 없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다 지나갔기에 점심도 못하고 아쉽게 돌아 내려오고 말았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룹지도를 하면서 빠듯하게 받은 돈을 모아서 학비와 생활비를 만들어야하는 처지에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뇌리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