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랑 타령

<사랑 이야기> 안 해, 죽어도 안 해!(II)

바람거사 2021. 1. 3. 04:28

 

                                                                                      눈먼  짝사랑 :

해 석이는 학생회 학술부장을 맡고 있었다. 매년 가을 축제는 학생회 주관의 가장 큰 행사였기에 학술부 소관으로 시화전을 준비하면서 재학생들의 시를 모으고 있었다. 시화에 필요한 그림은 거의 다 그가 그릴 일이었지만, 다양성 있게 준비할 목적으로, 미술 대학출신에게 일부를 부탁하는 것도 좋을 거같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그런 핑계를 염두에 두고, 점심시간 전에 곧바로 그녀의 학교로  부랴부랴 찾아갔다.

학교정문 쪽으로 들어오기 전에 확인을 해둔 어느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겠노라는 쪽지를 같은 방식으로 전해주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있었다.

 

얼마후 뜻밖에도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약속된 다방으로 들어섰다. 목매어 기다리던 연인을 보는 거같이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그는 무슨 좋은 건수라도 생긴 듯  사정 얘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지만, 그녀는 강경히 거절하였다.

“저는 그런 일 못해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맘이 문제겠지요.”

“어쨌든 그런 도움을 주기도 싫고, 또 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살 수 있어요? 친구의 도움도 필요 할 때도 있고, 또 받을 때도 있는 거 아닙니까?”

입이 달토록 그녀를 설득하였지만, 결국 먼저 가겠다며 일어서더니 찻값을 내고 밖으로 나가는 거였다. 그도 후닥닥 일어나서 밖으로 따라 나섰다. 비는 이미 그쳤으나 아스팔트길은 젖어 있고, 지나치는 차들이 요란하게 물기를 튀기며 굉음을 내고 달리고 있었다. 순간 그는 심술기가 돋아 그녀 옆에 따라 붙으면서,

“왜, 도움도 주기 싫다면서 제 찻값은 내고 갑니까? 여기 찻값 받으세요.”

하며 돈을 건네주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만, 계속해서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큰 길 따라 한참 걷다가 그 길을 가로질러 민가들이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당시 서울 외곽은 한강 이북이라도 개발이 안되어 시골 동네를 연상케 했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연신 따라 오지마라고 하더니만,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면 퉁명스럽게 쏘아댔다.

 

어쩜, 고등학교 때, 되게 귀찮게 하던 그 화상하고 똑 같네요.”

“아마, 그 친구하고 얼이 같은 놈인 모양이죠.”

그러면서 둘은 어느 동네입구에 들어섰다. 그녀는 더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면서 제발 돌아가라는 얘기만 되풀이하면서 힘이 드는 듯, 들고 가던 몇 권의 책을 수시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어느 집 앞에 이르러, 반쯤 열려 있는 대문을 밀며, 막 한 발을 디뎌 놓다말고,

“정말 왜 이러세요? 사리를 분별하실 만한 분이―!”

“나도 이왕 이렇게 왔으니 점심이나 먹고 가야겠는데요.”

하며 한 발을 같이 디뎌 놓았다. 그녀는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머지, 잠시 어쩔 줄을 모르다가, 휙 되돌아서서  곧장 학교 쪽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얼마 후 학교 정문으로 가는 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그녀는 아예 뛰다시피 걸어갔다. 그 순간 석이는 ‘잠깐만’ 하면서 그녀의 팔을 잡는 순간,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반대로 돌리면서 몇 권의 책들이 우두둑 떨어 졌다. 아차하며 몸을 숙여 책을 집어 올리려 했는데 그녀는 관두라고 소리치며, 그의 팔을 세게 내려 쳤다. 다행이 책은 물기가 거의 없는 아스팔트위로 떨어져 젖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섬주섬 책을 집어 들고 다시 학교 쪽으로 발길을 떼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가는 듯, 간간히 몇 학생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쳤다. 그는 잠시 그녀의 앞을 막고서 정색을 하며,

“오늘은 정말 미안합니다. 이럴려고 그런 건 아녔는데---.”

그러자 잠시 그를 원망하듯 쳐다보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돌아오는 길은 몹시 허전하고 원망스러웠다. 어찌 그렇게도 벽창호 같은 여인네일까?를 연신 되뇌이며, 그녀를 설득치 못했던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고, 찌뿌둥한 오후의 하늘같이 무거운 맘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일방적인 약속을 해논 편지를 여러차례 보내고, 결코 나타나지 않는 그녀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당시 시민회관옆 초원다방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부질없이 기다리다가 어두운 자취집으로 돌아오면, 울적해진 나머지 술을 마시고 낙엽진 뒷동산에 올라 소리치던 밤으로 이어지기도하였다. 2년전, 1학년 여름방학이 다 끝나가던 8월말 서울행 밤기차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던 첫사랑 숙이를 위시하여, 죽자살자 따르던 그 현주까지도 다들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더니 모두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이젠 미련인지 그리움인지 구분이 않되는 감정의 찌꺼기만 잔뜩 품고서, 홀로 광야에 팽겨쳐 버린 신세처럼, 어렵사리 꾸려 나가는 황량한 객지생활을 한탄하며, 하루가 멀다고 퍼 마신 막걸리의 취기에 감정이 격해지면, 또 뒷산에 올라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학업에도 충실하지 못하면서 그해 3학년 2학기의 시험이 여지없이 망가지고 평균학점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두고두고 후회가 될 일이 생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