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랑 타령

아포 "고향집" 옥란이는 - "어느 남자의 사랑 이야기"에서

바람거사 2023. 10. 7. 01:35

*무려 반 세기 전 일이다. 1973년 10월 -. 올 2023년 10월에 들어서니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면서 그 시절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난다. 파견대 입구의 색색으로 만발한 코스모스가 굉음을 내고 질주하는 고속버스의 후류에 마구 흔들어대는 모습, 새파란 하늘아래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배구하는 젊은 병사들의 모습, 그 모습들이 내 좁은 뇌리에 생생하게 저며 있는데, 야속한 세월은 이리도 엄청나게 흐르고 마는구나!

 

 

 

이용복의 노랫말을 인용하면서 잊으라면 잊겠어요, 당신이 잊으라시면, ---, 옥란이는 술이 취해서 더 이상 편지를 쓸 수 없습니다 ---.라고 연필로 또박또박 쓴 편지를 받았다. 경상북도 아포에서 좀 더 내려가면 구미가 있고 다음에 왜관이 있다. 도저히 괴로워서 거기에는 더 있을 수가 없어서, 왜관 삼거리 술집으로 떠나갔는데, 안 보면 잊으려니 했는데, 더욱 그리는 정이 살아나 편지라도 쓰지 않고는 미칠 것 같아 보낸다고 하였다.

 

1973년 10월, 가을이 산야에 물들던 아포 파견대에 있었을 때다. 새파란 하늘에 색색의 코스모스가 만발하고, 빨간 고추잠자리의 비상이 있는 파견대 생활은 외로움에 저며진 들뜬 맘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외진 시골이라 보니 어디 갈만한데도 없고 비상대기가 주된 업무인데 파견대장이라는 책임도 있어 그곳을 크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과가 끝나면 자주 들락거리던 고향집이라는 색시집이 있었다. 워낙 시골이다 보니 선금을 주고 모셔온 아가씨들이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철새같이 떠나가 버린다. 모처럼 술 한잔 먹을 요령으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입이 대단히 나온 주모가 그를 보자마자 불평을 하는 소릴 한쪽 귀로 들으면서 둘러보니 옥란이가 보이지 않았다.

- 우째, 김 중위만 보면 애들이 사족을 몬 쓰나? 마, 크게 돈도 안 쓰면서 애들만 꼬시나. 낸, 손해가 억수로 많다! 옥란이 이 년도 한 달도 몬 채우고 또 안 갔나~.

하며 돈을 잘 쓰던지 그렇지 않으면 자주 오지 말라고 반농담조로 어깃장을 부렸다. 주모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중년 여인 인데, 상당히 거친 말투나 행동으로 봐서 젊어서는 접대부 노릇을 오랫동안 했던 가락이 있어 보였다.

 

대구 기지에서 그곳 아포로 파견되어 오던 날, 역에 내리니 보름정도 미리 부임해온 선임하사가 마중을 나왔는데, 점심을 먹기 위해 안내된 곳이 그곳 고향집이었다. 그곳은 그런 선술집이 두 어 곳 있는데 다른 한 곳은 면사무소 앞에 있어서 면사무소 직원들이 주로 가고, 이쪽은 파견대를 위시해서 역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려 대충 손님들이 갈라서 다닌다고 귀띔을 해줬다. 면소재지인데도 동네가 너무 한적했다. 국도를 따라 역 근처에 경찰서나 가게, 식당, 및 시외버스 정류장이 다 모여있고, 김천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있는데 그곳에도 그런 선술집이며,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색시가 있다고 해서 기껏 한 둘이 있는 정도였다. 너무 바닥이 좁다 보니 경기가 좋을 리도 없고, 그래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시러 가도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색시가 반가이 맞아주고 합석을 했다.

 

명색이 파견대장인 김 중위는 처음에는 칙사 대접을 받았지만, 영내자들로 하여금 그 집에 자주 들러 술 많이 마시라 부추길 수도 없는 처지이고, 또 번질나게 나다닐 수 없어서 발걸음이 뜸해지니 주모는 얼마 후에는 홀대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저녁나절 가끔 들르면, 혹 사병들이 볼까 우려하는 체면이 있어서 은밀히 뒷방에다 술상을 보도록 하였다. 일과 후에도 선임하사나 고참 영내자들도 가끔 들락거려서 서로 불편하여 초저녁에는 피해 주고 점호가 끝난 저녁 9시 이후에나 조심스럽게 들리곤 하였다.

 

파견대로 부임하고 몇 주가 지났을 무렵에는 대구에서 온 색시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일 대구로 도로 간다고 귀띔을 해줬다. 그 아가씨의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대구에 오면 꼭 들리라고 술집 주소까지 적어줬다. 몇 번 만나 뜨내기 정이 들어서인지 좀 서운한 맘이 들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역구내 측백나무가 길게 심어진 곳으로 서둘러 올라가니 으슥한 곳에 여행가방 한 개를 들고 홀로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둘은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비비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만나는 동안 지극히 인간적으로 대해 주다 보니, 서로의 처지를 떠나서 발가벗은 남녀가 되었을 뿐이었다. 장교와 접대부의 그런 하루살이 같은 관계는 얼마 후 어둠을 비집고 다가온 열차에 올라 손을 흔들며 떠나가면서 끝날 일이었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났다. 시외 버스정류장에 잠시 나왔다가, 파견대로 갈려면 별 수 없이 고향집 앞을 지나가야 하는데, 먼발치에서 보니 새로 부임을 해온 몸매가 푸짐하게 생긴 한 아가씨가 짙은 화장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껌을 찌걱찌걱 씹으면서 미닫이문에 비스듬히 서서 추파를 보낼 요령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 앞을 지나치는데,

- 이보시오, 장교님! 좀 보입시더. 마, 올 저역에 꼭 좀 놀러 오이소-.

하면서 요염한 눈길을 흘기고 있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두 어 번 끄덕거리며 스쳐갔다.

 

자대에서는 꿈도 꾸기 힘들지만, 이곳 파견대 영내자들도 일과 후 일석점호 전까지 자유시간이 없으면 생난리가 날 입장이었다. 정상근무가 아닌 비상대기를 하는 일이니 하루 종일 가둬놓고 훈련만 시킬 수도 없는 일이기에 전례를 따라 그렇게 잠시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대원들과 같이 어우러져 술을 마실 수도 없었다. 외진 곳에 있는 군부대 근처의 색시 집에서는 장교서부터 영내 자간에 시쳇말로 동서지간이 많다는 소문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하여튼 너무 개인적인 생활을 얽매여 놓기 때문에 파견근무가 길지는 않았지만, 미혼 초급장교가 우선적으로 차출이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 올 때는 단단한 각오를 하고 온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도 닦을 자세로 오는데, 실탄이 지급되는 경계지역이라 긴장 속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몇 달 후 자대 복귀를 한 후에 총기사고와 민간인과의 접촉사고가 자주 일어나서 엄격한 통제체제를 시도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근본적으로 몇 달 동안 갇혀 있다시피 하는 생활에 적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너나없이 저녁나절엔 술을 가까이하는 날들이 많았다.

 

얼마 전 그 고향집 미닫이문에 비스듬히 서서 추파를 보냈던 그녀의 이름은 옥란이라고 했다. 가명이겠지만 조선왕조 때 어느 기생이름 같아 잊히지 않았다. 늦은 저녁, 뒤채에 있는 그녀의 숙소에 자리를 잡고 마시고 노래하고 허접한 얘길 쏟아부으면서도, 될 수 있으면 한 여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팔자소관의 험한 길을 이해해 주면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당시 정인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그녀들과 그렇게 어울리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느 늦은 저녁나절, 대구 자대에 들렀다가 파견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슬그머니 그녀와 같이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고픈 충동으로 밤늦게까지 머무적거렸는데, 주모는 수시로 들어와 훼방을 놨다.

- 하나 밖에 없는 색신데, 떼 돈 들여 장사해 주는 것도 아이고, 대장인지 소장한테만 매달리다 소문이라도 크게 나면, 장사고 뭐고 다 틀려버린 기라. 뭐, 우리는 땅 파먹고 사는 줄 아나? 

하며, 옥란이를 몰아 부치는 거였다. 결국, 그는 숙소가 있는 벙커 쪽으로 비틀대며 발길을 돌렸다. 잠시 가다 말고 고개를 쳐들고 허공을 쳐다봤다. 그리고 대학시절 몸과 맘이 고달팠던 날 이해해 주지 못하고 훌훌 떠나버린 여인네들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욕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파견대 뒷산 위에 널려진 무수한 별들이 금방 쏟아져 내려오듯 흔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오기가 생겨 비틀거리며 되돌아와서 고향집 뒤꼍 흙 벽돌담을 넘으려고, 양손으로 움켜쥐고 발을 올리려는 순간, 움켜쥐었던 벽돌장이 바스러지면서 담이 흔들하는 바람에 기겁을 하고 되돌아갔다.

 

다음 날 저녁나절에 시치미를 뚝 떼고 잠시 들렸더니, 장난기가 잔득 낀 옥란이가 낮은 소리로 지껄이는 말이 걸작이었다.

- 어제 밤 뒷담 넘어오려고 용 썼지예? 

하면서 히죽거리니 기가 찰 일이었다. 흙벽돌이 부서지면서 흙덩이가 장독대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에 살그머니 살펴봤었단다. 뒷문을 열어 주고 싶어도 유난히도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지라, 엄두도 못 냈다 하면서 언제 기회를 잡아보자고 넉살을 부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날 밤, 주모가 헤헤--할 정도로 짭짤하게 밑돈도 들여가며 밤늦도록 마시고 놀다가 한 번 회포를 풀고 갈 요령으로 분위기를 잡아 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홍순경이 보초를 단단히 서고 있음을 직접 확인하고 투덜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상대하는 여인들이 많이 배웠던, 적게 배웠던, 얼굴이 미색이던 그렇지 못하건 결코 차별을 두지 않았다. 험한 길을 가는 그네들을 결코 기만하지 않고, 이해해주는 맘을 통하며 지내다보니, 그녀 맘에는 이루지 못할 풋사랑의 싹이 텄었나 보다. 아마 아직 세파에 덜 시달려서 그런지, 어떤 사내한테도 정을 주지 않는다는 금기를 무너트린 탓이었을까? 옥란이는 사모의 정에 얼마 동안 괴로워하다가 그렇게 훌훌 떠나 가버렸다. 불과 한 달이 채 못 되는 기간이었기에 주모가 펄펄 뛰는 건 당연했었지만, 그로서도 무척 서운하였다. 아마 현대를 사는 야누스같이 앞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을 내세워 눈먼 정을 키우게 하고, 뒤에선 별수 없이 풍만한 몸매에 대한 육감적인 욕정의 노예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가식으로 포장된 언행 뒤에 욕정을 키우지는 않았다. 연민의 정일 거라 생각해봤다. 책임도 지지 못할 녀석이 인간미를 운운하는 건, 역시 위선이다. 때로 모질게 세파에 씻긴 그네들을 만나면, 인간미 운운함이 전혀 먹히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이름도 고향도 묻지 말고 돈이나 듬뿍 주고 술을 먹든지, 오입을 하든지 할 일이다. 하지만,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어렵다가도 쉬어지는 것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진짜 모습이 아닌가?

 

그녀에 대한 서운하면서도 미안한 맘이 얼마동안 어우러져 있었다. 그녀의 편지를 받고 답장도 못해 줬지만, 술기운이라도 오른 날 밤엔, 그녀를 만나러 왜관 삼거리를 가고도 싶었으나, 야간에 부대를 이탈할 수도 없었고, 더욱이 자대 복귀를 하고 난 후에는 그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이 아늑한 일로 흐려져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