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랑 타령

너무도 미안했던 대전의 미스 리

바람거사 2013. 8. 5. 06:54

<"어느 남자의 사랑 이야기"에서>

30여 년 전 공군생활 4년 반을 총 결산하고 군문을 떠나는 7 31일이었다. 기억하고도 싶지 않은 기본군사훈련기간을 거치면서 서서히 관물이 되어 갔고, 중위 진급 후 일 년 후면 중간 정점이 되면서 그때부터 그 허물을 벗고 전역 할 때가 되니 사물이 다된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보니 무척 서운해지는 이유는 뭔가? 미운 정 고운 정 다 할 것 없이 정은 어디까지나 정이었나 보다

 

 그 날 사령부근처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맥주집 아가씨들과도 ‘안녕’을 고해야 할 것 같아 이별주를 마시러 평소에 같이 잘 어울렸던 박 중위와 같이 들렸다. 이제 오늘밤이 지나면, 언제 다시 맘먹고 찾아 올 지도 모를 일이라 저녁회식이 끝나고 9시가 넘어 들렸는데, 그녀는 미니차림으로 뛰어 나오며 호들갑스럽게 여느 때처럼 밤의 애인을 맞아줬다.

 유난히 얼굴엔 여드름이 많이 피었지만, 키도 크고 몸매가 잘 빠져 인기가 좋았던 미스 리는 다른 손님과 같이 있을 때는 양쪽을 번갈아 들락거리다가도 결국은 우리들이 갈 때까지 변함없이, 지난 반년동안 술좌석의 연인이 되어줬었다. 그렇게 자주 가지도 못했어도 합석을 하는 동안은 정겨운 얘기를 많이 나누면서 무척 재미있게 지냈다. 노래방시설이 없던 시절인지라, 노랫말도 깔끔히 외워야했었던 그때, 그녀는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부르는 나의 ‘이별’이나 ‘긴 머리 소녀’를 무척 좋아했었다. 매번 분위기가 무르익어도 나는 막차를 타고 하숙집으로 기어들어 갔다. 때로 잠자리를 같이할 맘도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맘가짐으로 보나 금전적인 면에서도 여유가 별로 없었고, 또 강제로 데리고 나갈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전역을 앞두고 한 동안 자주 들리지도 못하였고, 결코 많지 않는  팁을 건네줘도 항시 반겨줬었는데, 그런 그녀하고도 어쩜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서운한 일 중의 하나였다. 아마 그 당시 정인이 있거나 마누라가 있는 친구들이야 나름대로 기념 파티를 했었겠지만, 홀로 지내던 동기생들은 대전에서의 마지막 하루 밤을 끼리끼리 어울려 그리 지내고, 내일이면 뿔뿔이 헤어져 어디론가 떠나갈 일이었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나는 이미 초저녁부터 마신 술로 거나하게 취했고, 그런 이별이 실감나지 않아 몹시 아쉬워하며 밖으로 나왔다. 다른 때 같으면, ‘김 중위님, 잘 가세요! 또 오세요.’ 했을 그녀인데, 이날은 그녀 스스로 앞장서서 따라 나섰다.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에 하도 의아해서 물었다.

- 아니, 괜찮아?

- 어때요, 내 맘이지요. 마지막 뵙는데 너무 서운하잖아요.

하면서 그녀는 내 왼 팔을 꼭 끼며 머리를 어깨에 기대어 왔다. 그녀의 향수냄새가 전과 달리 그렇게 감미로울 수가 없었다.

 허지만 난처하게도 아침에 택싯값이나 목욕값이라도 있는 대로 다 내주려 했지만, 턱없이 수중에 돈이 부족했기에, 우선 허름한 여인숙엘 들어갔다. 방을 잡고 세면대에 나가서 씻고 나서, 맥주 두 병에 안주를 시킨 후 그녀와의 이별주를 또 마시고, 고물 선풍기가 드르륵 드르륵 힘들게 돌아가는 좁은 방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술이 취하기도 했지만, 여드름이 활짝 핀 얼굴과는 달리, 생고무같이 튀는 몸매에 백옥 같은 속살을 내 보이며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레 보였다. 둘은 이내 한 몸이 되고 말았고, 몰아 지경에 빠져들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빨간 전구 빛에 비추인 그녀의 이마에는 진주 같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헌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입은 흰 속옷이 선혈로 얼룩이 지었는데, 앞쪽은 아예 붉게 염색이 되어 있었다. 완숙한 여인네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난 선혈이기에는 그 양이 많은 것 같았다. 순간 수년 전 아포의 옥란이를 생각했다. 홍순경이 보초 선 게 분명하다고 생각을 하고 잠시 어쩔 바 모르다가, 그녀가 그걸 보고 괜히 민망해 할까봐, 이미 바짝 말라버려 바지에 스며들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추켜 입었다.

잠시 후 그녀도 뒤척이더니 일어났고 조금은 겸연쩍은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잘 잤느냐며 인사를 해주면서 여드름이 만발한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고 꼭 껴안아줬다. 그리고 서로들 옷매무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왔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라면,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는 아녔을 터이었겠지만, 그녀한테 그렇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데도 금전적이나마 보상을 해주지 못했다. 정말 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다 주고픈 맘이었는데, 그나마 전날 다 써 버리고 수중에 갖은 돈이란 500원 짜리 한 장에 버스비 나 될 동전 몇 잎이 달랑거렸다.

 

돈이라도 듬뿍 줬으면 내 맘이 그토록 서운하지 않을 터인데, 그날 아침 아무 말 없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오면서 지난밤과는 달리 내내 묵묵한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도, 같이 해장국이라도 먹고 가자는 청도 못하고,  미안한 맘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500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죄지은 사람모양 움츠려서 건네주며, 택시라도 타고 가라고 얘기를 했다.

- 미안해, 이거밖에 없어서. 조만간 꼭 내려올게. 그 클럽에 오래 동안 있어야 돼―.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이해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 가득했다. 그렇게 내밀 수밖에 없었던 내 손이 너무 부끄러웠으나 아쉽게 손을 흔들며 떨떠름하게 헤어져야만했다.

기회가 주어지면, 꼭 한 번 내려와서 그 날 못해준 걸 수 십 배로 보상해주고 싶은 맘도 들었지만, 그 후로는 바로 H 건설 신입사원 연수교육으로 들어섰고, 교육이 끝나자마자 바로 별 보기 운동을 하는 건설현장으로 파견이 되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모든 걸 세월 속에 묻어버렸다.

가끔 여드름 꽃이 활짝 핀 미스 리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그 때 그 모습으로 눈에 아른거리지만, 500원 짜리 지폐를 건네주던 그 미안했던 내 맘과 그 업소에 오래 있어달라고 부탁한 그 말이 본의 아니게 탈색이 되어버려, 지금도 그 지폐를 내밀던  큰 손을 보기가 미안하기 그지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