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마후라' 영화 속에서 F-86 쎄이버 전투기 얘기가 나온 바람에 오래전, 제 카페에 올려진 글을 다시 꺼내어 손질하였습니다. Zipper 님이나 애틀랜타 선배님은 예전에 보신 적이 있고요. 그러나, 다른 님들을 위해서 이곳에 올려봤습니다.
추억은 안타깝고 또 아름답다는 건 세월이 갈수록 더더욱 느껴집니다. 애틀랜타 선배님 말씀대로 곧 할아비가 될 입장이지만, 맘만은 누구나 젊어서, 아직도 추억을 반추하며 살기에는 이르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대전에 있었던 공군 교육사령부 기술학교 실습장에 교육용으로 세워놓은 F-86 전투기인데, 사진에 찍은 날짜가 1976년도 전역을 한 달 앞둔 6월 28일로 돼있군요. 그로부터 벌써 34년 전이나 되었다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고, 허무하다는 생각만이 앞섭니다. (첫 등록일: 2010년 3월 8일 11시 47분)
우리 졸업생들은 당시 국립 특차인 대학의 특성상, 입학을 할 때부터 공군 무관 후보생 자격으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3학년 때부터는 정기 신체검사 및 체력검사를 받고, 비만, 혈압, 치질 등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또한 체력 단련 운동도 열심하였는데, 항공기계과 정원이 20명 중 태권도 유단자가 반이나 되었다.
72년 2월 말, 대학 졸업식을 하고, 군문에 들어서기까지 한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있어, 당시 J시에서 직장을 다니시던 아버지와 같이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동생들을 만나러 잠시 다녀오고, 3월 초 그 당시 시골 간이역같이 생긴 소사 역에서 눈물이 글썽한 어머니의 환송을 받으며 기동차에 올랐다. 그때 푸레트 홈에서 힘없이 손을 흔드는 어머니의 우울한 모습은 지금도 희미한 흑백의 영상으로 남아있다.
대전 교육사령부의 12주 기본 군사훈련과 8주의 특기교육이 다 끝나갈 무렵, 배속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온 전우끼리 서로 쉬쉬하며 눈치를 보는 일도 생겼다. 특히 우리 과 동기생들은 대부분이 ‘항공기 정비’ 특기이기 때문에, 배속을 받는 대로 간다면, 군기가 시퍼렇게 선 전투비행대대로 배속을 받아, 아침저녁으로 별 보기 운동을 할 처지가 되어, 모두들 은근한 불안감에 사로잡혀있었다.
나도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공군본부나, 항공기 수리창, 교육사령부에 교관요원으로 남아서, 일과 후나 주말에 여유 있는 시간을 유학 준비도 하고 가족들이나 지인들과 더불 어를 지내면 더 할 수없이 좋겠지만, 기댈 ‘백’도 전혀 없는 처지가 되다 보니, 아예 첨부터 다 포기하고 흘러갈 때까지 가겠다는 각오로 지냈다. 장교들의 배속은 우선 원하는 곳을 먼저 선처해줬지만, 모두 다 선호하는 기지로 다 가겠다면, 먼저 상의를 하여 결정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게 잘 안되면, 현재 주거지, 내지는 끗발 순으로 한 두 명만 가게 되고, 나머진 밀리기 마련이었다.
희망 배속지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가 나왔을 때, 나로서도 교육사령부의 교관요원으로 남고 싶었는데, 하필 젤 친한 친구하고 맞서게 되었지만, 그에게 양보를 해줬다. 또 작전 사령부에 가서 배속을 받을 때, 나는 소사에 주거지로 되어있어 십중팔구는 수원기지로 배속을 받으면, 그나마 서울이나 집엘 들리는 게 용이할 것 같았는데, 연고지가 울산인 대학 동창이 망설이며 "야, 나는 연고지대로 간다면 대구로 가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서울에서 살림을 하고 있으니, 좀 봐주면 안 되겠나? " 하는 거였다. 그래서 또 그러라고 하였다. 그런데 방한하여 한 20년만에 그 친구와 더불어 동창을 만났는데, "자기는 운이 좋아서 수원으로 배속 받았다."라고 하길래, 나는 웃으면서 지난 얘길 해줬더니, 대답대신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해서 멀리 대구에 있는 팬텀 대대에 배속이 되었고, 예상대로 일 년 반 동안 뺑뺑이를 치며 지냈다. 얼굴은 검게 타고, 성격도 거칠어졌지만 눈은 빛이 났다. 아포의 고속도로 경비 파견대 근무까지 갔다 오니, 한 동안 술 마시고 노는 데에 고약한 타성이 붙어버렸다. 그 친구 말대로 깡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군생활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남는 추억을 만들었다. '아포의 고향집' 이야기며 '김 중위 니도 필부 인기라!'의 두 주인공도 만났지 않았던가?
그리고 자대 복귀 후에 연말이 되면서 교육사령부의 장교 교육 담당 교관 차출이 있다는 희소식을 접하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전속 명령을 받아내어, 나머지 2년 동안 예하부대의 경험을 토대로 살아있는 정비장교 특기 교육을 하면서 여유 있게 대전생활을 하였다.
인생사는 새옹지마가 아닌가? 평생 같이 할 동기생끼리 서로 다투지 않고 양보나 배려 해준 일이 얼마 동안 나한테 불이익을 가져다줘도, 어차피 군생활을 하는데 여문 각오를 하고 지내다 보면, 보다 더 나은 입지가 생길 거라 믿었다. 무슨 일이든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 첨부터 너무 걱정을 하며 기를 쓰고 아전인수를 할 필요가 없는 큰 교훈을 얻었다. (-)
'이야기 마당 >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풍령과 권 하사 (0) | 2022.09.28 |
---|---|
나운도-남자라는 이유로 (0) | 2022.09.18 |
한국 문학사의 영원한 이야기꾼 박완서 작가 (0) | 2022.05.14 |
♡만나야 할 10 사람♡ (0) | 2022.05.07 |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노년의 인생 (0) | 2022.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