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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당/세상사는 이야기

'漢字 및 한글 혼용'을 최초 고안한 사람?

by 바람거사 2017. 8. 5.


'漢字 및 한글 혼용'을 최초 고안한 사람은 누구?


일본 근대의 아버지 후키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구미 유학후 귀국하여 최초로 대학을 세웠고, 갑신정변이후  “아시아에 우리의 친구는 없다”며 조선을 야만으로 동일시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그의 사상은 정한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며, 그 실천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담당했다.  


  



 

'한글'을 최초로 학교교육에 도입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도록 한 것은, 日本의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였다. 당시 조선은, 왕궁이나 관료 등 일부 지식인이 한문(漢文)으로 읽고 쓰기도 했지만, 일반 민중들은 이것이 불가능하여, 방치되고 있었다. 한글은 15세기에 발명되었지만, 문자(文字)를 독점하던 특권계층의 반대에 막혀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조선의 한글을 재발견(再発見)하여, 기존 日本의 '漢字-가나(仮名,일본어)혼용문'에 착안해, '漢-한글 혼용문'을 고안(考案)한 것은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5~1901)였다.
 
이후,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는 소학교(小学校) 단계에서부터 한글 교육용 교과서를 준비하여, 日本이 한반도에 세운 5200개의 소학교(小学校)에서 한글을 학습하도록 했다.
 日本은 조선인(朝鮮人)으로부터 언어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조선인(朝鮮人)이 자신의 모국어(母国語)를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도록 문자(文字)를 정비(整備)했다. 
 
아울러, 합병 당시, 한국인(조선인) 평균 수명은 24세였는데, 日本통치 기간 중에 2배 이상으로 수명이 늘었고, 인구(人口) 절대수 또한 배증(倍増)했다. 쌀(米) 수확량은 3배(倍)가 되었고, 아사(餓死)가 근절(根絶)되었다. 벌거숭이 산(山)에는 6억(億) 그루의 수목(樹木)이 재배되었고, 100킬로미터였던 철도가 6천킬로미터로 연장되었다.수풍(水豊) 댐은 당시 세계 최대급의 수력발전소였다. 
 
이러한 한반도 지역 발전에 소요된 자금은, 당시 日本정부(日本국민 세금)가 모두 부담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0조 엔(円) 이상의 막대한 자금이 당시 한반도에 투입되었다. 본국(본토)으로부터 이러한 막대한 자금을 끌어다 식민지를 近代化 시킨 케이스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


<거사 주>: 

일본이 이처럼 공들여서 식민지를 근대화했던 이유는 과연 조선을 위해서 이었을까?  당연히 훗날 내선일체를 내세워 한민족의 뿌리를 철저하게 뽑아버리기 위한 전초전이었으며 음흉한 포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