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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슬픈 자화상- [거사 주] 추가

바람거사 2024. 11. 25. 03:35

[거사 주]:  전에도 종종 얘기했지만 거사는 "이씨조선"이 500년 후 망국으로 가는 길을 다져놨다고 얘기하였다. 이성계는 사불가론 (四不可論)을 내세우며, 특히 대국인 명나라(건국: 1366)에 대항하여 요동정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원이 북으로 물러나고 명나라가 요동반도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1388년 5월에 최영 장군은 정벌 주장을 굽히지 않고 대립이 되자, 고려 우왕은 잠시 중재를 하였으나, 결국 요동정벌이 강행되었는데, 최영은 개경에 남아서 부왕인 공민왕이 살해된 걸 본 우왕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장마철에 강이 불어나자 수 백이 익사하고 탈영병도 생기자 진격에 문제점이 많다고 아뢰어도 최영은 진격하라고 하였지만, 이성계는 10여 일 만에 5만여 대군을 이끌고 개경에 쳐들어 와서 궁을 장악하고 최영을 체포하여 유배 보냈다가 6개월 후인 1388년 12월에 처형하고, 1389년 12월에 우왕도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혐의를 받아서  강릉에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창왕에 이어 공양왕 부자도 척살당한 후에 고려는 망했고 3년 후인 1392년 7월에 명나라로부터 정도전이 고심하여 선택한 "회령(이성계의 고향)"과 "조선" 중에서 "조선"을 선택받아서 "이씨조선"이 들어섰다. 훗날 고종은 "조선"이 명으로 부터 선택받은 국호가 "사대주의" 에 의한 거라하여, 1897년에  "대한제국(1897~1910)"으로 국호를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1905년에 을사늑약을 체결했고, 5년후  한일병합(), 또는 경술국치()1910년 (경술년) 8월 29일 월요일에 대한제국이 일본의 일부로 흡수되어 멸망하여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가 된 사건으로 손꼽힌다. 

고려 말엽에 불교 내부의 파문으로 혼란과 불신이 팽배하여 신진사대부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자는 풍조가 생긴 데다, 명나라를 절대적인 표본을 삼았기에 유교 정신의 주축인 성리학으로 건국이념을 삼았다. 그러나 건국초기 이후부터 성리학의 이념은 변질되어서 반상의 차별과 이념파벌로 70%나 되는 민초들의 삶이 피폐되어 결국 망국으로 가는 길만 다져놨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조 말년의 썩은 나라를 만든 왕실에 대한 혐오감으로 왕실후손에게 예우도 갖추지도 않았고 영국이나 일본같이 상징적인 의미로 왕실의 명맥을 유지하지도 않게 하였다. 

<< 한국 근현대사 연구회” 에서 옮긴 글: 인정하긴 싫지만, 부정 못할 우리 민족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온 우리 조상들의 실상을 색다른 각도에서 조감해 보는 " 악랄했던 세계 노예 제도와 한반도 수난의 역사적 고찰"입니다.>>

- 벨기에:

 1,800년대 말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을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벨기에 식민지 시작 전에 2천만 명이었던 콩고 인구가 식민지가 끝날 때 85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전 인구의 60% 이상인 1,250만 명의 인구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벨기에 사람들이 양 손목을 잘라 버렸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굶어 죽었습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콩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을까요? 콩고에서 고무가 많이 났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콩고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서 나무에 흠집을 내고 고무 채취를 시켰습니다.

고무 채취량이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채찍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채찍에 맞기 싫어서 콩고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서 목표했던 고무 채취량을 쉽게 늘렸습니다. 그런데, 고무 채취량이 늘어서 좋기는 한데 벨기에 사람 눈에 숲 속의 고무나무가 마구 잘라 없어져 버려서 조만간 고무 채취량 이 대폭 쪼그라들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무나무를 자르는 콩고인 들의 양 손목을 잘라 버리면서 그 아이들의 손목까지 다 잘랐습니다.


- 영국:

이 세상에서 식민지가 가장 많았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인도에서 목화를 재배하고 전 세계로 제일 많이 수출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인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며 목화를 재배했고, 방적기로 실을 짜고 베틀로 면제품을 만들었지요.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할 때 베를 짜던 기계는 다 부수고 인도 사람들의 양 손목을 다 잘랐습니다. 식민지 때 노예 생활하면서 영국인에게 배운 기술로 면제품 만들어 수출하고 돈을 버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 당시에 면제품은 실크와 양모 외 저렴하고 착용감이 좋은 천은 없었습니다. 면제품은 지금의 반도체처럼 최신기술이고 첨단 산업이었습니다. 하여튼, 1,250만 명을 죽인 벨기에 보다는 너그럽지만 인도인 면직공의 양 손목을 자른 영국도 잔혹하기는 그지없습니다. 식민지착취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착취라고 부를 수 있고, 식민지 사람들 학대하고 잔인하게 죽이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식민지착취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벨기에와 영국이 보여줍니다.

- 일본:

조선에서 착취해 갈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석유 한 방울도 안 나고, 고무도 없고, 식량은 모자라서 굶어 죽는 조선인이 널려 있었습니다. 도박에 알코올 중독에 딸자식을 팔아먹는 일은 다반사였지요. 산이란 산의 나무는 다 패서 난방용 땔감과 밥 할 때의 불쏘시개로 사용했기 때문에 100여 년 전 사진에 조선의 산은 벌건 민둥산이었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기에 비가 오면 나무뿌리가 물을 머금지 못해 홍수가 나고, 산과 언덕의 황토가 하천에 쓸려 와서 강바닥이 높아졌습니다. 조금만 비가 와도 넘쳐서 홍수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굶어 죽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큰 비가 와도 농사를 망쳐 굶어야 했고, 가뭄이 와도 굶어 죽었습니다. 치산치수는 간 곳 없고 오로지 농사지을 때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에서 무식하고, 못난 조선인에게 가난과 굶주림은 피할 수 없는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에 수 억 그루의 나무를 심은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습니다. 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음식물 쓰레기는 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냥 버렸기에 여름이 오면 파리가 들끓고 썩은 냄새가 온 마을에 퍼졌고, 태풍과 장마가 들면 썩은 음식물 국물이 우물로 흘러들어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여 떼죽음을 당하면서 죽었지만, 당시 미개한 한방에는 치료약도 없었고 병들어 죽는 이유도 몰랐습니다. 그냥 "역병이 돌았다"라고였다.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도로는 좁고 포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비만 오면 뻘로 변해 짚신이 푹푹 빠졌지요. 대부분의 길이 좁아서 마차도 못 다니니 가마가 유일한 운행수단이었지 않습니까? 가마는 바퀴가 없으니까 좁은 길도 가능했지요. 조선시대 가마에 바퀴 달려 있는 모습 보셨나요? 착취를 통해 잘 먹어서 무거운 양반을 두 명 내지 네 명이 가마를 손으로 들고 실어날랐습니다. 바퀴가 있으면 편하게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을 알지만 도로는 도로가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와서야 전국적으로 신작로(新作路)가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 당시 중국과 일본엔 손수레에 바퀴를 달고 사람을 실어날랐습니다. 양반 6-10%, 중인 20%, 상놈과 노비가 70%의 인구 구성이었던 조선에는 일자 무식자가 전 인구의 70%를 넘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시한 위대한 세종대왕은 어디로 갔나요?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상놈과 노비에게 가르쳤던 적이 없기에 그들은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양반가의 아녀자가 배운 정도였지요. 양반은 죽어도 천박한 언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거사주: 실학파 정약용도 사소한 집안 일로 식구들과 서신을 주고받을 때도 한문만 사용하였다.]  일본인은 이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에게 공교육을 도입해서 일본어뿐 아니라 한글을 보급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양반만 동네서당에 가서 한자를 배웠지 한글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상놈과 노비는 서당 근처도 가 본 적이 없고요..

조선반도 전역에 국민학교를 만든 일본인들은 안 가겠다는 조선인의 손목을 이끌고 국민학교에 입학시켜서 일본어와 한글, 산수 등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에 초등학교만 지었나요? 중고등학교와 대학도 세웠고 이들에게 영어와 과학도 가르쳤습니다.. 경성대학이 지금의 서울대이지요. 저수지를 만들고, 상하수도를 건설했고,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고, 빌딩을 짓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짓고,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민초 조선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에게 물도 떠주고 밥도 지어주며 적극 협력했습니다. 이씨조선 왕족과 양반의 가렴주구에 진절머리를 냈던 상놈과 노비는 차라리 일본의 지배 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왜군에게 친절했던 조선인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기 전 150년간 조선의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5년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인구는 거의 두 배로 늘었습니다. 저수지와 상하수도의 보급, 치료해 주는 의료와 양반의 착취가 없었기에 질병 예방과 치료하며 저수지 물로 가뭄 걱정 없이 농사지어 먹고살 수 있었고, 아이 낳고 키우면 죽지도 않아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인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지요. 저절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의대를 설립하여 의사를 양성하고 조선인의 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늘려 준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이렇게 투자한 것은 나중에 식민지에서 착취하기 위한 선 투자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조선을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중ㆍ러 대륙으로 들어서기 위한 관문으로써 우리와 합방하여 우리를 일본에 편입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천연자원을 수탈하려는 목적을 위해 식민지 삼고 철도를 건설했다고 보는 지엽적인 해석도 있으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관점입니다.. 일본이 조선에 35년여간 투자한 몇 십억 달러의 자산가치에 비하면 수탈액(주로 광물과 곡물)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으므로 식민지의 목적을 자원수탈로 볼 수가 없지요.

[거사주]: 일본은 창씨개명(創氏改名)이란 일본식으로 '씨(氏)'를 만들고, '이름'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원병 제도, 신사참배(神社參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암송, 조선어 사용 금지와 함께 조선인들에게 강요하여 조선을 말살하여 일본에 흡수하려는 내선일체(内鮮一体)의 흉계. 그런데,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창씨개명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누가 누가 인지 몰라서 조선인을 비하하고 차별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본은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가 지금의 일본이 된 것처럼 조선인을 일본사람 수준으로 올리고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미국에 도전했다가 패망으로 항복하여 미국의 뜻에 따라 한일합방이 깨어져 우리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35년여의 기간 동안 우리가 나라와 주권을 잃은 자존심 손상만큼 아이러니컬하게도 얻은 것도 많습니다. 세계 5대 부국이었던 일본과, 세계에서 가장 못 살았고 무식했던 조선과의 격차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합방하여 일본에 편입시켜서 영토를 확대하고 조선 사람의 수준을 최대한 빨리 끌어올리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벨기에나 영국처럼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35년간 일본의 지배에 거부감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부감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한일합방은 인구 70%인 조선 상놈과 종놈, 노비에게는 축복 중의 축복이었습니다.

고종을 비롯한 조정의 고위관리 들은 일본의 거액 뇌물 로비에 모두 넘어가 나라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들 중 고종이 제일 많은 액수를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미 역사가를 통해 밝혀졌지요. 그런 이유로 조선인 거의 대부분은 조선 독립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1945 8월 15일, 그냥  "일본이 전쟁에서 항복해서 한국에서 떠나나 보다"라고 별 감흥 없이 느낀 백성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서울 시청에 걸렸던 일장기를 한 달 동안 아무도 내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조선의 독립을 바라며 독립자금을 댔던 양반들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상놈과 노비를 착취하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일본 때문에 빼앗긴 그 많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이씨 왕족과 양반은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상놈, 종놈, 노비를 착취하고 조선을 말아먹은 당사자들입니다. 일본 사람이 착취한 것보다 오랜 세월 양반이 착취한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사책에서 이런 내용은 단 한 줄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살기 좋은 조선을 나쁜 일본 놈이 마구 침략하고 빼앗고 죽였다."라고만 해방 후 지금까지 오랜 세월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죠. 받아들이기 싫고, 자존심 상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한일합방은 양반에게는 지독한 불행이었고, 70%의 조선인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성도 없었고 족보도 없었던 상놈과 노비는 글을 배우로 기회도 없었고, 양반이 때리면 맞았고, 강간하면 당했고, 죽이면 죽었습니다.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은 절대 불가였고, 노비종묘법을 만들어 조선에 노비를 가장 많이 양산한 왕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종대왕입니다. 같은 민족인 조선인의 전 인구 40%까지로 노비를 늘렸던 위대한 왕입니다. 천 원짜리 지폐에 새겨진 퇴계 이황은 노비가 3백 명이란 설도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구한말 고종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을 44년 동안 2주에 한 번씩 갈아 치우면서 매관매직으로 수 천 명의 양반을 만들어 냈듯이 양반 족보를 사고팔아 양반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씨 왕족과 양반이 상놈과 노비한테서 단물을 빨고 있는데 스스로 반상(양반상놈) 제도를 없애려고 했겠습니까? 종놈과 노비는 양반의 재산인데 아무 대가 없이 놔줄 것 같나요? 미국도 노예제도 없애는 문제로 남북전쟁까지 일어났잖습니까? 링컨이 전쟁에서 이겨서 해결했지요. 한국인 70%는 상놈이고 종놈 노비였는데 일본사람이 그러한 차별에서 해방시켜 줬으니 이 정도면 역설적으로 일본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도 상당 부분 있지 않을까요?

대만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 사람들 참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일본이 대만에 해 준 것은 한국에 해 준 것의 1/10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대만 사람들은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인에게 감사합니다. 은인의 등에 칼을 꽂고, 배신하는 아이콘이 한국인인 것으로 우리 밖에서 지금 우리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줬고, 6.25에서 피를 흘려 아무 대가 없이 구해줬고, 휴전 후에 철수하려 하니 이승만 대통령이 꼭 붙잡아 한미방위조약으로 지금까지 안보를 지켜주고 있고, 우유도 밀가루도 원조해 줬고, 기술을 가르쳐 줬고, 투자해 줬고, 시장을 열어 수출해서 세계 10대 강국의 부자로 만들어 준 미국을 배신하는 지금의 한국을 보세요. 현 정부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국민들이 반미, 반일을 외칩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배신의 아이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또다시 6.25가 일어나면 이들이 참전해서 목숨 바쳐 도와줄까요? 우선 미국부터 베트콩에 질려 월남전에서 철수하듯 사라질 것입니다.

[거사 주: 2024년에 가스라이팅의 달인/ 범법자가 대권을 다시 거뭐쥐었는데, 지금의 1조 원인 방위비를 9~10조 원으로 올려서 내놓으라 고집하면 한국정부의 대응이 주목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미군철수하고 우리도 핵무장하자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싫은 곳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능력이 안 되기에 못 보는 곳도 공부하며 찾아봐야 합니다. 보고 싶은 곳만 보면서 국뽕에 취해 반일반미하면 진보가 되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고 정확히 보수좌파인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는 거짓말 가득 찬 국사만 배웠고, 국뽕에 취해 일본을 미워하기만 하던 바보였습니다. 나이 들어 역사를 공부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달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을 보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와 영국 정도로 잔혹했다면 식민지 착취를 논할만합니다. 고의였든 우연이었든 일본의 지배는 조선에게 손해보다 이익이 더 많았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세계 2위 선진국 일본인으로 일본 여권으로 일본 시스템에서 정직하게 법을 지키며 사는 편이 독립국 류큐국으로 사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 류큐국으로 산다면 쿠데타에,, 부정부패, 부정선거, 못된 판사와 독재자가 나라를 경영하여 법치가 무너져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한심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 하와이州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도 없이 미개한 하와이 왕국은 하와이를 근대화시켜 주던 제임스 쿡을 죽이고 껍질을 벗겼습니다. 만약 하와이가 지금 독립국이라면 쿠바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라를 만들고 지도자를 뽑아 민주적으로 발전시킬 능력이 없는 원시민족이었습니다..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어 모래가 한 톨도 없던 와이키키 해변에 본토에서 모래를 실어 날라 아름다운 비치도 만들어 전 세계 관광객을 유혹합니다. 하와이 원주민 능력으로 길을 닦고, 호텔, 쇼핑가, 식당, 골프장, 비치, 크루즈 등 관광시설을 갖출 길이 없습니다. 하와이 왕국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왕족이야 풍요롭게 살겠지만, 가렴주구만 당하는 하와이 원주민은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겠지요. 미개한 하와이 원주민은 미국의 교육 의료 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입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미국 여권 들고 미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편이 하와이 왕국 신민으로 사는 것보다 수 백배 수 천배 더 좋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오키나와도, 하와이도, 알래스카도 자유를 잃고 가난과 질병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내가 아는 만큼만 보입니다. 그러기에 거시안목 국제역학적 공부가 필연 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알려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배워야 바보 병신이 되지 않습니다.

북조선을 보십시오. 이 씨 왕족에서 김 씨 왕족으로 일본식민지 전보다 더욱더 기본권도 없는 참혹한 북조선인 것입니다.. 일본이 다 잘했고, 착하고, 좋은 면만 부각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분명히 일본이 조선인에게 잘못을 저지른 부분도 이루 말할 수없이 엄청 많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나쁜 면만 부각하여 역사가 왜곡되고, 자라 나는 아이들이 혐일하는 외눈박이가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곡된 역사 교육 때문에 60/70대 의 우리도 그런 외눈박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면을 다각적으로 보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좀 더 현명해집니다. 종북좌파도 무식한 바보이지만 저와의 큰 차이는, 저는 저 자신의 모자람을 잘 알기에 쉼 없이 공부하지만, 저들은 외골수로 뇌리에 자기합리화하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점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은 지름길은 진실을 찾는 것이지 거짓이 가득 찬 종북과 국뽕이 아닙니다. 토착왜구, 쪽발이라고 비하하지만, 토착빨갱이보다 국가의 위대한 앞날을 위해 현실과 새롭게 미래를 여는 대일관계는 꼭 필요합니다. 현재의 친일은 국가를 害하지 않지만 친북 더 나가 종북좌파는 우리들의 국가를 가난하고 비참한 북조선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들은 정신병의 초기증세입니다. 다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입니다.

* 일본인들이 놓고 간 국내 기업체들*

두산그룹, OB맥주, 하이트맥주, 한화그룹, 해태제과, 동양시멘트, SK그룹, 삼호방직, 신세계백화점, 미도파백화점, LG화학, 쌍용그룹, 동국제강, 삼성화재, 제일제당, 대성그룹, 동양제과, 대한조선공사, 동양방직, 한국생사, 한국주택공사, 벽산그룹, 한국전력, 일신방직, 한진중공업, 대한통운, 한진그룹, 대한해운, 동양화재, 해상보험,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외제약 등.

* 귀속재산 (Vested Property) *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식민지시대에 금전적, 非금전적 손익계산서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가장 으뜸이 바로 귀속재산: Vested Property이다. <귀속재산>이라는. 일본이 조선에 쌓아놓은 재산을 미국이 모두 빼앗아 대한민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준 재산이라는 뜻이다. 한국민 중에서 이 금전적 항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귀속재산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미국과 일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2015 10, 경제학자인 성균관대 이대근 명예교수는 <귀속재산 연구; 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라는>라는 700여 쪽의 저서를 냈다. 그 내용 일부를 요약 발췌한다.

1945년 해방직후, 일본은 그들이 36년 동안 조선 땅에 건설해 놓은 수풍댐, 철도, 도로, 항만, 전기, 광공업, 제조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간접자본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추방당했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운영하던 기업재산과 개인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갔다..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폐까지도 압수했다. 북조선에는 29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 남한에는 23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이 횡재로 굴러왔다. 남한에 쌓인 23억 달러어치의. 이는 당시 남한경제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한마디로 이 귀속자산이 없었다면 당시 한국경제에는 실체가 없었다.


이로부터 만 20년 후인 1965, 박정희 정부가 한일협정을 맺어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3억 달러, 차관으로 2억 달러를 23억 달러. 위의 23억 달러는 3억 달러의 약 8배였다. 이 엄청난 자산을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한국에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씨 조선 518년을 대대로 통치해 온 27명의 왕들이 이룩해 놓은 자산이 무엇이었는가를. 도로를 닦아 놓았는가? 철로를 건설해 놓았는가? 기업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는가? 한글사용을 장려하는 한글 단어장 하나 마련해 놓았는가? 27명의 왕들은 길을 넓게 닦으면 오랑캐가 침입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있던 길도 없앴다. 선조는 임진왜란 내내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만 했다. 27명의 왕들은 노예들의 골만 빼먹었다. 조선왕들이 518년 동안 쌓아 올린 재산은 초가집, 도로 없는 서울, 똥오줌으로 수놓은 소로, 민둥산, 미신, 거짓과 음모를 일삼는 미개인들이 공존하는 가두리 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본은 불과 36년 동안에 조선 땅에 52억 달러어치의 재산을 쌓아 올렸다. 이 엄청난 재산 중 남한지역의 23억 달러를. 미국은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땅도 빼앗아 주었고, 조선인들로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도 빼앗아 주었다. 이 두 가지 구체적 선물에 대해 우리는 미국과 일본 모두에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었다. 이 중요한 사실이 묻혀 왔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한 국민이 되었고, 그 배은망덕의 소치는 순전히 좌파들의 역사왜곡에 있었다.

미군정은 처음, 사유재산을 압류대상에서 제외했다가 다행히도 곧이어 사유재산 까지도 압류했다 (군정법령 제8, 1947.10.6. 제정). 공적-사적 재산 목록이 170,605, 이승만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정은 고생했다. 엄청난 관리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에 인수되지 않고 농림부 등에 등록되어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재산이 121,304건에 이른다. 이 모두를 합한 총재산은 291,909건이었다. 미국은 어느 정도로 일본인을 발가 벗겨 보냈는가? 귀국하는 일본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의 액수를 극도로 제한했다. 민간인은 1,000, 군장교는 500, 사병은 250엔 이상 소지할 수 없었다. 미군은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는 일본인의 주머니를 모두 다 검열했다. 1945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은 47만여 명이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5 11 3일에 작성한 <정보일지> (G-2 Periodic Report) 54호에 의하면 일부의 일본인들이 150엔을 주고 밀항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자료들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에 보관돼 있다. 하지만 밀항선을 타고 탈출한 일본인 숫자가 과연 얼마였겠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미국이 일본인들을 무산계급으로 만들어 겨우 몸만 돌려보냈다는 사실이다. 조선반도에서 이렇게 빈손으로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 들은 전후 일본의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그 많은 주식회사급 기업들 (박정희의 한일협정으로 청구도 할 수 없는)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대부분 그 회사 직원이거나 관련이 있던 조선 사람들에 헐값으로 불하되어 오늘의 대기업들로 성장했다.

오늘의 우리 대기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기업 들이었다. 조선인들이 세운 업체는 ‘상회’라는 이름을 단 개인 가게들이었다. 아래의 사례들은 현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해방 이후 맨땅에 헤딩해서 창조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할 것이다.

'쇼와 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 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은 당시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 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선만주단(鮮滿紬緞)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 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 의 ’京‘를 따서 지은 것이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고,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 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 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 (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 후 ‘삼화제철’로 상호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 삼국석탄, 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 제과와 모리나가 식품’이 해방 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 변경 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 후에 ‘풍국제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전업’이 해방 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고, 제일제당 (현 CJ)이.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 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 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고,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조선화재 해상보험’이 ‘동양화재 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 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쥬가이’ 제약은 서울사무소 관리인에게 불하되어 현 ‘중외제약’이 되었다.

이외에도 내로라하는 한국기업들은 거의가 다 일본인이 설립 운영하던 회사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다. 조선인이 설립 운영하던 큰 기업은 김성수 집안에서 설립한 ‘경성방직’, ‘삼양사’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商會’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화신상회, 개성상회, 경성벽지 등이다. 일본이 팽개치고 나간 회사 들을 조선인들이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란 명목으로 헐값에 인수했다. 그래서 이들 중 일부는 1961 5.16 군사혁명.
일본인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반면 불하받은 사람들은 어떤 ‘횡재’를 했는가? 그래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단계에서 남조선에 두고 간 23억 달러 어치의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했다..

해방 직후 북한을 선점한 소련은 군정을 통해 북한에 건설된 발전소, 공장 등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그것들을 건설하거나 운영해 온 일본인 기술자들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였다. 소련군정은 만주에 주재한 ‘일본피난민단장’과 협의하여 북조선에 있던 모든 기계-설비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일본 기술자들을 북조선에 남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그들이 건설하고 애지중지 운영해 오던 기계-설비들에 대한 엔지니어로서의 애착심에 호소했다고 한다. 그 결과 1946 1월 자로 2,158명의 기술자들을 일본으로의 즉시 귀국을 막고 북조선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남한보다 천연광물이 많아서 6억 달러나. 그래서 북에는 청산 명단이 없다고 한다. 스탈린은 당초 북조선에 있는 설비들을 소련으로 옮기라 명령했고, 소련군정은 중요한 기계들을 분해하여 포장한 후 소련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 직전 다시 스탈린으로부터 반출을 중단하라는 긴급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세간에는 당시 소련이 북조선 기계들을 모두 뜯어 소련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럼 스탈린은 왜 마음을 바꿨을까?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 당시 이미 6.25 전쟁을. 6.25 전쟁을 치르려면 북조선에서 병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자체 생산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 는 기계-설비들이 필요하다 고 판단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 산의 나무도 귀속재산 *

또한 조선의 산은 민둥산이었다. 여기에 일본은 과학의 힘으로 경제성 있는 나무들을 심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산마다 쭉쭉 뻗어 올라간 경제목들이 들어차 있다. 해방 당시 전국의 산에는 일본이 심은 나무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광릉 (수목원)에 보존된 나무들이 바로 일본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전후방에 군부대들이 우후죽순 식으로 들어서면서 ‘후생사업’이라는 것이 활기를 띄었다. 당시는 군대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역대 사단장들이 너도나도 덤벼들어 군 후생을 빙자해 벌목을 했다. 거목들을 베어내 시장에 팔아 자금을 마련해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산이 다시 민둥산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박정희 정부 농림장관 인 장경순 씨가 대통령의 명을 받고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지만 그 나무들은 일정시대의 산림처럼 경제림이 아니었다.

포항제철 사례에서 보듯이 공업 분야에서는 일본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대대적으로 받았지만, 나무를 심는 식수 계획에서는 일본기술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장경순 씨의 이야기로는 수종선택은 토종기술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나마 푸른 산을 푸르게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나무를 대체할 수 있는 땔감의 개발이 필요했다. 1960년대, 1 9공탄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새마을운동으로 산림녹화가 이루어져 세계에 유례없는 인공 산림녹화를 이루어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영조시대인 1750년대에 석탄이 나무를 대체했다. 영국이 한국을 210년 정도 앞서 간 것이다. 이런 부끄러운 격차를 만들어 낸 주역은 조선의 왕들이었다. 일본이 가꾼 초기 산림, 과수, 식량 종자개량, 식량 증산을 위한 저수지 등 관개수로 확장. 비록 금전적으로 환산은 될 수 없지만 어마어마한 자산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도 귀속재산이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