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색의 오솔길

친구란? --- Ep 3

바람거사 2024. 12. 22. 02:19

<1968~2024>

*  2023년 11월 말쯤 나를 찾는다는 메시지가 동아 콘텐츠본부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시카고에 산다는 친구 내자의 교우는 부탁을 받고 시카고에서 수소문하였지만, 교회에 가지 않은 데다 비즈니스도 하지 않고 미국회사에 다녔던 나를 찾을 수 없어서, 지난 4월 말에 내가 낸 책과 인터뷰한 기사를 인터넷 검색으로 알았다면서, 치매초기에 심장판막에 결함이 있어서 시한부 삶을 사는 친구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다고-.

나는 기가 막혔다. 1985년쯤 텍사스로 떠났는데  40년 만에 치매가 생기면서 나를 찾는다는 게 어이없을뿐더러 괘씸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내 맘이 개운치 못하여 여러 차례 영상통화를 하였지만,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잘 나가다가 존댓말을 쓰고 전화번호를 연신 묻고--. 자신이 전화를 걸지 못하니, 그의 처가 대신해줬지만, 딴 세상에 사는 그가 자주 카톡 영상 통화를 하자고 하는데, 그런 대화를 더는 계속하고 싶지 않다.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나? 때가 되면 누구나 고비를 맞게 된다. 주어진 운명이니 그리 살다가 스러지는 게지-. 

1978년, 그가 대전 시내에서 완장 두르고 군기 순찰하는 만규를 우연히 만났는데, 곧 미국에 간다면서 술 한잔 하자고 하였지만, 근무 중에 술 못한다고 하니까, 그럼 사주기만 하라고 하였단다. 만규는 열이 나서 “, 돈 없으면 술 먹지 마라!”라고 하였다. 내가 79년 3월말쯤 시카고에 도착하여 만규가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라는 얘기를 했더니, 씩 웃으며, 만두 새끼 잘 있냐?라고 하였다. 아마 작년에 술 안 사준 게 고까웠던 모양이다.

그는 언제고 목회를 열겠다고 했지만, 술을 즐기며 이런저런 철학적이나 문학적인 얘길 나누는 걸 좋아했다. 경주로 시집간 큰 누이와 한국일보와 산업은행에 다니는 두 형을 둔 막둥이다. 그런데 그는 학창시절에 먹고사는 건 문제가 없었던 거 같은데 이 친구도 용돈이 항시 부족하여, 대부분 얹혀서 마시는 데 도가 터 있었다. 어쩌다 각자가 분배하여 낼 때는 이 호주머니 저 호주머니에서 아주 심하게 구겨진 지폐를 툭 꺼내 놓으며 이것밖에 없다고 변명하였다. 이 친구는 인간의 삶이 어떠하고, 철학 얘기를 즐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대문 사거리에 있었던 순복음 중앙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나도 대학생 모임에서 봄 야유회 간다고 하여 따라간 적이 있었다. 기억이 남는 건 수십 명분의 밥을 큰 가마솥에 지어야 하는데, 모두 다 물을 맞추지 못하여 내가 손등 위에 올라온 물 높이로 맞추기도 어려워서 안친 쌀의 높이의 2배 되게 물을 부어서 기막히게 밥이 잘 되어 호평을 받았다.

친구는 경기 공전을 다니다 말고 검정고시로 대학 문에 들어섰는데 나이도 입학 자격 상한선인 47년생이라 동급생 보다 한두 살이 많았지만, 경쟁률이 10:1이 넘었던 항공대학에 합격한 사람치고 공학적인 학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공군에 가서도 학교 성적순으로 항공기 정비 특기를 받았는데, 두어 명은 다른 특기를 받고 그나마 공군 기술 고등학교에 배속받아서 기술 교관을 하였다. 내가 대구에서 전속 온 후로 대전여고 정문에 가까운 대전여고에 다니는 영미네 집에서 하숙할 때 룸메이트도 하였다가, 동향이면서 다른 과 출신의 대학 동창인데  매사에 매우 깔끔하여 같이 술을 마신 후에도 지갑에서 반듯하게 정리된 지폐를 꺼내는 멋있는 동창과 전역 때까지 룸메이트를 하였다.

그는 내가 종교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걸 잘 알아서 나한테 같이 나가자고 하지 않았지만 대전 지부 UBF(University Bible Fellowship) 모임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여전히 만취하여 하숙집에 들어오는 날이 자잤다. 우리가 같은 방을 쓰고 있던 어느 날, 꿈결에 물이 쏟아지는 꿈을 꾸면서 눈을 떴는데, 창문에 비치는 희미한 불빛에 어렴풋이 보이는 이 친구가 마치 요강에 누는 것처럼 쓰레기통 앞에 무릎을 꿇고 방뇨한 후에 유유히 자리로 들어가는 걸 봤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아무 소리를 낼 수 없어서 책상 옆에 있는 신문지 뭉치로 이부자리 쪽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쓰레기통 주변에 깔고 잤다.

1976년에 전역하고, 나는 선후배가 줄줄이 숨 막히게 얽힌 대한 항공에 입사하는 대신에 응시자가 많아서 시험장소를 서울고등학교에서 경희대학교로 옮겨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필기시험 합격 후에도 두 차례의 면접을 거쳐서 동기생 댓 명은 울산에 소재한 현대 자동차나 현대 중공업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나는 시험성적이 좋았는지, 혼자만 모회사인 현대건설에 입사하였다. 당시 중동 건설 붐에 편승하여 급여가 국내 최고인 현대그룹이 상한가를 기록할 때였다. 언젠가 내가 마침 본사에 마침 있을 때, 친구는 나를 만나러 왔는데 목회 준비를 한다더니 생뚱하게 가톨릭 신학대학에 다닌다고 하였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니, 공부할 게 많은데다 고된 규칙에 맞는 절제된 생활을 견뎌낼 생각이 없어진 거 같고 1학기가 끝나기 전에 대전에 내려가서 전자과 출신인 동창과 더불어 '중도공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중도공고'는 훗날 중경공전으로 바뀌었고 2009년에 '우성공업대학교'로 통폐합되었다.

그리고 그는 UBF 모임에 적극적으로 다니면서 해외파견 선교의 일환으로 먼저 간호사와 짝을 맺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맘에 드는 간호사와 인연을 맺을 뻔하였는데, 결혼 날짜를 잡는 말이 오갈 무렵에 신부 어머니가 꿈에 성녀가 나타나서 이 결혼하면 안 된다고 하여 파혼하였다. 다급해진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자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 지금의 내자와 엮어지면서, 그 당시 미국에서는 간호사부족으로 해외 간호사의 기술 이민이 폭넓게 열려 있어서 배우자 자격으로 편승하여 1978년에 나보다 1년 먼저 시카고로 떠났다. 나도 유학 준비로 TOEFL 시험준비도 했지만, 먼저 최악의 집안 사정을 안정되게 해 놓아야 할 처지라, 혼자 훌쩍 일 년 학비와 생활비를 준비하여 무작정 떠나갈 꿈을 도저히 꿀 수도 없었다.

금전적인 여유 없이 1년 학비만 마련하여 자비로 유학 오면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으로 입에 풀칠은 해도, 학비를 충당 못 하여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불법체류자로 전락하여 암울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학교 때 잘 알지 못하는 타 학과 1년 선배가 아이오와주에 유학 왔다가 내가 시카고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시카고로 급히 옮겨와서 우리한테 학비를 빌려서 등록하였다. 유학생은 Full time 등록을 하도록 규정이 되어있어서 대학에서 교육부에 공식 보고된 후에 한 과목만 남기고 환불하여, 먹고살아야 하니 여러 차례 나눠서 돌려주면서 1년을 버텼는데, 결국 그만두고 영어 소통이 원만하여 영주권자라고 속여서 불법 취업을 하며 지내다가 친척의 소개로 구세주 같은 미국 시민권이 있는 색시와 혼인하고 암울한 터널에서 탈출하였다.

내가 1979년에 시카고에 온 지 며칠이 안 되었는데, 친구는 자기 아파트에서 한잔하자고 하여 따라갔다. 시카고는 오래된 도시고 겨울이 춥고 긴데다 눈도 많이 와서 짙은 갈색의 벽돌로 된 우중충하게 보이는 아파트 건물들이 많다. 100년도 넘은 건물에 들어서서 어두운 계단을 삐걱거리며 이 층엘 들어섰는데, 발 디딜 틈도 없이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첫 딸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저귀며 옷가지가 엉망진창으로 널려있었다. 부엌의 꾀죄죄한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 때가 검게 낀 잔에 도수가 11.5% 인 싸구려 4L Carlo Rossi 포도주를 고난의 행진을 해 온 이민 1년동안의 넉두리를 들으며 마셨다. 그 후로는 수년 동안 자주 들리지 않았는데, 그 대신 주말에 우리 동네에서 테니스 하고 집사람이 준비한 생마늘 곁들인 불고기에 맥주를 푸짐하게 즐겼다. 매번 이 친구는 얼마 만이냐며, 와~소리를 내면서 탄성 하였다. 이 친구도 깔끔하지 않은데, 그의 내자도 역시 마찬가지인 데다, 미국 간호사 자격증을 딸 때까지 얼마 동안의 유효기간이 있어서 주로 병동에서 밤 근무를 주로 한다는 핑계로 집 정리를 전혀 하지 않은 채 그야말로 돼지우리 같은 데서 살고 있었다. 화장실 욕조에는 옷가지며 면 기저귀 따위가 수북하게 잠겨서 있고, 튀긴 물이 바닥에 흘러나와서 굽높은 샌달없이 발을 디딜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돈에 대해서 유난히 집착이 심하여 침대나 가구도 없이 모으기만 하더니, 망치질과 나사 조이는 단순 노동을 하는 공장일을 하면서 손목이 아파서 기름때가 검게 배인 붕대를 손목에 감고 다니면서 한 3년 그렇게 고생하여 모은 돈으로 시카고 남쪽에 있는 Dolton으로 이사간다고 하였다. 그곳은 주로 흑인과 남미에서 온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사는 동네인데, 세탁소를 하게 되었다며 내려간 후엔 2년 동안에 한 번쯤 만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텍사스에 가서 세탁소를 하면서 신학 공부도 한다고 연락이 왔는데, 정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하였지만, 1년이 가고 5, 10, 40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한 10년쯤 지나서 그가 방한하여 몇 동창을 만난 자리에서 무슨 비즈니스를 한다면서 전화번호를 남겼다고 만규가 말했지만, 나는 괘씸하기 짝이 없어서 알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날 마침 미국에서 방한하여 같이 만났던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동창과 멱살을 잡고 싸웠다고 하였다. 그가 지금 목회자 공부도 하고 있다고 하자, 학창 때부터 모두 그가 술 좋아하는 걸 잘 아는지라, “, 니가 목사가 된다면, 씨팔 이 세상에서 목사 안 될 놈 하나도 없겠다!”라고 한 말이 발단이었다.

나를 찾나낸 그분한테 이메일로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하였고 답장이 왔는데, 그녀는 목회자 공부를 하는 분이 과음만 하고 집안 일이나 식솔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면서 안타까워하였다. 친구는 아들을 바라봤지만 딸만 셋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모두 40이 훌쩍 넘었는데, 둘째만 출가하여 타주에서 살지만, 첫째와 막내는 결혼하지 않았다. 셋째는 세탁소 바로 옆에 옷가지를 수선하는 비지니스를 하고 있는데, 역시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날까 두려워서 결혼을 포기했다고 흐느끼면서 하소연했다고 훗날 그와 친하게 지냈던 동창이 전해줬다.

그리고 그와 영상통화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그의 내자와 통화를 하였더니, 심장판막에 결함이 생겼는데 치명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수술하게 되면  전신 마취를 오래해야되는데, 치매가 심화될걸 우려하여 수술하지 않고 그냥 지낸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학교때부터 같이 술을 많이 마셨다죠? 라고 안타깝게 물었다.

이제는 내가 어찌하랴. 내 맘이 착잡하고 아리다. 이제 우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박모(薄暮)진 황혼의 길에 들어섰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 전에 언제까지나 사실 것 같은 어머니의 웃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우리 운명도 그리 될 줄 어찌 알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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