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여름이나 초가을이었는데, 나는 사귀는 이가 없을 때라 대전 교육사령부로 전속 오기 전에는 가끔 이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언젠가 친구는 사귄다는 한 여인네를 데리고 나와서 인사를 하였다. 대전에는 한국조폐공사가 있어서 수많은 여공이 근무하고 있었고, 게다가 육군 통신학교와 공군 교육사가 있어서 뜨내기 군인과 그곳 아가씨 사이에 희로애락의 애정사가 끝이 없었다. 이 친구가 인사시킨 아가씨도 조폐공사에서 일한다고 하였다. 둘은 매우 다정하게 보였고 결혼까지 할 거라고 하였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강추위가 몰아치는 2월 초에 내가 전속 오게 되어 하루 저녁을 그 친구의 자취 집에서 머물고 있는데, 그 여자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하고 같이 가서 상의할 게 있다며 그는 매우 초조하게 말했다. 그 친구는 그녀가 아마 칼을 가지고 있을 거라며 잔뜩 겁을 먹고, 만난다는 자체를 두려워했지만, 대화 도중에 세게 몰아붙이면서 막말을 하여 더는 대화가 안 된다고 하였다. 친구는 그날 주인집 전화로 그녀를 다방에서 만나는 약속을 했다면서, 조치원에서 온다는 그녀를 같이 만나서 임신중절을 설득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친구는 역시 얘기도중에 여전히 큰소리로 막말만 하고 나와버렸고 우리는 자취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내일 사령부에서 전입신고를 해야 할 터라 좀 일찍 잠을 자고 있는데, 길옆으로 난 작은 격자창 밖에서 “김 대위, 얘기 좀 하자. 왜, 나 만나는 게 겁나냐? ”라고 구시렁거리는 소릴 들었다. 친구도 잠결에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나보고 나가서 설득 좀 하라고 하여 매우 추운 밖으로 나가서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녀는 매번 조용히 얘기하자는데, 무조건 소리 지르며,, 도둑년이라고 몰아붙여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친구 얘기로는 그녀가 가끔 자취 집에 들렀는데, 주인집 안방에 들어가서 임신한 탓이라고 변명했다지만, 귀중품에 손댔다는 거였다. 그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게다. 그리고 알아보니, 그 정도면 반반한 미모에 체구도 큰 편이라 뭇 남성에게 호감을 줄 수 있어서 남자관계가 좀 있었다는 거였다. 하여튼, 그녀는 나하고는 얘기가 안 되니 연신 그 친구를 불러댔다. 한참을 그러고 나니, 너무 추워서 그녀를 방으로 데려왔다. 친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녀의 반대편에 누워버리고 내가 중간에 끼여서 벽에 기대어 몇 마디하고 지금은 얘기가 통하지 않으니, 눈 좀 붙이고 다음에 얘기하자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 그녀는 자리를 떴고, 간단한 아침을 먹으며, 친구가 얘기하였다. 오늘 퇴근하고 같이 중절 수술을 받게 설득하자고 하였는데, 나는 그 자취집에서 나와서 뒤꼍에 흐르는 지천 위의 다리를 건너면서 좀 늦게 출근하는 그 친구를 보고, 한 마디 던졌다. “ 야, 이건 인간적인 면에서도 이러면 안 되는 거 같다. 니가 좋아서 저질러 놓은 일이니까, 니가 해결하라-. 친구로서 같이 해결할 사안이 아니다.”
그녀는 불화가 생긴 후로 부대 면회소에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으니까, 교관 실장 관사에 연락하여 맘씨 좋은 신 대위를 만나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기도 했지만, 당사자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 소문만 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훗날, 나이가 지긋한 주인집 아저씨의 도움을 받고 그녀는 중절수술을 받았다는 얘길 알았다. 하여튼, 우리는 1년 넘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도 서로 피했다. 그러다가 유성 온천에 있는 공군 장병휴게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어, 같이 막걸리 몇 잔을 마시면서 다시 얘기를 하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앙금은 다 가시지 않았다. 한때 그리 좋아하는 여인이 도둑년이고 화냥년 이라며 찢어지려고 그리 험하게 처신한 그를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지금의 내자는 어찌 만났는지도 모른다. 그가 대전에서 치른 결혼식에 나는 은사이신 고 김 학장을 모시고 대전에 내려가서 처음 만나봤다. 서천에서 아주 잘 사는 집안 장녀로 결혼 후에 새로 지은 한식집도 마련해 줬고, 우리 내외가 결혼 후 한 달이 채 못된 10월에 먼저 출국해야 하는 집사람과 같이 동학사에 들렀다가 대전에 와서 그 친구 집에서 한잔하며 하루 저녁을 묵었다. 집사람은 그날 저녁에 우리는 언제 이렇게 안정되게 살까? 하며 흐느껴서 내 맘이 매우 아팠다. 그때가 그의 큰딸이 한 살이 채 안 되었던 1978년이었다. 그는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야 내자한테 존댓말을 쓴다고 했다지만, 예전에는 "야, 야, 너-" 하면서 거칠 게 대했고 또 애들 훈육을 과하게 몰아세운 후유증에 두 딸은 이제 40 중반을 넘고 막둥이가 40이 넘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두 딸은 그런 아버지에 질려서 남자에 대한 혐오증세가 생겼고, 첫째는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날까 봐 결혼 못 한다고 하였다. 텍사스에 사는 상호의 막내딸도 울면서 그리 얘기했단다. 둘째는 대학 졸업하고 NYC로 유학하여 미술치료 상담사가 되어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국에서 독신으로 산다. 그리고 막둥이 아들을 뒤늦게 텍사스에 조기유학을 보냈는데, 정규대학 편입 준비를 하면서 우리 아들한테 경영 전공에 대한 얘기도 물어봤지만, 신체검사 통지가 나와서 귀국한 후로 사회복무로 병역을 끝냈는데 다시 미국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 아들은 아빠가 하도 공부하라고 몰아붙이니까, 나중에는 “아빠가 없으면 좋겠다.”라고도 하였단다.
그는 친구로서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공군 기술학교 교관 배속 문제 이후로, 수 십년만에 모교 강사 자리 한번 알아봐 달라고 하였더니, 빗 말이라도 그냥 알아보겠다고 하면 될 일인데, 그는 학사 학위만 가지고 대학으로 옮겨갔는데도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며 “안돼!” 가 먼저 나왔다. 나를 경쟁자로 본 게다. 그리고 중앙일보 인물 자료에 나는 그를 친구로 썼지만, 그는 나 대신 전문대학에서 같이 근무한 동료의 이름이 올라온 걸 보고 실망하였다.
내가 90년도 초부터 IMF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중소기업 기술 자문으로 매년 방한할 때, 그의 인천 아파트에 두 번 정도 들렸다. 한 번은 같은 동에 사는 광주 일고 출신으로 2년 후배인 윤 아무개가 술에 취해서 자기 아파트에 가기 전에 갑자기 노크하며 들렸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내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만, 자리에 앉자마자, “선배님, 참 대단하십니다. 속초고등학교가 어디에 있죠?"라고 시비조로 말하자, 만규는 당황하여, 많이 취했으니 집에 가라고 하였다. 그의 내자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 무렵에 그는 아들이 없었던 항공대학교 학장을 친자식 이상으로 아주 열심히 보살펴서 석박사 학위도 없이 전문대학에서 4년제 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런 특혜는 그 후로도 전혀 상상도 못 할 일이라 당연히 주변에서 시샘과 불만이 많았고, 모교에서는 후배 교수들도 극구반대했지만, 학장의 명을 거슬리지는 못했다.
나는 그래도 상위권에 드는 미국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끝내고 박사과정 과목도 다 끝낸 입장인데, 친구는 본인이 학사 소지자인데도 정규 대학으로 옮겨 간 사실을 뒤로하고 나의 부탁을 그리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친구는 석박사 과정을 시답지 않은 대학교에서 출석하는 둥 마는 둥하며 끝냈다. 그때 나는 강사자리라도 얻으면 교직에 있으면서 최종 학위는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고 또 한국생활이 좋다는 어머니도 모시려고 하였기에 너무 서운하였다. 그는 본인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일엔 솔선수범하지만, 자신의 이윤이 걸린 영역에 가까워지면 그리 매몰차게 친구고 뭐고 없이 거절하였다.
작년에도 올해도 이 친구 부부와 같이 식사도 하였지만, 그는 기독교에 더 심취되어 장로로 은퇴했고, 이제 모든 일은 주님의 뜻으로 간주하며 지내는데, 그의 내자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거 같다. 술도 10년 전쯤 끊었다고 하여 올해 만났을 때는 한 잔도 같이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90년대 교직에 있을 때 당시 투자 과열이 성했는데 광명에 투자한 땅이 30년도 더 되었지만, 아직도 그린벨트에 묶여있어서 교직 은퇴 후에도 농장일을 멈출 수 없다. 그런데 만인이 우려하는 은퇴 후의 사업 후에 퇴직금 다 털어서 벌린 '인공 관절'에 특수한 재질을 사용한다는 비즈니스를 한다며, 서울에 비싼 사무실도 차리고, 특허나 해외 세미나로 수입 없는 고액 경비를 쓰고 매우 바쁘게 지냈지만, 결국, 몇 년 후에 퇴직금도 다 날렸고, 빚으로 쳐진 대출금만 남기고 비즈니스를 접었다. 나는 그 일을 크게 벌이기 전에 잘 생각해서 하라고 얘기도 했지만, 주변 업자들 꼬임에 이미 말려들어서 나중에 잘 되면 나의 조언도 필요하게 되면 알려준다고 했는데 결국 접어버렸다. 은퇴 후까지도 그의 과욕이 그렇게 만들어 놨다. 누구든지 어떤 일에 심하게 몰두하게 되면, 그 일이 대단한 걸로 착각하면서 남의 의견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절친이라도 오래 헤어져서 간간히 안부나 묻는 이메일만 주고 받다보면, 생활환경도 달라지면서 각자의 가치관도 변하고 또 나름대로 굳어져버린다. 요새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찹찹하다. 그는 이제 종교적인 삶에 더 집착하여 나와는 안부를 묻는 그 이상의 대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풋풋했던 1968년 여름 방학 전 학기말고사 준비 때 대화가 통하여 친구가 되었는데, 반세기가 지나고 황혼에 이르러서 가는 길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
[P.S]: 2014년이면 10년전이다. 이런저런 실망한 맘에 한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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