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2024>
* 1968년에 모교 도서관에서 정비공학과 신입생 인사를 하면서 각자 소개를 할 때, 내가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는데, 누가 내 옆에 다가와서 “너도 전고 나왔냐? 나도 전고 나왔어-” 하여 동문이라는 걸 알게 되어 친하게 지냈지만, 민수는 먹고살기 바쁜 나보다 상호나 몇 친구와 더불어 술도 자주 마시면서 친하게 지냈다. 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일과 후에 같이 어울려서 술을 마신 적이 별로 없었다. 언젠가 같이 술좌석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자유 분망한 남녀 관계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더니 민수는 “얘 좀 봐! 매우 Classic 허네!”-. 그의 아버지는 삼례(예전 이리)에서 고등학교 선생을 하였고 또 어머니도 왜정 때 고등학교를 나온 지식인이어서 그런지 집안이 자유 분망하여서 5남매가 서구식으로 본인들이 하고픈 대로 지내는 거 같았다. 민수는 위로 누이가 둘이고 손아래로 누이가 둘이나 되어서 당시에는 3대 독자로 군 면제가 되었는데, 미국에 있는 NIT라는 항공계통의 대학에 연수 갈 기회가 생겨서 준비하던 중에 병역법이 바뀌어, 방위근무를 하게 되어 포기하고, 후에 광양 제철소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90년대 초에 내가 중소기업 시술 자문으로 IMF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5년 동안 매년 방한하였을 때, 만나지는 못했어도 전화는 종종 하였다.
민수는 아마도 2000년 초까지 수십 년 동안 텍사스에 사는 상호하고 소통하면서 자주 부탁한 철학책도 보내주면서 여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민수는 그의 아들의 게임 분야에 관련된 진로문제로 상의하려고 텍사스에 가서 상호를 만나보니 주류사회에는 전혀 관련 없이 세탁소를 하고 있는데, 목사 되겠다는 생각은 접었는지 과음하면서 성경책 대신에 철학책에만 몰두하면서, 내자와 딸이 일하는데도 혼자 workout 간다고 나가버리는 등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걸 봤다. 상호의 내자와 막내딸은 눈물이 글썽하여 그런 상호를 원망하며 호소했다는데, 민수는 이런 싸가지 없는 친구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며 귀국 후에 절교했고 그 후로 15년이나 지나면서 전혀 소통 없이 지냈다고 하였다. 상호는 무려 40년이나 지나서 치매가 온 후에 민수와 소통을 하지 못한 탓인지 몰라도, 내가 학교 때 젤 친하게 지냈다며 나를 찾는다는 게 더 괘씸하였다.
그리고 민수도 작년에 담낭/담도/간의 8부를 절제하는 큰 수술받으면서 장시간 전신 마취를 받은 탓인지, 정신 상태가 조금 저하된 거 같다. 아무리 15년도 넘게 절교를 했다지만, 상호의 심장판막 결핍 증세와 치매 상태를 바로 앞에서 얘기해 줬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을 지어서 매우 놀랐다. 그런 상호의 상태를 작년에 이어서 올해 만나서 상태가 더 심해진 거 같다고 얘길 했는데도 놀랍게도 역시 아무런 말하지 않았다.
올해 만나서는 그동안 알고 싶었던 얘길 슬그머니 호젓한 곳에서 물었다. 1972년 공군 후보생 훈련 때 첫 외출 나가서 상호와 같이 민수를 만났는데, 민수는 전해줄 말이 있다면서, 웃으면서 “야 봐라-. 나한테 신고도 없이 우리 동네 처자를 알고 지냈네? 우리 막내 여동생한테 그 처자가 전해 달라는 부탁의 말을 그대로 전한다면서 "꼭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1969년 신촌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할 때, 친척과 같이 온 물감통을 든 미대생인 그녀의 미모에 첫 눈에 반했는데, 가장 힘들었던 대학 3학년 2학기 때 유학도 간다는 놈이 강의도 여러 차례 빼먹고, 또 기말시험도 망치며 꼭 사귀고 싶을 때는 그리도 냉정하게 대하였다. 나는 민수의 얘길 듣고 비시시 웃으면서, ‘잘 알았다.”라고 전해달라고 했지만, 그 당시 사귀는 사람도 없었는데도 리즈 테일러의 옆모습과 닮은 그녀와 헤어지는 게 참으로 아쉽지만,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전에 내가 알고 지냈던 J 의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불꽃이고 여자는 오븐이다.” 데워지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던 모양이다.
1972년에 졸업하고 조만간 입대할 즈음, 전주에 가서 둘째 여동생하고 철 지난 외화를 저렴하게 보러 가는 길에 시외버스 정류장 근처에 갔을 때, 앞서가는 두 남녀 뒤를 무심코 쳐다보다가, 여동생한테 그 여인의 뒤태가 예전에 내가 알 던 사람과 똑같다고 얘기하면서 그들 옆으로 지나면서 흘깃 보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우연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야, 맞네! 바로 그 사람이야! ”라고 하였더니, 여동생은 뒤를 흠칫 돌아보더니 정말로 미인이다고 하였다. 나는 그냥 가려다가 그래도 뒤돌아서서 인사나 하겠다며,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좀 수그리며 인사하였다. 갑자기 몸을 돌려서 아는 체하자, 같이 온 남성은 잠시 주춤하더니 터미널에 가서 출발시각을 알아보겠다며 총총히 앞서갔고, 그녀는 붉게 상기된 얼굴에 멋쩍게 웃음을 띠며 매우 놀라워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마구 해댔다. “지금 부안 여자 중고등학교에 부임받아서 저기 저분하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는 중이었어요!”라고. 나는 “아, 그러시는군요. 객지에서 근무 잘하시고요-”라며 그리 짧게 얘기하고 돌아섰다. 아마도 이런 해후가 있고 나서 그래도 내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대학 4학년 2학기가 시작하고 가을이 깊어질 무렵, 민수는 나를 데리고 그가 하숙하는 집으로 데려가더니 가을에 입을 만한 긴 팔 셔츠를 몇 벌 보여주며 골라 입으라고 하였다. 나는 좀 쑥스러웠지만, 적갈색에 검은 줄이 난 걸 골랐고, 경회루에서 앨범에 올릴 대여섯 명으로 나눈 그룹 사진을 찍을 때 그 걸 입은 흑백 사진이 남아있다. 민수는 초가을이 지나고 서늘해지는데도 똑같은 얇은 셔츠를 입고 다니는 게 눈에 거슬렸나 보다. 그런데 반세기도 넘게 지나서 그때 참 고마웠다고 얘기며 그 미술선생, 장 아무개에 대한 후일담이 궁금하여 물었는데, 그는 황당하게도 모두 다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상호의 처지에 만규만 맘이 아프다고 하였지만, 내가 그 친구의 처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카톡에 올려서 연락해 보라고 했는데, 잘못 알아들었는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 하였다. 정신없는 놈한테 연락해 보라고 한 걸 잘 못 들은 거 같았지만, 더는 의미가 없는 거 같아서 그만뒀다. 그리고 우리 과 그룹 카톡에 그의 처지를 올렸는데도 다른 동기생들은 아무런 답글이 없었고, 상호와 같이 검정고시 출신으로 대학 모임에서 자주 만났을 호주 시드니 근교에 사는 희철도 그저 소식 줘서 고맙다고만 하였다.
올해 우리가 완도에서 전복으로 유명한 해물집에서 전복 한 상자를 택배로 민수한테 보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얘기가 없어서 내가 잘 받아봤느냐고 카톡으로 물었더니, 그제야 생각난 듯 맛있게 잘 먹었고, 집사람이 고맙다고도 하였다는 얘길 뒤늦게 하였다. 정상이 아니다-.
황혼길에 접어든 우리 세대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느 정신과 의사는 가족이나 절친 아니면 장례식 같은 심적인 타격을 받는 행사에 안 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하였다. 한국의 장례문화도 예전과는 다르다. 요샌 병원에서 여러 장례식을 치르는 방을 마련하고 영정 사진과 흰 국화만 놓여있고, 간단한 식사와 음료수를 제공하지만, 예전엔 염한 시신을 입관하여 봉하고 천과 띠로 묶어서 병풍 뒤에 안치했다. 장인어른은 철도 공무원으로 은퇴 후에 고된 방앗간 일을 하면서 또 미국에 그동안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한다며 돈 벌러 간 큰 딸을 그리워하며 매일 소주를 마셨는데, 일꾼과 같이 축을 고치다가 추락하여 하필 머리를 크게 다쳐서 대전과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도 하였지만 병원에서 임종하셨다. 울산 공사현장에서 "부친 사망, 급래"라는 전보를 받고 놀랬으나 발신주소를 보니 집사람의 주소였다. 울산에서 세 번씩이나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영동까지 오는 데 한나절이 걸려서 초 저녁 무렵에 왔는데, 집으로 모신 후로 이미 입관하여 안치된 후였다. 나는 재배하고 관을 쓰다듬으면서 “당신의 염원이 뭔지 잘 압니다. 꼭 따님하고 혼인할 터이니 염려 놓으시고 편히 가십시오.”라고 중얼거리며 맹세하였다.
미국에서는 추모 기간에 Open Casket을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런 장례식에 참석하였지만, 이제는 장례식에 가도, 망자의 화장한 얼굴과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상에서의 마지막으로 망자의 얼굴을 보고 오랫동안 기억하는 게 싫어진다. 내 바깥사돈은 아이리쉬 이민 후손으로, 본인의 변호사 사무실에 일흔도 넘어서 스쿠터로 출퇴근하였다. 그런데 2017년 12월에 비가 내렸던 집 앞 100m 남짓한 곳에서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헬멧을 썼겠지만, 끈을 매지 않았는지,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앨라배마의 버밍햄 근교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부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화장하여 예쁜 병에 모셨고, 생전의 웃는 사진을 그 앞에 놔뒀는데, 그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지금도 맘속에 남아있다. 그날 우리 아들은 “Ashokan Farewell”의 구슬픈 멜로디를 비올라로 추모 연주를 하였는데, 모두 흐느꼈다.(完)
'이야기 마당 > 사색의 오솔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란? --- Ep 3 (0) | 2024.12.22 |
---|---|
친구란? --- Ep 2B (2) | 2024.12.21 |
친구란? --- Ep 2A (6) | 2024.12.17 |
친구란? --- Ep1 (4) | 2024.12.12 |
정약용이 말한 친구란? (1) | 2024.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