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색의 오솔길

친구란? --- Ep 2A

바람거사 2024. 12. 17. 05:59

[대구 전투비행단에서 1972년 10월부터 근 1년반 혹독한 현장근무하고 1974년 2월에 대전 교육사령부 기술학교로 전속와서 1976년 7월말에 전역할 때까지 공군 및 해군 정비 장교, 공군 ROTC 장교와 사관 출신으로 조종 훈련중에 도태되어 정비 특기로 전환한 장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1973년 색색의 코스모스 만발한 초가을, 아포 비상활주로 파견대장 근무중/1973년 여름, 대전에 들렸다가 친구와 같이 심천애서]

<1968~ 2024>

* 19681학년 1학기 말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에 잠시 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 통하여 친구가 되었다. 속초에서 북으로 가면 토성면 아야진의 작은 포구가 보이는 어촌에서 덕장관리를 하면서 오징어와 명태 말리는 일을 하고, 그의 형은 건어물을 종로와 을지로 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에 거래하려고 가끔 서울에 들렀다. 나도 한 번 따라가서 그 형님이 사준 맛있는 짜장면도 오랜만에 먹어봤다. 그리고 그 친구는 형이 없는 내가 부럽게도 형이 사준 소형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큰 배터리를 뒤에 묶고서 소중히 가지고 다녔다. 그 형은 훗날 주변 사람들한테 만규 학비 대주니라고 힘들었다고 하였다는데, 만규도 자기도 방학 때 내려가서 학비 벌려고 아르바이트도 했다면서 낯을 붉혔다.

그는 속초고등학교에서 제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당시 경쟁률이 제일 센 서울공대 화공과에 응시하려고 했다가 서울공대에 합격한 전례가 없어서 만약에 낙방하면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될 걸 우려하여, 나처럼 학비가 면제된 국립특차인 항공대학으로 선회하였다. 이런 그의 삶과 나의 어려웠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악몽이 공통분모가 되어 의기투합하였고 종종 막걸리도 마시면서 많은 얘길 나누고 억수로 친하게 붙어 다녔다.

졸업생들은 당시 국립특차인 대학의 특성상, 입학할 때부터 공군 무관 후보생 자격으로 서약하였고, 3학년 때부터는 정기 신체검사 및 체력검사를 받고, 비만, 혈압, 치질 등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또한, 체력단련도 열심히 하였는데, 항공기계과 정원이 20명 중 태권도 유단자가 반이나 되었었다. 19722월 말, 대학졸업식을 하고, 군문에 들어서기까지 한 일주일 정도의 여유가 있어, 당시 전주에서 직장을 다니시던 아버지와 같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을 만나러 잠시 다녀오고, 3월 초 그 당시 시골 간이역같이 생긴 소사역에서 눈물이 글썽한 어머니한테, “전장에 나가는 것도 아니니, 훈련 잘 받고 오겠습니다. 그동안에 걱정하지 마시고 또 너무 무리하시지 말고 잘 지내세요.”하고, 눈시울이 붉어진 어머니의 환송을 받으며 디젤 기관차에 올랐다. 푸레트 홈에서 힘없이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의 우울한 모습은 지금도 희미한 흑백의 영상으로 남아있다.

매서운 찬 바람이 불었던 3월초에 입교하여 대전 교육사령부의 12주 기본 군사훈련과 8주의 특기 교육이 다 끝나갈 무렵, 배속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전우끼리 서로 쉬쉬하며 눈치를 보았다. 특히 우리 과 동창들은 대부분 항공기 정비특기를 받았기 때문에, '빽'없이 배속받는 대로 간다면, 군기가 시퍼렇게 선 전투비행대대에서 아침저녁으로 별 보기 운동을 할 거라며 모두 은근한 불안감에 사로잡혀있었다. 훗날, 삭막한 대전 교육사령부에서 혹독한 훈련을 겪은 장사병들은 하나같이 "대전쪽으로 향하여 소변도 안 눈다!" 는 말이 실감날 일이었다.

나도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공군본부나, 항공기 수리창, 교육사령부에 교관 요원으로 남아서, 일과 후나 주말에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유학 준비도하고 가족들이나 지인들과 더불어 지내면 더없이 좋겠지만, 기댈 도 전혀 없는 처지가 되다 보니, 아예 처음부터 다 포기하고 흘러갈 때까지 가겠다는 각오로 지냈다. 장교들의 배속은 우선 원하는 곳을 먼저 선처해 줬지만, 모두 다 선호하는 기지로 몰리면서 맞서면, 먼저 상의하여 결정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게 잘 안되면, 일부는 빽을 써서 가고픈 대로 배속받고, 나머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처음에는 나도 교육사령부의 교관으로 남고 싶었다. 그러나 하필 젤 친한 친구와 맞서게 되었는데, 이 친구는 먼저 이렇게 말을 하였다. " , TO가 하나밖에 없으면, 내가 남으마! 나는 너희들보다 2년은 더 해야 하니까, 예하 부대에서 뺑뺑이 치면 내 인생 종 치는 거 아니냐?"라고 하였다. 그 친구는 코언저리가 살짝 얽었기에 신체검사에서 2년 추가 근무를 하는 조건으로 장교임용을 허락받은 처지였다. 하지만, 누구든지 뺑뺑이 치는 걸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배려있는 녀석이라면, "너도 교관 요원으로 남고 싶지? 나는 그런 사정이 있으니, 니가 양보하면 안 되겠니?"라고 하였다면,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어쩔 도리없이 양보해 줬다.

그리고 12주 군사훈련에 8주 기본 특기 교육을 마치고 197281일에 영광의 소위 임관 후에 항공기 정비 특기자들은 추가로 8주 특기 교육을 이수하고, 예하 부대에 배속될 소위들은 작전 사령부에 가서 배속을 정한다. 서로 가고자 하는 배속 지가 원만하게 타협이 안 되면 현재의 연고지에 가까운 부대로 배속되는데, 나는 당시 소사에 주거지로 되어있어서 수원기지로 가게 될 처지였다. 그런데 연고지가 울산인 대학 동창이 심각하게 다가와서 ", 나는 아마도 대구기지로 가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학교 때부터 서울 살림을 하고 있으니, 좀 봐주면 안 되겠나? " 하는 거였다. 그래서 또 그러라고 하였다. 그런데 1976년 전역한 후로 15년이 지난 1990년도 초에 이 친구는 그동안에 재산이 불어나서 그 당시 유행하였던 슈퍼마켓을 아래층에서 하고 2층에서는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다. 만규와 같이 술좌석에서 옛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자기는 운이 좋아서 군 생활도 수원에서 하게 되었다고 하길래, 내가 그때 그 친구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고 나는 대구로 내려갔다고 하였더니, 안색이 좀 굳어지면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한테 부탁한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멀리 대구에 있는 팬텀 대대에 배속이 되었고, 예상대로 일 년 반 동안 뺑뺑이 치며 지냈다. 얼굴은 검게 타고, 성격도 거칠어졌지만, 눈은 빛이 났다. 경상북도 아포 고속도로 비상활주로 경비 파견대 근무까지 갔다가 오니, 술도 더 잘 마시고 놀기 좋아하고 아주 거칠어져 버렸다. 그 친구 말대로 깡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군 생활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남는 추억을 만들었다. '아포의 고향집'이며' 이며 '김 중위 니도 필부인 기라“의 두 여주인공도 만났지 않았던가? 자대 복귀 후에 겨울이 되면서 대전 교육사령부에 장교교육 담당 교관 차출이 있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나머지 2년 반을, 예하 부대의 경험을 토대로 살아있는 특기 교육을 하면서 여유 있게 대전에서 보내게 되었다.

세상사는 새옹지마가 아닌가? 지금 당장은 좀 돌아가도, 동기생끼리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고 양보나 배려를 해주는 일이 얼마 동안 불이익을 가져다줘도, 어차피 군 생활을 하는데 고난을 감수한다는 여문 각오를 하고 지내다 보면, 더 나은 입지가 생길 거라 믿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처음부터 걱정하고, 또 자기 잇속만을 챙기려고 안달할 필요가 없는 큰 교훈을 얻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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