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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무정'- 거사 수필(2021)

바람거사 2021. 8. 18. 08:04

 

 

    1. 그녀를 품을 수는 없는 거야. 

 

   

     미국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린 후로 무려 17년이나 지난 1993년 4월 6일은 식목일 다음날이라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96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훌쩍 떠난 후, 고향이라고 내려와도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며 쫓기듯이 서울로 올라 가버리곤 했었다. 대학시절을 아르바이트인지 뭔지에 얽매여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그때부터 서서히 변해 가는 고향을 대하였고, 뭐랄까, 점점 작아져 보인다는 생각과 더불어서 말이다. 모처럼 내려오면 동생들과 산엘 가거나 영화구경을 갔고, 간혹 상걸이나 창원이를 만나서 저녁나절 술이나 마시고 헤어지는 정도였다. 

                대학을 나와 공군에 입대를 했다. 훈련기간 중에 특박이 있어서 군 동료와 더불어 안개가 자욱이 낀 완산칠봉을 거쳐서 시내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 서중학교 근처 목로주점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에 푸짐한 안주를 본 그 친구의 감탄을 기억하다가, 서울에서의 김치 몇 조각 기본 안주를 비교해 봤다. 

               그리곤 1976년 전역을 몇 달 앞둔 어느 초여름 늦은 오후에 관광호텔근처 대학 친구 민수네 집엘 들렸다. 3대 독자로 군 면제가 된 친구는 출타 중이었고, 친구 어머니와 서울 자취집에서 자주 봤던 여동생 혜정이가 있었다. 4년 만에 보는 그녀는 이젠 성숙한 여인으로 보였다. 잠시 얘기나 나누고 간다는 것이 너무 늦어 자정이 가까워져, 황급히 일어섰다. 방도 비었으니, 자고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 뒤에서, 혜정이가 거들었다.

                    - 오랜만에 만났는데 서운하잖아요. 주무시고 가세요.  미국 가시면 언제 다시 뵐지도 모르는데.

                    - 음, 아냐~. 오빠도 없는데, 가야지 뭐.

                    - 오빠 쓰던 방이 비어 있잖아요-.

                   그때 어머니는 잠깐 방안으로 들어가셨고, 나는 군화를 신고 일어서서 막 계단을 내려 갈려했다. 그녀는 무척 서운한 듯 계속해서 자고 가라는 말을 하다가 그냥 내려가는 날 보고,

                    - 그래, 맘대로 해요. 누가 막나 뭐?

                혜정은 화가 나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계단 위쪽을 올려 보고서 그냥 혼자 내려오셨고, 나는 작별을 고하고 고요가 깔린 어두운 길을 오랫동안 밟아가며 그녀의 타는 눈길을 생각하면서 쓰게 웃었다. 모처럼 만난 혜정을 그리 욕정의 대상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그 해 여름의 막바지에서 끊긴 필름이다.

 

         2. 친구란? 

 

                너무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만나면 죽기 전에 몇 번이나 만날 수 있느냐는 얘기다. 79년 4월 도미하여 90년 8월에 처음 나왔을 때, 공항에서 친구가 한 첫마디였다. 그러면 지난 10여 년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500불 빌려서 떠난 몸이, 고생은 각오한 거였지만, 결국은 지금의 내가 된 것뿐이다. 뭐 모르고 시집간다는 얘기가 있듯, 개인의 좁은 소견으로 저지르지 못하면 그나마 해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일들이 많았을 게다. 미국 생활이라도 고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좁은 아파트에서, 낮에 직장으로, 밤에 대학원을 다니면서, 그렇게 변화 없는 삼각지 대만을 오랫동안 돌고 또 돈 게다. 이게 내가 기껏 풍기는 향기의 영역인지, 인생의 기초를 쌓는 과정인지, 아니면 기승전결의 과정이 없는 인간의 역사에서 언제라도 운이 다하면 미완성 속의 결론이 되고 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길을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따름이었다. 

               친구란 오랫동안 자주 만나서 절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만나기 전까지는 쌓인 얘기하자면, 몇 날 며칠도 부족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지만, 막상 만나 보니, 흥분된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지만,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지나간 세월에 대해 아쉬움보다 허무함이 앞서고, 그저 멍청한 느낌만 들 따름이었다. 마치 낡은 기록영화같이, 지나간 옛 시절에는 색깔도 소리도 없는 막연한 기억만이 앞서지 않는가 말이다. 그 후 자주 들리는 나들이가 되었지만, 서울이나 부산에서 2주 정도의 필요한 일만 보고 훌쩍 가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엊그저께 맘먹고 수소문 끝에 전화 연락하고, 연휴가 된 식목일을 피한 다음날 실로 20여 년 만에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제외하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고향을 친구 찾아온 거다. 

                고속버스 터미널은 옛날 금암동 다리 옆에 있었는데, 이곳은 어디냐? 아무리 둘러 봐도 감이 안 잡힌다. 기억을 되살릴만한 게 전혀 없으니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종합경기장 옆이라고 하였다. 그래, 중 고교 시절에 포플러 나무 심으러 자주 왔었다. 잠시 후에 상걸이가 마중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중년이 된 친구의 모습, 마찬가지로 유난히 희끗거리는 머리에 눈언저리 처져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그는 뭤을 생각했을까? 그 누가 세월을 비켜 갈건 가? 세월의 흐름이 한편으로는 꼭 기억했어야 할 일까지도 망각하게 하니 아쉽고 서글픈 일이다. 반가움에 앞서 허무함과 어처구니없는 맘이 앞섰다.

               옛날에 걸어 다니던 30, 40분 거리는 차로 5분여 거리가 아닌가. 금암동에서 중앙시장을 지나 곧 전주천, 완산국민학교를 지나 완산칠봉 정자까지는 너무 가까웠다. 친구는 그래도 변해 온 전주를 보려면 이곳에 와 봐야 한다고 하였다. 까마득했던 모악산에서 서쪽으로 황방산이 눈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 사이의 넓은 논밭이 고층아파트의 숲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인구가 다른 시에 비해서는 그렇게 크게 늘지 않았다는데, 웬 집은 저토록 많이 지었는지 모르겠단다. 방 한 두 개에 4, 5 식구가 풍장 치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래도 요새 사람들은 사치스럽다고 생각한단다. 이제 서너 식구가 30여 평 자리를 쓰는 데도 좁다고 하니 그래도 옛날보다는 생활이 비교가 안될 만큼 핀 모양이다. 

               잠시 후 다가산을 내려와 전동성당 옆을 지나  전주여고와 풍남국민학교 옆으로 해서, 모교 앞에 잠시 정차를 해서 보니 감회가 새로워졌다. 교내로 들어가고픈 맘도 들었지만 주차할 곳도 마땅치 못하였고, 또 몇 년 후에 졸업 30년 만에 한다는 동창회를 위해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다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많은 학교가 변두리로 옮겨가 버렸는데도, 옛 자리에 버텨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균화라는 미명 하에 정신적인 맥과 긍지를 이어주는 전통을 유린해 버린 게 아쉬웠다. 몇 백 년을 같은 장소에서 전통을 유지하는 이웃 나라 일본이나 구미 여러 나라들의 고색이 찬연한 교정은 훗날 찾아오는 많은 동문들에게 무한한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지만. 

                 금암동 근처에 다시 돌아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니까 아마 50년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어머니 따라 중앙시장에 수 없이 들락거리던 생각이 났다. 그때 나로서는 무엇보다 자장면 먹는 재미로 따라갔었지만, 동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신작로 옆으로 나뭇단을 묶어 파는 사람들의 행렬이며, 산나물, 떡, 생선 파는 아낙네들, 구호물자, 라이프 잡지, 군용 수통, 긴 손잡이 달린 반찬 통, 밥 통 등을 파는 리어카 행상들이 북적거렸었다. 그런데 걸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을 봐서 그런지, 긴 철사로 된 손잡이가 달린 ‘항고’에 대한 선입관은 그리 좋지 않았다. 또래 애들 모두 허리에 군용 벨트로 차는 수통은 제일 갖고 싶은 것 중 하나였었다. 또 시장에서 가슴에 훈장을 단 상이군인들의 무서운 행패도 자주 봤었다. 

                그리고 ‘종합방직’ 옆  비행장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잠자리 같은 경비행기들이 많이 내리는 날에는 그 신기한 비행기 구경도 하고, 또 미군들이 껌, 과자 등을 던져 준다고 해서 유별나게 쫓아다녔지만, 껌 한 개라도 얻어먹었던 기억은 없었다. 아마 4, 5년 전 우리네 형님들이 춥고 배고픔을 많이 겪었을 거라 생각해봤다. 그 비행장을 가로질러가서 높은 제방을 넘으면 항상 신바람이 나서 뛰어드는 전주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추억 어린 한벽루와 추천대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푸른 물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탁해지는 게 맘이 너무도 아팠다. 좋게 변해도 아쉬울 터인데, 구정물이 웬 말인가! 자연의 훼손은 성급한 위정자들의 사생아가 아닌가. 가난한 나라 살림이 제일 큰 죄요, 자연을 선천적으로 사랑치 못하는 위정자들이 죄인이다. 지리산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생태계와 경관을 깨는 일, 한라산의 백록담이 무분별한 등산로 조성으로 산사태를 유발해 매립시키는 행위, 밖으로는 보르네오, 아마존의 밀림을 파괴하는 행위들은 무슨 결론으로 치닫고 있는 것인지.

 

                                                              3. 뒷동산의 추억

   

               앞금암동과 진북동 사이를 흐르는 개울이 있다. 그 개울가에는 자연의 제방이 있었고, 수양버들이 쭉쭉 늘어져 있었다. 홍수라도 나면 굼실대는 황톳물에 늙은 호박이며 원두막 지붕, 기둥들이 둥둥 떠내려 오는 난리 법석이 벌어지곤 했지만, 물을 치는 제비와 동네 애들은 잔치나 맞은 듯 신이나 있었다. 평소에 행동이 몹시 굼뜬 뽕까네 아버지가 그것들을 건져 볼 욕심으로 작업복을 입은 채 슬슬 걸어 들어갔다가 물이 가슴까지 차더니만, 갑자기 물밑의 깊은 함정으로 빠져 머리까지 쑥 들어가는 순간에 물장구를 치며 허우적거리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던 일도 있었다. 밖으로 나와 다 젖은 담배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웃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짓궂은 우리들은 둑 가운데 외길 양측에 한두 자 되는 길섶 풀들을 서로 묶어 놔 지나가는 사람들 넘어지는 구경 하다가, 쫓겨 도망 다니던 이곳이 이토록 더러워지고 찌들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제방은 석축과 콘크리트의 삭막한 모습으로 바꿔져 있고, 동네 뒤꼍에 있는 동산은 이제 옛 흔적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산기슭에는 늙은 소나무며 참나무가 많고 매미 풍뎅이도 많아, 그걸 잡으려다 벌한테 무수히 쏘이던 곳이었다. 그리고 시시 때때도 없이 오르내리며 노닐던 동산에서 여름철 무성한 풋나무 속을 누비며 숨바꼭질하거나, 제법 험하게 형성된 검은 바위들이 많아 위험스런 바위 타기도 했지마는, 그 검은 바위 때문인지 ‘금암동’을 ‘검암동’이라고도 불리기도 했었다. 

                제일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일이니까, 역시 50년대 중반이 아닐는지. 어느 가을날 아침나절 산에 막 올라오니 뒤꼍 밀밭에서 놀라 비상하는 청둥오리 떼 때문에, 덩달아 기겁하게 놀라 댓 거름 뒤쫓다 서 버렸다. 청둥오리 떼는 저 아래 과수원 쪽으로 날아가고, 과수원 건너편에 단층으로 된 긴 학교 건물이 눈에 띄었는데, 색색의 코스모스 만발한 울타리 가운데 운동장에서는 운동회가 한창이었었다. 다리를 벌리고 버텨 서서 나도 나중에 저 학교에 가겠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일이다. 후에 ‘전주 북 국민학교’, 지금의 ‘전주 금암초등학교’제8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래 이제는, 꿈과 낭만이 점철된 동산은 간데온데없고 수많은 집들로 꽉 차 있어 금암동의 의미가 탈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면 동란 전엔 경관이 수려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 보면 큰 정원이 딸린 이층으로 된 규모가 큰 일본식 집들이라든지, 지금의 동사무소 격인 정 사무소의 규모와 주변 나무들을 보면 말이다. 동네에 큰 농장과 화원이 많이 있었단다.

                앞금암동에서의 우리 집 역사는 해방이 되고 새 직장을 따라 임실에서 이사를 오시게 되는 증조 할머님 이하 할머님과 부모님부터 시작이 된다. 당시 시내 쪽에 집을 샀으면, 훗날 부동산 가치로 볼 때 훨씬 이득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후회를 말씀하셨지만, 이미 때늦은 탄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는 중앙시장을 지나 철길을 넘으시면서, 어머니에게,

                         - 이보게나, 저기 저 논 끝으로 큰 초가집이 보이는가? 그게 우리 집이 아닌가? 뒷동산의 푸른 노송이며, 경치가 너무 좋구려―.

                하지만, 이태 후에 사변이 났다. 그 많던 노송은 거의 다 베어져 없어져 버리고, 몇 구루만이 산기슭에 해 묶은 참나무와 어우러져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일 학기까지 살던 그 초가집은 방이 4개에 큰 부엌이 2개가 있었고, 앞 텃밭이 상당히 컸는데, 그 변두리에는 몇 그루의 과실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10년 생 정도의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 그리고 몇 년 되지 않은 배나무가 있었는데, 살구나무에서 복숭아나무까지는 한 20 미터 정도 되는데, 폭이 한 2미터 되는 딸기밭도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넓은 밭에 억척이신 어머니는 봄이면 토마토를 심고, 바로 또 김장배추를 심으셨다. 한 여름철에는 토마토 따다가 샘물에 집어넣어 밤에 시원하게 건져 먹는 재미, 방과 후 출출한 오후엔 맛 들어가는 복숭아 몇 개 따 가지고, 곧바로 뛰면 제방 넘어 개울이니, 대충 씻어 먹다가 껄끄러워 캑캑거리던 추억들이 새로웠다. 으슥한 밤에 토마토 밭은 서리군 들이 가끔 살펴 가는 곳이었지만, 그것도 재미로 넘겨 봐주던 그 시절 이야기다. 김장철은 잔칫날 같아 동네 아낙들은 다 모여 일하는 것같이 북적댔다. 내 나이 또래들인 가난한 홍근네와 동네개네 엄마는 큰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서 자주 눈에 띄었는데, 어머니가 그때마다 많이 거둬 주신 것 같았다. 

               그렇게 시 변두리에 살면서 시골의 정취도 만끽하면서 지낸 시절이었는데, 그게 다 없어진 거였다. 그 집과 텃밭을 잇는 직선으로 산을 깎아 덕진 쪽으로 신작로가 뚫려져있었다. 잃어버린 고향을 보는 것은 한 때 영화를 누렸던 옛 왕조의 궁터에 박혀 있는 주춧돌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욱 마음을 산란케 하며, 맘속에 살아 있는 추억 때문에 더욱 어쩔 수 없음에 몸부림치게 하였다. 

               집안의 몰락으로 정든 집을 넘겨주고, 예닐곱 번의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중고시절, 고뇌에 찾던 수많은 날들의 기억은 뇌수의 일방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시절 그 셋방들도 영원히 세월 속에 흩어져 없어졌나 보다. 밤 11시경 서울행 준급행열차의 디젤엔진의 소음을 들으며, 죽어도 상경하리라고 매일매일 가슴에 새겼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새로이 시작하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 같은 때였다. 18살 먹은 아리따운 접대부의 맘 씀을 겪어 봤는가? 짧은 인생 동안 얼마나 많은 격정을 겪었으면 그렇게도 애늙은이가 다 되어 있을까? 곱게 지낸 30살 노처녀는 생각하는 것이 18살 때 묻지 않는 소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인생사는 주변 환경의 영향이 주는 대로 굵어지는 게다.

                         

                                                       4. 정애는 지금 어디에?

 

                옛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덕진 연못을 감싸 도는 좁은 길로 들어왔다. 연과 창포는 일부나마 그 시절의 자태를 기억하게 해주나, 주변 경관들이 너무 많이 변한 터라, 착잡한 맘만 더 할 뿐이었다. 조경단 진입도로 근처에 우거져 있었던 노송들은 다 베어 없어지고, 학교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 소나무 없는 산은 산이 아니고 언덕에 지나지 않게 보였다. 옛 시절엔 그 계곡에 흐르는 실개천에서 새우도 잡았었는데, 문명의 발달은 이곳까지도 검은 폐수를 선사해 줬다. 이곳이 초등학교에서도 가까우니 소풍은 수시로 왔고, 동네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으니, 상걸이 와도 사시사철 이 구석 저 구석 발자취가 안 닿는 데가 없이 무수히 쏘다니던 곳이었다. 눈 많이 왔던 날 조경단내에서 눈썰매 타다가 쫓겨 도망갔던 일이며, 자칫 길 잃어버릴 정도의 깊은 소나무 숲, 그 사이사이에 있는 잔디가 깔려 있는 공터, 삼 형제 소나무의 위용스런 모습, 이름과 날짜를 새겨 놨던 깊숙한 곳의 오리나무들도 이제는 한낱 뇌수의 추억 물로 전락해 버린 게다. 그래도 전주가 찬밥이니 이 정도라도 남아 있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려줬다. 몇 년 후면 개발 붐으로 이나마 깔끔히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산 안쪽으로는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조만간 다시 올 것을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저녁나절이 되어서 신시가지 쪽으로 나왔다. 신 역 앞으로 큰 길이 뚫리고 좌우로 관공서 등 큰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들은 옛날에 과수원 자리며, 공동묘지 자리란다. 금암동 쪽에서 조경단을 갈 때는 그쪽을 수 없이 지나치곤 했었다. 소풍가던 길, 칡뿌리 캐러 가던 길, 왕잠자리 잡으러 저수지 찾아다니던 논밭 길들이 있던 곳들이 신시가지가 되었단다. 그 근처에 ‘숙사’라는 피난민 촌도 있었는데, 그 근처에 가는 것을  무척 꺼려했었다. 그 근처엘 지나가다 이유도 없이 얻어맞고 결국은 동네 패싸움으로 번지는 때가 허다했다. 학교에서도 토박이와 피난민 출신의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 당시는 학교가 많지 않아서 상당히 먼 곳인데도 같은 초등학교로 취학이 된 몇 급우들이 있었는데, 그 중 공부 잘하고 귀엽게 생긴 정애가 있었다. 그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려웠기에 중학교엘 간 급우들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그 귀여운 정애도 역시 그러질 못하였다. 몇 년이 지나고, 고 2 때, 우연히 ‘종합 방직’이라는 방직공장에 밤일 나가는 그 앨 미리 알아보고, 나의 교복 입은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피해 숨은 적이 있었는데, 그 후 몇 날을 먼발치에서 총총히 걸어가는 그 앨 보고서도 어쩔 수 없는 내 입장을 생각하고 무척이나 가슴 아파하였다. 얼마 후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애들이 주축이 되어 버리니, 정애를 포함해서 만나고 싶은 애들은 결국 만나지도 못했다. 

                그런 정애를 서울로 유학 가는 날 기차에서 만났다. 하고픈 말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밤차를 타고 온 날 아침, 모두들 파장을 맞은 기분이어서 별 얘기도 못하였다. 물론 방직공장에 밤일 나가는 모습을 봤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하였고, 겨우 초등학교시절 얘길 하다가 그 애가 나보다 몇 살 많다는 사실과 무슨 일 때문에 영등포에 간다는 얘기가 희미하게 생각났다. 바보같이 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것도 물어보지도 못했다. 상급학교에 진학 못한 정애를 얼마나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싶었고 만나고 싶어서 안달했었지만, 그 당시 서울행 기차에서의 내 마음의 흐름을 기억 못 하니, 이제야 또 아쉬움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사귀고 싶은 사람 다 사귀고, 하고픈 말 다 하고 지낸다면 인간사 애틋한 그리움이나 추억은 없을 게다. 을순이를 그리워하는 유진오가 1938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단편소설, "창랑정기" 같은 인간사다.

 

                                                                    5. 추억의 바람잡이 

 

               시내에 있는 학교를 어쩌다 들려 보면 건물이나 옷차림에 위압감을 느꼈다. 까까머리에 깜장 고무신과 상구머리에 운동화가 그 외모의 차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곳에서 ‘정중와’가 되어, 추억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망아지같이 지내지 않았느냐? 폭풍우 치는 날 하늘을 찌르는 노송 아래서 노송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긴 장마 후 세차게 흩어지는 흰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터져 보이는 검푸른 남고산성의 모습을 보고 살았다. 달빛이 파란 눈 내린 겨울밤, 판자 울타리 사이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봄비 내린 날 뒷동산 과수원 구비 구비마다 하얀 배꽃이며 연분홍 복숭아꽃물결을 기억한다. 모악산 산상 근처 세차게 비껴 올라오는 비구름의 위압감에 가슴이 철렁이던 그 모든 추억들은 뇌수 깊숙이 잠자고 있지만, 그 추억은 오감으로 자극되어 하시라도 떠오른다. 마치 큰 기계를 자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키보드의 키같이, 언제라도 자극하여 떠오른다. 전에 시카고에서 엔지니어로 다녔던 전자회사에는 수 백 명의 여공들이 있었는데, 휴식시간에는 밖에 나와 무진장 시끄럽게 떠들었다. 어느 흑인 여자의 짙은 향수가 순간 옛날 서울시청 앞 골목에서 웃음 파는 여인네들을 생각게 하니, 피식 웃어 봤다. 모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며 끓여먹는 된장국은 역시 고약한 추억의 바람잡이다. 더군다나 청국장은 꿈도 못 꿨다. 밀집된 아파트에서 그 걸 띄우거나 끊인다면, 아마도 유기된 사체라도 있다는 신고가 들어갔을 게다. 

    홍어탕을 잘 한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소주잔을 걸치면서, 실꾸리 풀리듯 지난 얘기 나누다가 먼저 간 동문들이며 특히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오 선생님의 타계 소식도 접했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어금니 바짝 물고 앞니 밑으로 굴러 나오는 듯한 그 잔소리가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신문사에 근무한다는 인환이가 왔다. 기억이 나는 얼굴이었다. 설령 전혀 기억이 없다고 해도 동창이라는 그 자체가 20여 년 친구같이 다정스러움이 있을 일이다. 지금의 나를 내세울 필요도 없는 거고, 밥 먹고 살고, 처자식들 잘 건사하며 연로하신 부모한테 효도하고 지내면 되는 것 아니냐? 주중이 되어 늦게 까지 어울리지 못할 입장이었다. 나도 내일 아침이면 떠나가야 하고, 모레면 또 태평양을 건너가야 할 판이었다. 이제 이별을 고하고 4년 후에 재회를 약속하며, 옛날 공동묘지 터였었던 이곳 어느 여관에서 잠들기 힘든 밤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