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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가슴' 외 4편-- 김경훈[石香]

바람거사 2012. 7. 13. 06:04

 

 

중년의 가슴 


발목만 빠져도
덜컹 거리는 중년의 가슴에
어김 없이 가을은 약속도 없는 그리움을 두고 떠나고
기다림으로 삭혀야하는 겨울이 오고 말았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기차표 없이도 떠날 수 있는 나만의 여행
목적지가 사랑이라는 그대 가슴이지만
감히 드러 낼 수 없는 마음이라
중년의 가슴은 열병을 앓기도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쓸쓸히 반복 되는 일상을 접고
바람 난 새 처럼 날아 가고 싶지만
삶이라는 것은 때로
침범할 수 없는 중앙선이 그어져 있어
함부로 넘어갈 수 없는 것
중년의 가슴에도 스스로 그어놓은
두꺼운 두 줄 중앙선이 있다


여기까지다...
그리움도 여기까지
사랑도 여기까지
스스로 최면을 걸듯 읊조리는 맹세에
중년의 가슴은 때로 아픔으로 물들기도 한다.


커피 한 잔에도
마음이 녹아 내리는 중년의 가슴
오늘도 그들은 저 마다의 가슴에
그리움 하나 숨기고 살아 간다.

 

 

시인으로 살기


꽃으로 살기가 어디 그리 쉬운줄 아는가
바람 불면 흔들려야 하고
비가 오면 젖어야 하는데
그러다 때가 되면
가만히 자신을 내려 놓아야 하는데
사시사철 향기를 낼 수 없는 안타까움에
미끄러지듯 슬픔속으로 들어가
소리 죽이며 울음 울 때
사람들은 꽃이 저버렸다고
기억의 파일을 지워버린다
삶의 어느 순간
가장 슬플 때 그리고 가장 고독할 때
시인은 꽃이 되고 별이 된다
사람은 혼자여서 외로울 때
마주하고도 혼자일 때
꽃을 보고 별을 찾는다
사랑하고도 외로운 것이
시인이 가는 길이다

중년에 마주친 사랑

세월의 바람이 무심히 지나가던
어느 중년의 길목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처럼
가슴을 울리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듯
날마다 그의 가슴을 열고
조금씩 조금씩 들어선다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다
한번쯤은 가까이서
그의 숨소리를 듣고 싶고
손을 잡으면 따뜻한 마음이
혈관 속으로 스며들 것도 같다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작은 그리움이라도 있어
오늘이 즐거움으로 온다면
그저 바라만 보며
말없는 웃음을 지어도 좋겠다

거울 앞에 서면
늙어가는 세월이 반사되지만
마음의 거울 앞에 서면
늘 그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에게로 간다
날마다 숲 길을 산책하듯이
사랑을 만나러 간다  

 

시인의 사랑

시인의 사랑은 손끝에 있어
보고싶거나 그리울 때 마다
한편의 시를 만들어낸다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마음
두려운 이름을 부르듯 쉽게 부를 수 없는 사람

보고싶은 얼굴은 눈끝에 있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손끝에 있다

풀잎끝에 매달린 이슬처럼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하다가
마침내 손끝에서 떨어져 시가 될 때
그때가 아름다운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밤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불 밝히지 않아도
새벽으로 가는 길을 찾아 갑니다

바다는
파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고요가 찾아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숲은
바람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겨드랑이를 간지럽혀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으면
궁금해 합니다

누군가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두개의 심장을 가졌지만
하나의 박동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들고 나는
그대 숨소리에 잠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