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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지했던 시절에 허구로 만든 종교에 매달리지 않고, 바람같이 왔다가 사라지는 삶을 최선으로 삽니다.
이야기 마당/시카고사는 이야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by 바람거사 2016. 12. 9.

                                                      

   



                                                      A Memorial Address (追 悼 辭)


                                                                                                                                                                               11-11-2016

오늘 가족장으로 추도하는 이 자리에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어머니를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Wake를 치르면서, 시카고에 사는 아들 딸 식구는 물론 멀리서 온 여러 식구들이며, 지난 10월 20일, 호흡곤란으로 응급실로 모신후로 11월 8일 운명 하신 날까지 주야로 번가라서 고인의 곁을 지켜준 내자 및 형제자매 식구 모두에게 맏상제로서 심심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와중에도 축도를 드리기 위해서 기꺼이 수락하신 박규완 목사님과 오랜 동안 저의 내외를 대신하여 어머니를 편하게 모셔준 오 여사님에게도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어머니는 충청남도 부여 귀암리에서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지만, 조실부모를 한 탓에 출생신고가 누락되어, 훗날 혼인신고를 할 즈음에 마침 작은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미쳐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1931년 1월 24일생이었던 유.복.술.로 살아 오셨습니다. 어머니의 원래 함자는 유.순.근 이며 1947년 선친이 사주단지를 보내고 수락을 받았을 때 적어 놓으신 기록을 보면 생년월일이 1927년 음력 6월 8일로 되어 있었지만, 그 것도 확실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어머니의 실제 나이는, 88이나 89세가 됩니다.


그리고 1947년 시집을 오기 까지 남포, 서천, 대천 등지의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장항의 갑부 집안을 소개받아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지내는 동안에 당시 문중에서 군산시장을 하셨던 경주김씨 정숙공파 종가의 35대 손 김영상의 누님이 장항에 있는 서천양조장에 들렀다가 부지런하고 고운 순근이 눈에 띄어 청혼을 하게 되었고, 방년 20살에 혼인을 하여 선친을 따라 전라북도 임실로 떠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울어가는 집안의 작은 며느리로 들어왔지만, 눈치 빠르고 바지런한 어머니는 상할머니에 할머니 청상이 된 큰어머니와 두 어린 조카를 보살폈습니다. 큰 아버지는 경성부청에 다니면서 연식정구 선수로 명성이 높았는데, 1938년 9월에 연습을 하고 귀가후에 고열로 입원하였지만, 28살 나이에 장티푸스로 급사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살림살이 어두운 문필가이었던 큰 어머니를 대신하여 오랫동안 집안일을 도맡아 지내셨습니다.


선친은 1949년 본인이 태어가기 석 달 전인 음력 2월에 어께 너머로 배운 정구 실력이 인정되어 전주 지방전매청에 취직이 되어 두 할머니를 모시고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남인 본인이, 51년에 금휘, 54년에 경휘 그리고 56년에 막둥이 창휘가 태어났습니다. 선친의 안정된 직장 덕에 당시 어려웠던 시절에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크게 배우지 못하고 따뜻한 정에 굶주려 왔던 어머니는 혼신을 다하여 1970년 초에 선친의 조기퇴직에 따라 힘든 세월을 겪으면서도 우리 4남매를 지극정성으로 반듯하게 키우셨고, 현금에 이르러 8명의 손자손녀와 8명의 증손을 두셨습니다.


어머니는 1980년 10월에 우리내외의 방문초청으로 시카고에 오셨고, 컴퓨터 조회가 없던 시절 덕에 선친도 1981년 6월에 역시 방문초청으로 오셔서 1980년 9월에 태어난 Albert와 1982년생인 Alicia를 주로 선친이 돌보셨고, 어머니는 한인식당이었던 진고개에서 시작하여1987년 12월 15일 척추를 다치는 사고로 규모가 큰 카페 청운각의 주방장 일을 그만 둘 때까지 열심히 일을 하여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중학교에 다니던 60대 중반부터 익히셨던 고전무용을 다시 시작하여 시카고에 있는 사찰에 조부모의 위패를 모셔 논 불심사와 레인택 하이 스쿨에서 여러 차례 공연도 하면서 서도도 익히셨습니다.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어서도 더부살이를 하는 동안에 아이를 업고 초등학교 창 밖에서 틈틈이 눈으로 배워서 한글과 일본어도 깨우쳤지만, 크게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된 어머니는 틈나는 대로 한인 타운의 자원봉사자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영어도 배웠고 또 사고 후에도 수많은 골절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동안 몸 상태가 나빠지는 데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1995년 1월에 미국 시민권 인터뷰를 하고 당당히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1987년 12월 경추를 다치는 사고 후로 긴 세월동안 다시 걸으시겠다는 강인한 신념으로 사시는 동안 연로한 선친은 2006년 7월에 당년 88세에 하세하셨고, 그 후로도 무단히 강인하게 버텨온 어머니 이었지만, 여러 차례 골절 부상을 겪는 동안, 거동이 점점 더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5월말에도 이번과 흡사한 증상으로 입원하였지만, 다행히 소생하였으나 이번에는 호흡곤란 증세가 악화되면서 끝내 소생치 못하고 하세 하셨습니다. 숨을 거두시기 전날 너무도 밝은 표정에 혼동 없이 모두를 잘 알아보시고 이런 저런 요구도 하여서 만에 하나 회복이 될지도 모른 다는 맘 설레는 기대를 하였는데, 하루 만에 갑자기 종극으로 치달았고, 고통 없이 너무도 온화한 얼굴로 운명하셨습니다.

 

이제 모든 멍에를 다 내려놓고 떠나시는 어머니를 기리며 모두들 잠시 묵념을 하여 명복을 또 다시 빌어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몇 손자손녀들이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반추하는 시간을 잠시 마련하겠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의 추모예배가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