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설(白年雪- 1914∼1980):
민족 항일 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활약한 대중가요 가수. 본명은 이창민(李昌民). 경북 성주 출생.
1938년 문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일본에 유학하였으나 고베(神戶)에서 당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던 박영호의 권유로 전기현(全基玹) 작곡의〈유랑극단>을 취입, 가수로 입문하였다.
전차가 끊어진 심야-. 쓸쓸한 광화문 거리였다. 그때 먼저 취조받고 나와 백년설 을 기다리고 있던 작사가 조경환과 만나 광화문 근처 술집에서 대포를 마시며 예기를 나누다가, 백년설은 담뱃갑에 낙서를 했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나라 잃은 남의 땅 같은 나라)
그러자 조경환(1910~1956)은 노래나 한곡 만들자며, 즉석에서 가사를 써나갔다.
그 노래가 레코드로 나오면서 불티나듯 팔렸고 오늘날까지 널리 불리는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그 후 태평레코드 문예부장인 조경환은 불온 사상범으로 지목돼 숱한 고문을 당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한 많은 생을 46세로 마감한다. (김천에 가면 조경환/나화랑 형제의 노래비가 있다)
우리 가요 초창기 30년대 가사의 2·3절을 직접 지어 부른 이 곡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고, 당시에는 아무리 유명한 가수라 해도, 1만 장 팔리기 어려웠다. 대개 5천 장 정도였다. 그런데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은 10만 장이 팔리면서 그의 인기는 남인수, 이난영, 고복수의 인기를 앞지르고 있었다.
1941년 오케이 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로부터 거액(2,000원)의 계약금을 받고 전속 회사를 옮겼다.
1940년 일제의 목적 가요인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아들의 혈서〉 등을 불렀고, 광복 후 계속 가요계에서 활약하였다. 6.25 전쟁 때 대구에 피난 와서 한 때 고아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53년 서라벌 레코드사를 창업하였고, 1960년 가수협회 초대회장을 지내다가, 1963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 경향신문사 사업부에서 일하다가 1979년 전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하였는데, 1980년 9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하였다. 대표적인 취입곡으로는 〈나그네 설움〉을 비롯하여 〈일자 일루 一字一淚〉,〈두견화 사랑〉,〈어머님 사랑>, <번지 없는 주막>, <마도로스 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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