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블화 (RUB)
전쟁은 우크라이나에서 났는데, 정작 모스크바에서 달러가 빠져나간다(미국 투자자 마이클이 러시아 투자를 접고 미국 집에 돌아가려면 루블화를 팔고 달러로 바꿔가야 한다). 외환시장에는 루블화 매도 주문이 쌓이고, 루블화는 연일 자유낙하 중이다. 개전 이후 루블화 가치는 70% 이상 폭락했다. (푸틴이 전사자 1인에게 7천여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그 가치가 해외에서 2천만 원 정도로 줄어든 셈이다). 반대로 러시아 정부나 기업이 해외에 갚아야 할 달러 부채는 70%가 더 불어난다.
사실 루블화의 인기는 오래 전부터 시들해졌다. 10여 년 전에는 1달러에 30루블쯤 됐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한 2014년 이후엔 70루블이 필요했다. 이제 120루블을 줘야 미화 1달러를 살 수 있다.
화폐가치는 정확하게 그 나라 경제의 인기와 비례한다. 푸틴의 장기집권이 이어지면서, 러시아 제품과 러시아 관광, 러시아 주식 모두 인기를 잃고 있다. 그러다 전쟁까지 났다.
자국 화폐가치가 추락하면 대신 수출이 유리해진다. 100달러에 팔던 운동화를 50달러에 팔 수 있다(우리는 그렇게 IMF외환위기를 이겨냈다). 그런데 기름과 무기 말고 뭐 하나 변변하게 팔 게 없는 러시아는 환율 폭등의 혜택이 거의 없다.
반면 제조업이 부실하니 운동화부터 휴대폰까지 대부분의 소비재를 수입해야 한다. 그런데 자국 화폐가치가 반토막이 났으니, 이제 죄다 두 배 값으로 수입해야 한다. 모스크바에서 팔리는 맥도날드에서 LG세탁기까지 모두 두 배가 된다. 이렇게 물가가 치솟는다. (하긴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러시아 내 서비스를 중단했으니 카드 쓸 일도 없겠다)
수출도 어려운데, 수입도 어렵다. 애플부터 디즈니까지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와의 장사를 접었다. 은행 거래도 어렵다. 스위프트(SWIFT)라는 국제 송금망을 닫아버렸다. 달러 결제가 안 된다.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러시아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2. 디폴트 (default )
국가 부도를 흔히 '디폴트'라고 한다. 정부가 발행한 국채 만기가 돌아왔는데 돈을 갚지 못하면 그게 '디폴트'다. 나라 망한 거다. 2001년 디폴트가 난 아르헨티나는 2016년에야 겨우 국채 발행을 재개했다.
러시아는 1998년에도 디폴트가 났다. 그때 우리한테 갚을 돈 일부는 탱크나 헬기로 갚았다. 다시 러시아의 디폴트 가능성이 커진다. 전 세계가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 경제의 목줄을 죄고 있다. 좀 산다는 나라와 기업들이 특정 국가의 제재에 이렇게 일사불란 하게 단결한 적은 없었다. 중립국 스위스까지 제재에 동참했다.
오는 9일부터는 'MSCI 신흥국 지수'에서 러시아 지수가 빠진다(글로벌 투자 마켓의 큰 매대에서 러시아 주식을 빼버렸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국 등 다른 매대는 손님이 늘어난다). 애플에 이어 도요타나 H&M도 판매를 중단했다. 헐값에 원유라도 수출해야 하는데, 글로벌 선박 회사들이 선적을 안 해준다. 매일 크렘린궁 앞으로 생각도 못 한 경제제재 고지서가 날아온다.
러시아 경제가 휘청한다. 서둘러 기준금리를 20%로 올렸다(대부업체 이자율이 아니다). 그러자 시장 금리가 치솟는다. 사실상 은행의 대출 기능이 마비됐다. 러시아 부동산 중개인협회 부회장은 SNS에 "주택대출과의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라고 했다. 금리가 오르면 시장 참여자들은 그만큼 돈의 값을 더 치러야 한다. 경제는 그만큼 더 무거워진다. 모두 푸틴의 전쟁 매뉴얼에는 없던 일들이다. 서방세계의 전쟁 고지서가 푸틴을 거쳐 러시아 국민들에게 고루 전달된다.
3. 외환보유고 (Foreign exchange reserves)
이럴 때 쓰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곳간에 쌓아 둔다. 러시아는 6,400억 달러(약 770조 원/한국의 외환보유고는 4,600억 달러다)의 외환보유고를 갖고 있다. 그 중 4,000억 달러는 뉴욕이나 런던 같은 주요 도시의 중앙은행이나 상업은행에 맡겨뒀다. 그런데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러시아 중앙은행과 거래를 끊었다. 맡겨둔 채권을 회수할 방법이 없다(이들 채권은 어차피 컴퓨터 모니터 안의 숫자로 보관돼 있다). 러시아 곳간 안에 보유한 외환보유고는 120억 달러 정도, 나머지 금(1,390억 달러어치)과 중국 정부의 채권( 840억 달러어치) 정도다.
곳간에 탄환이 턱없이 부족하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조시 립스키 국장은 러시아가 하룻밤 사이에 오스트리아 국내총생산(GDP)만큼 돈을 날렸다고 했다(폴리티코 보도 중에서).
그러니 이제 루블화가 추락해도 외환시장에서 루블화를 주문할 탄환이 부족하다(화폐가치도 마늘이나 배추처럼 주문하는 사람이 많아야 올라간다).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에 대비해 다시 국채도 발행해야 하는데, 이것도 꽉 막혔다. 누가 지금 러시아 국채를 받아주겠는가? 그나마 유통되는 러시아 국채 값도 반토막이 났다.
이제 러시아 안에 있는 달러라도 붙잡아야 한다. 서둘러 증시를 닫았고, 내국인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살 경우 30%의 수수료를 부과하기로 했다. 달러 매수 주문 내지 말라는 뜻이다. 러시아 최대은행 수베르 방크는 달러 예금의 이자율을 4%로 올렸다. 마르고 루블화 가치는 추락하는 데,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이제 국채 만기가 줄줄이 돌아온다. 어떻게 막을 것인가. 25년 전 한국인들은 금반지라도 모았는데...
우크라이나 동쪽의 한 도시에 군수물자를 실은 러시아 군용트럭이 지나간다. 앞에 레닌의 동상이 보인다. (사진: 로이터)
4. 누가 패배할 것인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타이슨이 한 말이다. 푸틴도 이렇게 꼬일 줄 몰랐을 거다. 서방의 경제제재가 예상을 뛰어넘자, 러시아 군은 민간에 대한 마구잡이 공격으로 대응하고 있다. 시간이 없기는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이 죽어간다. 이 치킨게임에서 누가 먼저 백기를 들 것인가 (불행하게도 이 나라가 스스로 제대로 만들 수 있는 단 하나의 재화가 '무기'다).
케인즈는 "인간의 경제활동 대부분 수학적 기대치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 낸 낙관주의에 의한 불안정성이 판단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했다. 시장에 참여하는 우리는 불안정한 존재이며, 그래서 우리가 만든 시장은 썩 믿을만한 곳이 아니다. 경제 불안의 최대 요인은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한 마음이다.
한번 떠난 외국 자본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번 폭등한 물가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루블화가 다시 '멀쩡한 화폐'가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러시아 군이 키이우를 함락하든 못하든 러시아 경제가 입은 내상은 상당해 보인다. 러시아의 디폴트를 경고하는 시그널이 이어진다. 국가 신용등급이 하루에 8칸씩 떨어진다. 푸틴은 버틸 수 있을까. 그 전에 러시아 경제는 버틸 수 있을까. 다음 러시아 국채 만기일은 3월 16일이다.
김원장 기자 (kim9@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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