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문고

"소식" - 거사의 "어느 남자의 사랑이야기" 중에서(2007)

바람거사 2022. 8. 10. 12:57

[거사 주]: 수필이나 자서전이라는 장르가 꼭 100% Fact 에 준해서 쓴 건 아닙니다. 더구나 기록이 없는 경우는 오랜된 기억을 되살려서 쓰는데, 그게  다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개인적이나 집안에 아주 난처한 부분은 아예 빼거나 각색도 하기 때문에 허구가 가미된 장르라고 합니다. 

[625전쟁후 남한 각지에 피난민촌이 많이 생겼는데, 민애가 살고 있었던 그 피난민촌을 "숙사"라고도 불렀다.]

 

석이는 방과 후 분단별로 돌아가면서 배정된 청소가 끝나자 후닥닥 교실 밖으로 제일 먼저 나왔는데, 책상 맨 안쪽에 틀어 박혀 있던 빈 도시락을 챙기러 다시 들어갔다가, 결국 제일 늦게 가방을 다시 꾸려 메고 터덜거리고 나왔다. 먼저 나온 애들은 이미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운동장을 거의 건너지르는데, 교사 뒤꼍 묘목 장 쪽에서 갑자기 운동장으로 넘어 들어온 회오리바람이 흙먼지와 종잇조각들을 잔뜩 휘감고 반대편 미루나무 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사내애들은 기성을 지르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 뒤범벅이 되어 따라 뛰고 있었고, 여자 애들은 같이 가던 선생님의 양팔을 붙든 채, 몸을 움츠리며 양 겨드랑이에 머리를 바싹대고 그게 다 지나갈 때까지 서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운동장의 맨 끝에 있는 커다란 미루나무와 판자 울타리를 치고 옥수수 밭을 지나치면서 그 기세가 약해지더니 공중에 높이 솟았던 그 종잇조각들이 삐라같이 나풀거리며 이곳저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한동안 넋을 놓고 쳐다보고 나니, 그 통에 먼저 나간 민애는 운동장 이 끝과 저 끝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같이 산을 넘어 집에 갈려 했던 계획이 깨지고 말아, 석이는 여간 서운하지 않았다.

에이, 하필이면 그 놈의 회오리바람이 지금 지나갈게 뭐람!”

하면서 투덜거렸다. 그냥 운동장을 건너질러 교문을 지나 철길을 따라서 갈까 하다가, 서둘러 가면 중간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산을 넘어가기로 하고, 학교 뒤꼍으로 방향을 바꿨다. 동북쪽 맨 구석에 있는 화장실 옆으로 높이가 5, 6미터는 족히 되는 가파른 언덕이 있는데, 산을 넘어서 학교엘 오는 몇 장난꾸러기들이 아래쪽 과수원 입구까지 한 50여 미터를 내려가면 운동장으로 통하는 동문이 있는데도, 거기까지 가기가 싫어서 이곳에 대 여섯 차례 발끝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파 놓고 근처의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귀신같이 오르내려 다녔다. 뒷걸음으로 서너 개를 조심스레 내려오다가 훌쩍 뛰어내려 달리면, 10여 미터 내에 5학년 2반으로 바로 통하는 복도 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은 벌도 수차례 받았었지만, 여자 애들 앞에선 더욱 신이 나서 묘기를 부렸다.

석이는 그 밑에 다가와서 언덕 위를 치켜봤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지 갑자기 앞으로 무너지는 착각을 했다. 그러다가 구멍의 위치를 살펴 본 다음 한번 오를 요령으로 손에 침을 바르고 머리 위쪽에 있는 긴 풀을 움켜잡고 오른발을 무릎까지 올려서 구멍에 끼고 튀겨 오른 뒤 왼발이 다음 구멍에 잘 닿지가 않는 바람에 쫄딱 미끄러져서, 양 무릎에 황토 자국을 그리고 말았다. 결국 몇 차례 시도 끝에 겨우 기어오르니 운동장이 널찍하게 보이고 단층 교사의 용마루가 길게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다음엔 녀석들하고 같이 용감하게 오르내릴 거라 맘을 먹는 순간, 바지를 내려다보니 좀 심하게 얼룩이 져서 양손으로 비벼 봤지만, 황토 자국은 선명하게 남았다.

그때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뒤를 보니 저 만치 탱자나무 울타리 곁으로 뜻하지 않게 민애가 혼자 올라오고 있었다. 그 애가 가까이 올 때까지 석이는 난처한 듯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바지 따윈 금방 잊어버리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석이 너도 그리로 올라 다니니? 선생님이 아시면 혼나는 거 알지? , 너 같은 우등생도 개구멍으로 다니는구나!”

개구멍은 아니다. 그냥 좀 빨리 갈려고 그랬지.”

거긴 개구멍보다 더하지. 위험하잖아.”

여하튼 소문은 내지 마. 너만 알고 있어.”

그런데 바지가 엉망이네.”

괜찮아. 우리 엄닌 이런 일로 뭐라고 안 하셔. 내가 조용한 것 같으면서 장난이 심한 걸 잘 아시니까.”

석이는 어찌 됐건 이렇게 만났으니,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신바람이 났다.

민앤 매일 이 길로 다니는구나. 겨울엔 바람도 더 세게 불고 춥겠다. 눈이 많이 오면 어떻게 다녔니? 비가 와도 길이 질어서 엉망일 텐데.”

그래도 지금까지 잘 다녔는데 뭐. 눈이 많이 오면, 너 사는 동네로 돌아가면 되는데, 서너 배는 더 걸어야 돼. 작년 겨울엔 며칠 동안을 그렇게 간 적도 있었지.”

지난 5년 동안 대부분의 애들이 새 학년이 되어 반을 재편성할 때 갈라졌지만, 민애와는 계속 한 반을 해 왔고 공부도 여자 애들 중에서는 부 반장을 하는 영순이와 일 이등을 다투고 있었다. 영순이를 따르는 애들과 민애를 따르는 애들하고 두 패로 갈려져 있었는데, 실제는 토박이와 피난민촌 아이들의 갈림이었다.

지금 오르는 산길은 거의 정상 근처에서 남북으로 갈린다. 석이가 사는 동네 반대방향인 북쪽으로 갈려지는 길을 따라가면, 낮은 언덕에 온통 밀밭들이 있다. 계속 더 내려가면, 큰 방죽이 있고 둑길을 따라서 조금만 가면, ‘숙사라는 곳이 있는데, 모두들 뜻도 모르고 그렇게 불렀다. 6.25 때 이북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양철지붕으로 된 기다란 건물 여섯 동이 나란히 있었다. 그곳은 피난민 촌이었다.

토박이들은 그 근처에 가는 걸 몹시 꺼렸다. 어쩌다 근처를 잘 모르고 갔다가는, 비슷한 또래의 애들이 떼로 몰려나와 이유도 없이 두들겨 패고, 뭐라도 가져갈 만한 물건만 있으면, 죄다 뺏어 갔다. 그런 후에는 여지없이 본토 응원군을 이끌고 와서 보복전쟁을 일삼으면서, 기를 쓰고 패싸움을 하는데, 난민촌의 쪼그만 녀석들도 돌팔매를 어떻게 잘하던지 제법 먼 거리까지 얄팍한 돌멩이가 휙휙 거리며 날려 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곳 적지에서 민애가 살고 있었다.

민애하고 모처럼 둘이서 걷는 산길 주변은 이미 가을이 물들여져 있었다. 오른쪽으로 과수원이 산 중턱까지 펼쳐져 있고 찍찍한 탱자나무 울타리가 감싸고 있었다. 그 과수원은 미술담당이신 허 선생님의 집안 소유인데 주로 배나무와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봄비가 촉촉이 내린 뒤끝에 굽이굽이 흰 물결과연분홍 물결이 파도치듯 어울려 있을 땐 장관을 이뤘다. 그리고 북쪽 언덕바지에는 돌로 된 서양식 건물이 있는데, 남쪽 벽은 커다란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고 지붕에도 큰 유리창이 나 있었다. 그곳에서 선생님이 파이프를 물고서 대문짝만 한 풍경화를 그리는 모습을 뵌 적이 있었다. 건물 바로 옆에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조그만 연못을 이루고, 창포와 수련은 물론 금붕어도 있었다.

계곡 근처는 탱자나무 대신 철조망을 쳐 놨지만 그래도 서리를 하러 들어가기엔 제일 좋은 곳이었다. 혹 들키는 날에는 학교로 보고가 되는 건 물론이고, 그 과수원 집 고명딸 정희는 어찌나 입심이 센지 신나게 나발을 불고 다닐 건 뻔하여, 단단히 쪽도 팔릴 일이었다. 샌님 같은 석이가 붙들린 날이면, 학교는 물론 온 동네가 떠들썩할 걸 잘 알면서도, 애들하고 어울려 다닐 땐, 그런 걸 염두에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아틀리에가 잘 보이는 뒤꼍을 지나고 있었다. 낮은 탱자나무 울타리 안쪽에는 선 붉은 옻나무들이 보이고, 길섶 키가 제법 큰 몇 그루의 낙엽송 잎들도 이미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마침 새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노란 잎들 사이에 걸쳐 있는 푸른 하늘에서 헤엄을 치듯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는데, 여름철 해질 무렵 먹이를 찾아 냇가에 떼로 날라 드는 수 백 마리의 불그스레한 고추잠자리하고는 질적으로 틀렸다. 이건 정말 야- 소리가 나오도록 고왔다. 그러다가 힐끗 민애를 바라보니, 그 애의 암갈색 머리카락도 유난히 빛나면서 옆으로 날리고 있었다.

작년 가을 방과 후 친구들하고 키를 넘는 코스모스 길 새로 뛰노는 민애를 우연히 물끄러미 보다가, 유난히 정수리 부근의 머리가 반지르하게 빛나면서 화사하게 웃을 때, 서글서글한 눈이 거의 감기면서 쪼르르 박힌 이를 뽐내듯 활달하게 웃는 모습에 석이는 반해 버렸었다. 그런 민애와 단 둘이서 산길을 걷다니 꿈만 같았다. 이젠 봄날 쏙쏙 뽑아 먹던 삘기도 솜사탕같이 하얗게 터져 나와 있었고, 몇 개를 훑어 공중에 뿌려 봤다. 민들레 꽃씨가 날리듯 푸른 하늘로 휘날렸다.

사실은 청소 끝나고 너하고 어딜 같이 갈려고 맘먹었었다.”

그랬었니? 미리 얘기를 하지 그랬어. 남자애가 숫기가 없구나.”

그보다, 널 만날 기회가 있어야지. 너희들은 맨 날 우르르 몰려다니잖아. 겨울이 오기 전에 꼭 보여주고 싶은 데가 있는데. 우리 애들 허고 몰려다닐 땐 자주 가는 곳이야. 저쪽 과수원 맨 끝에 있는 계곡인데 거긴 탱자나무도 없고 철조망을 대충 쳐 놨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과수원 안으로 들락거릴 수가 있단다.”

그래, 알았다. 복숭아 따먹으러 꽤나 다녔구나!”

아녀. 난 딱 두 번 갔는데, 녀석들이 워낙 눈치를 살펴서 날 안 데리고 가려고 한다고. 내가 깡다구가 없다고 말이여. 허지만, 녀석들이 내 말은 아주 잘 들어. 난 사실 계곡 근처에 가는 것이 더 좋지. 찔레 넝쿨이 쫙 어울려 있고, 펀펀한 뗏장이 깔려 있는 쌍 묘도 있는데, 반듯한 돌 제상에서 패대기 불어 먹는 놀이하기는 제일 좋은 곳이야. 근처엔 상수리나무가 많이 있지만, 밤나무도 제법 있단다.”

변명 말고, 대체 누구 허고 어울려 다녔니?”

으응, 그게 말이야. 소문나면 곤란한데, 이건 생사가 달린 문제이니깐, 비밀은 지켜야 돼.”

넌 정말 날 못 믿는 거니?”

아냐, , 넌 믿지! 저 말이야, 그 다리 저는 뽕까허고, 낭코라는 애 있잖아. 그 개고기 최명근이 말이야. 그리고 정호 랑.”

넌 보기와는 참 많이 달러. 그런 말썽쟁이들 허고 어울려서 도대체 또 뭘 했는데?”

복숭아 철이 끝나면, 서리할 것도 없잖아. 대신 탱자나 상수리도 따고, 상수리는 크고 먹음직스러워 한 번 씹어 봤는데, 어유 되게 떫더라. 그거로는 도장 파는데 밖에 쓸모가 없어. 그리고 빨간 찔레 열매를 훑어서 씹으면 굉장히 달지만, 씨에 갈고리가 있어서 목구멍으로 막 기어들어 간다. 눈물이 나도록 캑캑거려야 겨우 나와. 헌데, 지난번은 그리로 오자마자 책가방을 한 곳에 부려놓고, 낭창낭창한 긴 회초리 한 대씩 준비해 가지고, 개구리만 잡으러 한참 동안 계곡 근처를 누비고 다녔었지.”

개구릴? 아니 개구리를 잡아서 뭐 하게. 그것만 전문으로 잡으러 다니는 아저씨들은 봤지만, 너의 들은 뭐 하려고 그랬냐?”

그래, 얘기를 좀 들어 봐. 처음엔 그 미욱스러운 생김새가 생각이 나서,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 헌데 녀석들이 맛있다고 하도 떠들어 싸서 망설이다가 조금 먹어 보니까, 닭고기 맛 하고 비슷해. 구역질이 날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맛이 좋았어. 탄 부분을 툇툇거리면서, 바삭바삭한 다리 몇 개 먹어봤지 뭐.”

우웩! 너도 그걸 먹었단 말이야?”

난 그냥 좀 맛만 봤다니까. 뽕까허고 낭코는 도사가 됐더라고. 먹는 것도 그렇지만, 녀석들은 회초리로 후려치는 솜씨도 기똥차고, 앞쪽을 발로 콱 밟고 뒷다리를 잡아당기니까 한자로 팔자같이 다리만 쑥 빠져. 그리고 껍질을 홀랑 벗긴 다음엔 갈대에 쏙 끼는 거야.”

뭐라고? 어유 잔인허고 징그럽고. 개구리 잡는 백정들이야.”

민애는 기겁을 하고 석이 너도 다시 봐야 하겠다며 앞으로 막 뛰어갔다. 갑자기 당황한 석이도 마구 뛰었다. 괜스레 신이 나서 떠들었다가 모처럼 단 둘이 걷는 기회를 망쳐 놓은 듯 생각이 들어,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뛰었다. 오늘 같이 가려던 계곡을 오른쪽 눈 아래로 내려 보면서 계속 뛰어갔다. 놀란 참새들이 길 아래 수수 밭쪽으로 떼 지어 날아갔다. 민애는 산등성이에서 우뚝 섰다. 막 따라가던 석이도 바로 뒤에서 양손을 무릎에 대고 헐떡거렸다. 민애가 뒤돌아서서 석이를 잠시 내려다봤다.. 실망과 화로 얼룩진 표정이 역력했다. 입을 실룩거리며 뭔 가를 얘기하려다 그만두고 다시 휙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갔다. 석이가 옆으로 붙으며 아직 숨을 바투 쉬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재미로 들어 줄줄 알았어.”

괜찮아. 내가 괜히 화를 냈나 봐. 상관없는 일인데. 내가 뭐 네 애인이라도 되니?”

애인?”

석이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버렸다. 연애라는 말만 들어도 쑥스러운데, 갑자기 애인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아주 묘했다. 잠시 후 숙사로 가는 길과 석이가 사는 동네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언덕이 보이자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했다.

민애야, 잠깐만 있어 봐. 우리 저기 가서 조금만 있다가 가자.”

그리곤 앞 동네가 보이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검은 바위가 많이 나와 있어서 동네 사람들은 검바위라 부르는데, 그 바위 때문에 동네 여자들이 기가 세다는 얘기를 어른들한테서 자주 들었지만, 그곳은 널찍한데도 많아서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낮에 땡볕에 데워져 있어서 바위는 따스했다. 거기에 앉으면, 저 밑으로 석이가 사는 앞 동네도 보이고 개천도 보였다. 개천 건너 제방에서부터 철로길이 지나가는 언덕까지 넓은 논으로 이어져 있었다. 홍수가 지면, 징검다리가 무용지물이 되어 제법 큰 나무다리를 만들어 놨는데, 하필 다리 밑에 상여를 꾸릴 때 쓰는 기구들을 묶어 놔서 밤늦게 혼자 건너올 땐, 오금이 저리고 발이 안 떨어지는 듯했었다.. 그럴 때마다 큰소리로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를 부르며 뛰어갔었다..

그리고 철롯길 건너로 시내가 보이고 시내 저편 더 멀리 푸르스름하게 산등성이가 병풍같이 둘러쳐 있는데, 그중에서 유난히 남고산이 덧 보였다.

석이야, 너 네는 잘살지?”

아버지가 공무원이시니까 그런대로 살아. 초가집이지만, 방도 많이 있고, 텃밭도 커서, 어머닌 토마토도 심고, 김장배추도 갈고 그래. 과일나무도 몇 그루 있는데, 언젠가는 한 밤중에 사촌 형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온 식구가 깨어 나가 보니, 누가 살구나무에 올라가서 마구 흔들면서 살구를 털고 있어서 형이 큰소리를 치니까, 펄쩍 뛰어서 개천 쪽으로 도망갔다고 씩씩거리며 얘기하더라. , 무서워서 지레 큰 소리를 친 거지 뭐. 어서 도망가라고 말이야.”

"설마 그랬을까? 하여튼 좋겠다. 큰 마당도 있고, 과일나무도 있고, 또 화장실도 물론 따로 있겠지?”

물론이지. 헌데, 또 내가 헛소리했구나. 너두 이쪽으로 나와서 우리 집 근처에 살면, 숙제도 같이하고, 공부도 더 잘해서 나란히 시내에 있는 일류중학교에 가면 좋을 텐데. 그 여중학생들 오른쪽 가슴에 있는 하얀 뿔에 붙어 있는 초록색 빳지가 너무 예쁘더라. 그리고 나도 모자 태에 굵은 흰 줄이 있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그 J중학교엘 꼭 가고 싶다. 내년에 우리 열심히 해보자.”

그런데, 난 힘들지 몰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 전쟁 중에 고향을 떠나와서 갖은 게 아무것도 없고, 가족을 잃은 사람도 많아. 나는 너희들보다, 두어 살은 더 많을 거야. 한 곳에 정착을 못하고 돌아다니느라 입학이 늦어졌어.. 거기 사는 사람들은 별로 탐탁스런 직업도 없고, 농사를 지을 땅도 물론 없지. 너도 봤지만, 국민학교를 다니는 것도 쉽지가 않아서 많은 애들이 집에서 놀고 있잖아. 수험료, 기성회비와 책값이며 교복, 학용품 같은 거 살려면 다 돈이 들어가는데.”

너 네도 그렇게 힘이 들어? 너 같은 애가 중학을 못 가면, 안 되는데. 어떻게 도리가 없을까? 돈 좀 있는 친척도 없어?”

얘는? 피난까지 왔는데, 무슨 친척이 있겠어. 우린 그저 수용소에서 사는 것같이 지네. 갖은 천대를 다 받고 살지. 뒷산 비탈에 공동묘지가 있고, 화장터도 있잖아. 그리고 이젠 만성이 됐지만, 장의행렬은 거의 매일 보는 그곳이야. 밤에는 지게로 관을 지고 가는 것도 자주 봤단다. 어찌 됐건 무상으로 터전을 마련 해준 건데, 불평을 한들 무슨 수가 있겠어? 갖은 게 없으니, 그곳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마지못해 살아. 그래도 이젠 거기가 편해. 넌 더 열심히 해서 우리들 몫까지 공부를 해서 훌륭하게 되어야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졸업하면 어디든지 돈 벌러 떠나는 사람처럼.”

산 위로 스쳐 불어오는 맞바람에 밀밭이 거대한 파도를 치는 바다같이 출렁대었다. 민애의 머리도 정신없이 휘날렸다. 밀밭 옆으로 줄줄이 서있는 감나무엔 가지가 휘도록 불그스레한 땡감들이 열려 있었는데, 부러질 것같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석이는 더 이상 민애를 위해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쳐다봤다. 순간 민애도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고 입술만 옆으로 길게 늘이며 씩 웃었다. 고개를 다시 돌린 그 애가 울고 있을 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개를 한 번 휙 저으니 머리카락이 옆얼굴을 가려 버렸다. 민애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더 늦기 전에 가 봐야 해. 저녁밥은 내가 짓거든.”

석이는 펄떡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민애는 별도리 없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민애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혹 애들이 볼 테면 보라는 듯이 놓지 않았다. ‘석이는 연애 대장. 얼레 꼴레리, 민애 하고 연애한다네!’라고!’ 약 올려 먹여도, 화가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민애는 자꾸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러냐며 자꾸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안 돼, 너 같은 애가 중학교엘 안 가면 어떡허냐? 세상이 정말 고르지 못해. 내가 너 네 엄마, 아빠 좀 만나 이렇게 빌면서 부탁해도 안 될까?”

, 어린애같이. 사실 난 아빠가 안 계셔. 동란 때 행방불명되셨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 피난민촌을 못 떠나.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같이 언젠가 수소문을 하여 들여 닥칠 줄 모르는 식구들을 기다리며, 그렇게 엉겨 살고 있는 거야.”

석이는 얘기를 하면 할수록 맥이 빠져 버렸다. 잠시 후 갈림길이 있는 데로 돌아올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민애의 손이 좀 거칠다고 느꼈지만 따듯했다. 이 손으로 밥도 하고, 빨래도 한다는 사실이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냥 한데 녹아 붙어져 버리면, 죽으나 사나 같이 다닐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석이는 민애와 지난번같이 또 만나고 싶었지만, 전혀 틈이 나질 않았다. 주변에 따르는 패거리들에 싸여서 항시 어울려 다녔다. 어느 날 방과 후 교실 뒤편 우리들의 자랑에 붓글씨 쓴 습자지와 그림을 붙이면서 환경미화를 할 기회가 생기는 바람에, 내일 학교 끝나고, 지난번 얘기했던 계곡으로 나오라는 얘기를 살그머니 해줬다. 검바위에서 만날 약속을 하려 했지만, 사방이 훤히 터져 있고 가끔 아는 애들도 눈에 띄어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를 해줬는데, 민앤 대답 대신 고개만 조금 끄덕여줬다. 그런데 다음날 민애는 결석을 하고 말았다. 국어시간에 전체의 대강을 발표할 때 민애를 힐끗 쳐다보면 씩 웃어 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 빈자릴 보니 영 기운이 나질 않았다. 그다음 날도 학교엘 나오지 않았다. 생각 끝에 담임선생님한테 왜 결석을 했는지 물어봤다..

독감이 걸려서 학교엘 못 나온다고, 결석계를 근처에 사는 친구가 전해 줬구나. 석이도 병문안을 갔다 오려고?”

가도 될까요?”

그럼-. 될 수 있으면 가 봐야지. 더구나 석이하고 민애는 상당히 친하게 지내잖아? 며칠 지나고 나면 낫겠지 하는 생각은 누구든지 할 테니까.”

좀 쑥스런 생각이 들었지만, 서둘러 집엘 들러서 숙사로 발길을 돌렸다. 먼발치에서는 자주 봤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비슷한 또래 되는 녀석들이 공을 차다 말고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경계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 어떤 아주머니한테 얼른 따라붙으며,, 민애네 집을 물으면서 바로 입구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양철지붕으로 된 건물이 남북으로 길게 지어져 있는데, 출입문이 모두 다 동쪽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민애가 산다는 곳의 문이 조금 열려 있어 조심스레 들어가니, 통로가 있고 바로 옆에 부엌이 어우러져 있었다. 폭 좁은 마루가 나있고 마루 건너에 방이 두 개씩 붙어 있었다. 빛이 출입문의 창과 판자 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게 전부라 제법 어두웠다. 두 차례 이름을 불렀다. 왼쪽 방에서 민애 어머니인 듯한 아주머니가 나오셨고, 잠시 후에 옆방으로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방은 의외로 서편에 작은 창이 있어 밝았다. 석이는 어머니가 싸 준 단감 보따릴 윗목에 내려놨다.. 그 애는 인기척에 눈을 슬며시 뜨면서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민애 어머니는 그냥 누워 있어라 하시면서 머리를 조심스럽게 받힌 후 베개를 하나 더 고여 줬다.

정민애, 나야. 석이. 날 알아보겠어?”

민애 어머니가 먼저 얘기를 해줬다. 그저께 저녁부터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만, 열이 어떻게 나던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면서 눈물이 글썽하셨다. 오늘에서야 물도 마시고 미움도 든다고 말씀하셨다. 어제는 언니가 병시중을 하느라 일을 빠지고, 오늘은 어머니가 간호를 해 줬다고 했다.

정말 호되게 걸렸구나.”

그 애는 겨우 입을 떼었다.

여기는 웬일이야?? 너두 옮으면 어쩌려고?”

에유, 지 걱정이나 허지. 난 남자 꼭대기다―.”―.”

민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잠깐 감았다 뜨면서 피식 웃다가 말았다.

빨리 털어 버리고 학교엘 나와야지. 다들 기다린다. 담임선생님은 어제 다녀가셨다며?”

. 어젠, 어지럽고 눈도 잘 뜨지 못해서 더 혼났지.”

어두워지기 전에 가보라는 얘기를 자꾸 하는 바람에 일어서서 나오려 하니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쓰게 웃으면서 손을 살짝 흔들고 나왔다. 곳곳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솟아오르니 공장지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이 검붉게 타고 있었다.

민애는 그다음 날 눈이 꺼벙해 가지고 학교엘 나왔다. 전처럼 종종 복도에서 만나면 몇 마디씩 얘기하다가 낄낄거리고 지나치면서 뛰놀곤 했다. 토요일 대청소날에 유리창을 닦을 기회가 오면, 민애가 창틀에 올라가 앉는 걸 보고 잽싸게 마주 보고 닦을 요령으로 뛰어올랐다. 오랫동안 둘만이 얘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어느 일요일, 동네 형들과 같은 또래 애들과 어울려 칡뿌리 캐러 가면서 그 난민촌을 먼발치로 지나갈 때도, 언덕바지에서 놀다가 괭이를 어깨에 메고 가는 석이를 먼저 알아보고 민애는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석이야! 칡뿌리 캐러 가는구나. 많이 캐!”

긴 겨울방학이 지나고, 6학년이 되면서 이번에는 서로 다른 반으로 갈라져, 얼굴 보기도 쉽지 안 했다. 석이는 과외를 하고 나면, 어두워지고서야 교문을 나섰고, 그런 때는 산으로 질러가질 못하고 큰길로 다른 애들과 같이 돌아서 집엘 갔다. 가끔 전교생 조회가 있을 때 잠깐 보고, 점심시간에 스쳐 지나며 몇 마디 나누는 정도였는데, 진학을 아예 포기하고 과외수업을 받지도 않는지 과외가 끝나고 그 애가 속해 있는 반 입구에서 기다려 봐도 보이지 않았다. 2학기가 되자, 학교에서는 시내 명문 중학교에 한 명이라도 더 붙여 볼 요령으로 정신 못 차리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후기 입시까지 치르는 와중에서 졸업식에도 참석을 못하는 바람에 석이는 민애를 결국 마지막 날까지 만나질 못했다.

석이가 중학교엘 다닐 때는 그 애 생각을 거의 해보지 못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어느 여름날 방천길 옆 팽나무 밑에서 친구하고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다가 어떤 젊은 여자가 지나칠 무렵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민애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교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잽싸게 몸을 웅크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픈 맘이었다. 그 애는 결국 상급학교 진학은 첨부터 포기하고 공장엘 다니는 것 같았다. 밤일을 들어가는 행렬이 이어지는 시간이었고, 멀리 방직공장의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구슬픈 유행가 소리가 바람결에 날려 커졌다 사라졌다 하며 들려오고 있었다. 민애는 석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날도 근처에 숨어서 총총히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또 그다음 날도 그렇게 그 애의 뒷모습만을 쳐다봤다. 민애의 따뜻한 손을 잡았던 오른손을 슬그머니 만져 보았다. 그러면서 벌써 4년이 지나는 동안 무심하게 지냈던 자신을 무척이나 책망을 하면서도 선뜻 앞에 나설 용기가 도저히 나질 못했다. 어떻게 만날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지금 나서는 일이 그 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영순이를 비롯해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주축이 되어 졸업 후 처음 하는 초등학교 동창회를 조만간 개최한다기에 기대를 걸었으나, 진학을 하지 못한 애들이나 물론 민애도 나오지 안 했다..

그 후 근무시간이 바꿔진 탓인지 그 시간대에 며칠을 기다려 봐도 볼 수가 없었다. 진즉 앞에 나서서 연락처라도 알아 놨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를 하였지만,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그 난민촌에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애 집엘 찾아가고픈 생각이 들었는데도 결국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서울로 유학 가던 날 우연히 그 앨 기차에서 만났다. 종착역에 가까워지자 내릴 때 지체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 객차 앞쪽으로 옮겨가는 성급한 사람들 틈에 끼여 가다가, 거의 영등포역에 다 와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민애를 보고, 깜짝 놀라 앞 좌석에 끼어들었다. 하고픈 말이 많았던 거 같은데, 별로 하지도 못했다. 시간도 없었지만 분위기가 이미 파장 같았다. 긴 여행에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고, 석이는 그저 반가운 맘에 별 뜻도 없이 수선을 떨면서 얘기를 했다.

어디 가는 거야. , 이거 얼마 만이냐? 민앤 처녀가 다 됐네.”

그 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영등포에 일이 있어서 자주 다녀. 넌 벌써 고등학교는 졸업했지?”

, 학교 때문에 서울로 가는 길이야.”

석이, 그래도 넌 잘 풀려 가는구나.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무슨 얘기야. 내가 특별히 잘한 거 없어. 부모덕에 지금까지 밀려온 거지. 민앤 어떻게 지냈어?”

바쁘게 살았어. 지금도 바쁘고.”

그래,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짧은 만남 동안에 초등학교 시절 얘기 말고는 할 얘기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개구리 잡아먹던 일을 꺼낼 수도 없었고, 속사정도 모르고 같이 중학교엘 가자고 얘기했던 일이나, 동네 시냇가 팽나무 옆에서 몇 차례 봤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방직공장에 다녔던 일이 그렇게 알려졌다는 맘 아픈 추억을 되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이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추억의 뒤안길로 접어진 일들이라 생각했다. 곧 헤어져야 할 때가 됐는데도 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것을 묻지도 못했지만, 그 애 또한 아무렇지 않게 돌아섰다. 그리고 영등포역에서 내려, 수많은 인파 속에 묻혀 가는 뒷모습을 또 바라보면서 어이없이 변해 버린 자신을 힐책하고 있었다.

민애는 그렇게 그의 길을 가고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 못한다는 민애를 위로해 주고, 도와주고 또 장차 꼭 혼인할 거라 결심을 했던 그였지만, 막상 그렇게 만났을 땐, 이젠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무의식 속에서라도 민애를 더 이상 결혼상대로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이기심이 연락처라도 묻지 않고 떠내 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속에는 시큰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후 석이는 대학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직장생활까지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지도 10년이 넘어서야, 잦은 나들이를 하게 되었지만, 필요한 일만 보고 훌쩍 가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엊그저께 연휴가 된 식목일을 피한 다음날 실로 20여 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제외하고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고향을 옛 친구들 찾아왔다.. 고속버스터미널은 다리 옆에 있었는데, 이곳은 어디냐? 아무리 둘러봐도 기준이 될 만한 것이 없어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잠시 후 중학교 선생이 된 정호가 마중을 나왔다. 옛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초등학교에서 한 십리나 떨어져 있던 연못을 감싸 도는 좁은 길로 들어와 보니, 연과 창포는 일부나마 그 시절의 자태를 기억하게 해주나, 주변 경관들이 너무 많이 변한 터라, 착잡한 맘만 더 할 뿐이었다. 근처에 우거져 있었던 노송들은 다 베어 없어지고, 대학교 건물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었는데, 소나무 없는 산은 그저 나지막한 동산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연못으로 흐르는 실개천에서 새우도 잡았었지만, 문명의 발달은 이곳까지도 물 색깔이 탁한 폐수를 선사해 주고 말았다. 이곳이 우리가 살았던 동네에서도 가까우니, 정호와 같이 사시사철 이 구석 저 구석 발자취가 안 닿는 데가 없이 무수히 쏘다니던 곳이다. 눈 많이 왔던 날, ‘어느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라는.’ 커다란 비석이 서있는 전주 이 씨 시조인 이한(李翰)의 묘역인 조경단 널찍한 뜰에서 눈썰매 타다가 쫓겨 도망갔던 일이며, 자칫 길 잃어버릴 정도의 깊은 소나무 숲, 그 사이사이에 잔디가 깔려 있는 널찍한 공터, 삼 형제 소나무의 위용스런 모습, 이름과 날짜를 새겨 놨던 깊숙한 곳의 오리나무들도 이제는 한낱 뇌수의 추억 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정호는 지금 이 정도가 남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얘기를 하며 몇 년 후면 이나마 깔끔히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라 얘기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산 안쪽으로는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조만간 다시 올 거라 생각하고 발길을 돌렸다. 정말로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저녁나절이 되어서 신시가지 쪽으로 나왔다. 홍어탕에 소주잔을 걸치면서, 정호는 신역 앞으로 큰 길이 뚫리고 좌우로 관공서 등 큰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들은 예전의 과수원 자리며, 피난민 촌이 들어 있던 곳이고, 더 올라가면, 또 공동묘지 터라는 얘기를 해줬다. 민애랑 나란히 지나치던 산등성이며, 개구리 뒷다리 구워 먹던 계곡이나, 따뜻한 그녀의 손을 잡았던 그 검바위도, 칡뿌리 캐러 가던 길, 왕잠자리 잡으러 저수지 찾아다니던 논 밭길들이 있던 곳들이 다 신시가지가 되어 버렸는데, 다행히 초등학교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했다. 그리고 뜻밖에 낭코의 죽음도 알려줬다.

벌써 10년이나 된 일이지. 만취한 낭코가 엿판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집으로 오다가 트럭과 부디 치면서 유명을 달리했어.. 그 보상금으로 지네 집은 살려 놓고 갔구먼.”

, 무정한 세월에 변치 않은 게 뭐가 있겠냐마는, 개고기 낭코가 그렇게 일찍 갔구나. 다들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해서 중학교도 못 갔지.”

그래도 뽕까는 장가를 잘 가서 사내애들만 셋이나 키우고, 억척스러운 마누라 허고 과일 장사를 잘한다.. 오늘 니가 온다는 거 알지만, 가게 때문에 나올 수가 없고, 저녁 늦게라도 갈 테니 묵을 여관 이름이나 알려 달라고 하더라.”

알았어. 그런데, 혹시 그동안 민애 소식은 들은 게 없었니?”

민애? , 숙사에 살던 정민애 말이야? 넌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꽤나 오래된 일인데. 20년도 넘었을걸. 천안역구내에서 급행 지나가라고 대기하고 있던 전라선 완행열차가 뒤를 받치면서 전주에서 탄 승객들이 엄청 많이 죽었잖아. 그때 불행하게도 그만 사고를 당했었지. 여기선 긴급 동창회도 열고 난리가 났었는데, 넌 서울에 있어서 연락이 안 됐던 모양이구나.”

석이는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물었다 놨다 여러 차례 하더니 눈물을 글썽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 서울 가는 완행열차에서 만나고서 불과 2년도 못되어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야? 그것도 모르고, 옘병! 헛거야. 헛거! 살아 있는 것도 헛것이고. 배경이 뭔데, 좋아하는 맘도 가식으로 감싸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위선자. 나는 위선자다!’

주중이 되어 늦게 까지 어울리지도 못할 처지였다. 석이도 내일 아침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고, 모레면 또 태평양을 건너가야 할 판이었다. 이제 모두에게 안녕을 고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술기운도 오르고, 눈물도 흘러서 길이 몹시 흔들리고 흐렸다. 그리고 옛날 숙사 근처라는 이곳 어느 여관에서 잠들기 힘든 밤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