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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마당/문고

배신의 장미 - 바람거사(2009)

by 바람거사 2022. 6. 3.
 

 

                                                     배신의 장미

 

(1)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돼버린 지 20년이나 흘렀고, 그동안 사내애들을 둘씩이나 낳아, 그 애들이 이제 곧 대학엘 갈 나이가 됐는데도, 성호는 지금이라도 합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버리고 수용하겠다는 태도였다. 정 없이 결혼하여 사내애 하나만 낳고 몇 년 후에 떠나버린 아내에 대한 미련도 없이 곧바로 재혼을 하여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그의 인생은 이미 방향을 잃었고, 술로써 지난 20여 년을 지내는 바람에 이제 그한테 남은 건, 당뇨병에 합병증까지 생겨서 얼마 전까지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다져진 튼튼한 몸은 이제 피골이 상접하고, 머리는 반백이 되어 버려, 몇 해 전에 만난 사람들도 그를 잘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단지 그런 세월 속에서 그의 부리부리한 눈빛만 변하지 않은 듯하였다. 하여튼, 빗나간 첫사랑의 상처가 그렇게 크고 말았다. 

 

성호와 현옥은 한 동네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래서 둘은 무척 가깝게 지냈지만, 그만큼 서로 무심하게 지내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져야했지마는 서울이라는 같은 하늘 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현옥은 집안이 넉넉지 못하여 대학진학은 이미 접어두고서 상고에 들어갔고, 성호는 시골에서 중학을 마쳤지만, 공부는 상위권에 들었던 터에 영등포에 있는 꽤 이름이 알려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도 가정형편을 생각하여 처음부터 사관학교를 가려고 맘을 먹었었고, 결국 성호가 사관학교를 진학했을 무렵, 현옥은 사회에 첫발을 디뎌 놓게 되었다. 

 

성호는 주말 외출 때, 현옥을 찾았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주말만 기다려지는 처지가 되었다. 성호의 맘속엔 현옥의 존재가 점점 한 여인으로서, 생의 반려자로서 굳혀져 갈 무렵, 그녀는 이미 사회물에 젖여 주변의 남자들을 자주 대하면서 성호라는 존재가 단지 친구 이상의로 부각되지 못하고, 나름대로의 꿈을 꾸고 있었다. 성호는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움이 있지만, 좀 못 낫다는 생각도 항시 들어왔고, 더욱이 그의 가세가 별 볼일 없이 위축돼 온 사실도 잘 알고 있기에, 한편 그녀는 그녀 앞에 백마를 탄 왕자를 기다리는 맘으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호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비행훈련을 받으러 지방에 내려갈 무렵에는, 이미 둘 사이는 보이지 않는 큰 성벽이 들어선 느낌이 되었다. 지방에서 비행훈련을 하다 보면, 주말에 서울에 올라오기가 쉽지가 않아서, 현옥이 비행부대로 면회를 와서 같이 주말을 같이 보내기를 갈망했지만, 현옥은 맘의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성호는 틈나는 대로 전화를 하여 설득을 하였지만, 그럴수록 현옥은 차분하게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변명만을 되풀이하면서 교육기간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내려가질 안 했다. 그러나 붙들려고 노력을 할수록, 현옥 또한 그만큼 반력이 생겨서 점점 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멀어져 갔다. 그러다 보니 무척 오랜만에 만날 때에도 둘은 자주 다투었다. 

 “내가 이제 직업 군인이고, 내가 그냥 널 이렇게 멀리 둘 필요도 없으니, 우리 빨리 결혼해서, 생활의 안정을 찾자.”

 “아직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성호도 비행훈련이 다 끝나고, 예하부대로 배속을 받으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하는데―.”

현옥은 이렇듯 당장은 곤란하다고 변명을 하면서 그녀의 속내를 감췄다. 

 

성호는 맘이 더욱 조급하면서, 주말에는 부대 근처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 과묵한 성격 탓인지 술이 들어 갈수록 맘이 풀어지기보다, 울화가 더욱 치밀었다. 자기가 지금껏 죽으라면 죽는시늉에, 섶을 지고 불속에라도 들어가라면 그리 하겠다는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현옥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더욱이 이제 술을 입에 댔다 하면 항시 폭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술이 과해 지면, 소란을 피우고, 접대를 하던 호스티스를 반 강제로 끌고 나갔다. 그런 일들이 생기면서 비행대대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또 그의 비행훈련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중급과정을 이수하기 전에 도태의 쓴 잔을 마시고 말았다. 

 

조종 장교에서 일반 장교로 병과가 바꿔지면서 그는 다시 교육사령부의 미혼자 숙소에 기거하면서, 밤마다 여전히 아마 전보다 더 술을 대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현옥은 더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고,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용이치 않았다. 물론 현옥도 방황했다. 직장생활의 연륜이 쌓여서 5, 6년이 넘어가니, 사회의 물이 어떻게 변해간다는 건 이제 터득할 일이었는데, 성호가 안일하게 자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자학하는 자체가 더더욱 싫어지고 있었다. 

 

현옥의 외모는 뭇 사내들에게 호감을 살만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녀의 나근나근한 목소리나 눈이 먼저 감기며 화사하게 웃는 모습은 주변 남자들을 설레게 하였다. 심지여 혼담까지 오가는 경우도 생겼다. 물론 현옥도 맘이 편하질 못하여 내심 고민을 해온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호를 자기의 일생의 반려자로 허락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너무도 서로를 잘 알고 지낸 자체가 싫었고, 이제는 애틋함도 없이 같이 어울리는 그 자체가 숨이 막힐 일이었다. 그러면서 현옥은 백마를 타고 신선하게 달려올 동화 속의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호가 일반병과 교육을 마치고, 예하부대에 배속을 받았다. 이제 동기생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여, 부대 근처에서 조촐한 신혼살림을 꾸리고 있을 무렵, 그는 아직도 독신자 숙소에서 기거하면서 술을 대할 날들이 많아져갔다. 그러던 어느 주말 성호는 모처럼 서울엘 올라갔다. 두 달 만에 현옥을 만났지만, 성호는 현옥한테 매달리면서 자기와 결혼을 해달라고 말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미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직업군인으로서 정도가 아닌 곁길로 들어선 자신이며, 매일 술에 찌들어 사는 자신이 싫어졌지만, 현옥이 그런 자기를 스스로 위로하면서 수용한다면 몰라도, 먼저 통사정을 할 수가 없었다. 사무실이 있는 광교 근처 다방에서 만났다가 광화문 낙지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마 가슴이 확확 타는데 맨 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술 생각이 간절했다. 그날따라 소주 맛이 너무도 달았다. 술맛이 쓰지 않고, 그렇게 달게 느끼는 날은 술이 엄청 들어가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연거푸 마셨다. 안주도 필요 없었다. 현옥도 답답한 맘에 몇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지금 자기 앞에서 자신을 저리 학대하면서 독한 술을 퍼붓는 성호가 불쌍하다고 느꼈지만, 애정 어린 맘으로 그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두 어 시간 후 성호는 이미 정상이 아녔고, 횡설수설 말이 많아졌지만, 그의 핵심은 제발 자길 받아 달라는 얘기였다. 

“내가 현옥 일 고생시키진 않아. 돈으로 목욕은 못 시켜줄지라도,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는 있지. 해가 갈수록 진급도 하고 수입도 많아지고―. 우선은 그만하면 된 거 아냐? 언놈은 별거 있나?”

 

하지만, 현옥은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성호는 계속해서 마셨고, 현옥은 그를 그대로 놔뒀다. 오늘 이 괴로운 시간이 지나면, 썰물 뒤에 밀물이 들어서듯이, 이제 곪아 터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모든 괴로움과 응어리가 같이 빠져나갈 거라 생각했다. 밖으로 나온 성호는 몹시 휘청거렸다. 근처 여관방에 성호를 겨우 눕혀두고 얼마 동안 뒷바라지를 해주고, 그가 깊은 잠이 든 걸 보고 그녀는 서둘러 여관을 나왔다.

 

그리고 겨우 합승을 하여 집으로 가면서 현옥은 괴로워했다. 주변에서 형식적으로 자주 만났던 임 과장과 비교를 해봤다. ‘임 과장도 날 죽도록 그렇게 좋아할까? 왜 내가 성호를 인정치 못하는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임 과장? 허우대도 번지르하지. 여자 경험도 많아서 도통 진실을 알기는 힘이 들지만, 나하고 만날 땐 보통 이상의 물질 공세를 하는 걸 보면 날 그렇게 잠시 즐기자는 여자로 대하진 않는 건 같은데. 단지 틈만 있으면, 껴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 카사노바 같은 기질이 있어서 탈이지만, 남자가 그런 기질도 없으면, 무슨 남잔가?’하는 이상한 비약도 해봤다. 그러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진실한 태도가 안 보인다고. 집안에서는 성호와의 혼인이 그래도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얘기가 수시로 나왔다. 우선 믿을 만하다는 얘기였다. 직장도 안정이 되고.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일요일 밤을 넘기면서 며칠을 생각을 해봤다.

 

일주일이 지나고 현옥은 결심이 선듯하였다. 그래도 날 위해서 죽을 각오가 돼있는 성호가 제일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음 주 말에 지방에 있는 부대로 내려가겠다고 전화를 해줬다. 성호는 길길이 뛰면서 기뻐했다. 이제야 모든 게 정리가 된듯하고 앞으로는 둘만의 생활을 위하여 모든 걸 반듯하게 하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듯했다. 주말을 기다리는 맘이 무척 길었지만, 이런 정도는 지난 몇 년에 비할 바가 아니라 생각했다. 새롭게 살리라 생각하니 세상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하지만 그 주말이 다 지나가도 현옥은 나타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때 임 과장과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나간 그녀는 토요일 밤이 지나고 일요일이 되어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2) 

일요일 오후가 되자 성호는 도저히 이대로는 기다릴 수가 없어서, 현옥이 자취를 하는 주인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금요일 아침에 출근을 하러 나간 후로는 얼굴을 못 봤다고 얘길 하였다. 성호는 초조해지기 시작하여 안절부절못하다가 뭔 가를 결심하더니만, 통금이 지나서 돌아 올 걸 염두에 두고서 부대에서 전투훈련이나 작업을 할 때 입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서 군화 끈을 조이고 모자를 깊숙이 잡아 내렸다. 그리고 곧바로 고속 터미널로 나갔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현옥이 자취하는 집으로 서둘러 찾아갔다. 

 

이미 땅거미가 진 골목을 서둘러서 들어서니 그녀의 자취방은 기대와는 달리 어둠에 쌓여있었다. 맘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올 때까지 혹 무슨 피치 못할 사고라도 생겨서 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서둘러 왔었는데 말이다. 기대는 실망의 늪으로 다시 곤두박질쳐버리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인집으로 들어가서 아주머니와 한참을 뭐라 얘기하더니만 힘없이 대문을 나섰다. 

 

현옥은 다음날 점심때가 지나고 오후 1시경에 들어와서는 황급히 이사를 가겠다고 하며, 같이 왔던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황급히 짐을 꾸리고서 서둘러 삼륜차를 타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중에 성호가 들리면 전해주라고 하면서 편지 한 장을 주고 갔다고 하였다.  

  “아주머니, 무슨 이유로 그리 서둘러서 방을 빼고 야반도주를 하는 거같이 이사를 간다고 했습니까?”

  “그게 말이야, 나도 하도 이상해서 물었었지만, 그냥 멀리 간다는 말만 했구먼-.”

  “어제오늘 어떤 남자한테서 전화가 온 적도 없었고요?”

  “현옥이 찾는 전화라면 딱 한 번 있었었지. 부산 사는 언니가 전화를 했었어.  금요일 저녁때이었지. 아마.”

  “근데, 이제 색시가 그리 없어져버려서 하는 얘긴데, 사실은 금요일 아침에 하는 얘기가 일요일 오전까지 방을 빼겠다고 하여     서 오늘 보증금을 서둘러 돌려줬다네.”

  “아니 그럼, 오전에 제가 전화를 하였을 때 알려줬으면 좋았지요. 네 참!”

 

성호는 엉겁결에 아주머니한테 화풀이하듯 말을 내뱉었다. 순간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였더니,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서, 

  “아니, 색시가 댁한테는 절대로 비밀을 지켜달라고 해서 말이지. 어쩌다가 둘 사이가 이처럼 묘하게 깨져버렸나 그래?”

그러고 나서, 일주일 전에 부산엘 다녀오겠다는 얘길 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부산에서 원양어선 수리소에서 일하는 형부가 자기 친한 후배를 소개해 줬다고 하면서, 그는 국제 화물선을 타는데, 몇 달에 한 번씩 부산에 오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리 서둘렀다는 얘기였다.

 

물론 성호는 현옥의 형부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바로 손위 언니 남편이라 전에 여러 차례 만난 일도 있었지만, 서로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선후 관계 이기고 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무슨 해양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얘기까지 잘 알고 있었는데, 학교 졸업 후에 2등 기관사로 수년 동안 배만 타다가 어느 해 시골로 오더니만, 현옥의 언니하고 결혼을 하고 부산으로 같이 내려갔다. 결혼식 때도 만나서 인사도 하고 또 같이 술도 마신적이 있었다.

 

성호는 이제야 모든 게 확실한 그림이 보였다. 그러니까 현옥은 금요일 저녁때 임 과장을 만나러 간 게 아녔고 부산엘 간 거라 생각했다. 바람기 많은 직장 상사를 꼭 밖에서 만나서 새삼 정리를 할 필요도 없을 일이었다. 평소에도 다른 여직원들하고 한데 어울려서 소문난 식당이나 나이트클럽을 여러 차례 따라다녔고, 미혼인 임 과장이 유독 현옥에게 관심을 더 두고 있었다는 얘긴 전에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얘기였다.

 

지금 문제는 형부가 소개를 시켜준 그 어느 남자를 적어도 두어 달 전에 자신도 모르게 비밀리 만나고 나서 성호와 저울질을 하다가 무슨 계기가 있어 그리로 낙점을 해버린 거라 생각하니, 자신이 또 한 차례 뒤통수를 얻어맞은 거 같은 배신감이 온몸을 휘감으니, 아무리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별러왔어도 순간 질투 내지는 굴욕감이 머리끝까지 뻗혔다.

 

성호는 터덜거리는 발길을 돌리자마자 주인집 앞에 서있는 외등 밑에 서서 현옥이 주고 간 그 편지를 서둘러 찢어 봤다.

‘못된 년 이제는 그만 잊어주시고, 가시는 길에 꼭 성공의 열매가 맺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조만간 결혼합니다. 다 용서하세요. 아니 용서를 못하시겠다면 절 절대로 용서하지 마세요. 화냥년이라고 생각하시면 실컷 욕이라도 하세요. 죄송합니다.’

 

성호는 그 짧은 편지를 읽자마자 있는 대로 찢어발기더니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자신을 겨우 운신하여 서울역 근처로 나갔다. 먼저 역 앞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들렀더니 10시 반 무렵에 이미 막차는 떠난 후였다. 별도리 없이 자정에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완행열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성호는 새벽 3시가 넘어서 부대 독신자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소주병을 움켜쥐고 벌컥벌컥 드려 마시면서, 욕을 섞어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좌우로 길게 붙어있는 숙소 몇 군데에서 잠시 동안 불이 켜지고 몇 명이 나와서 웅성거리다가 성호의 눈치를 보더니만, 모두들 말릴 엄두를 못 내고 하나 둘 되돌아갔다. 성호는 몇 병을 마셨는지 그냥 거실 바닥에 나무토막같이 쓰러져버렸다.

 

몇 달 후 12월 중순에 현옥은 서울 시청 앞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해외를 나다니는 국제화물선을 탄다는 그 2등 항해사 하고 결혼식을 올렸을 때, 성호는 차마 식장엘 들어가지는 못하고 호젓한 곳에 몸을 숨기고서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현옥의 모습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가  여기 온 이유는 그 자식 상판 태기가 어떻게 생겼기에, 이제는 누가 뭐래도 자신에게 돌아오겠다고 속삭이며 철썩 같이 약속을 했던 그녀가 그렇게 쉽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서 발길을 돌렸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 친구는 이제 연적이 아닌, 아니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의 잔을 마시게 만든 저 신랑의 낯짝을 꼬나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 현옥은 항시 언덕 위의 카사비앙카를 그렸지. 그리고 나하고 영화를 같이 보러 가더라도, 멋있게 생긴 배우를 보면 내가 민망하도록 감탄을 하며, 맘속에는 언제고 자기한테 다가 올 백말 탄 멋있는 왕자를 그렸던 거야. 나는 그저 못생기고 왜소한 마부 같은 존재로 생각했었나? 내가 너무도 귀찮게 매달리니까, 마지못해 끌려 다닌 거야. 허지만, 내가 허우대는 저 친구만큼은 안 되어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뱃놈에 비하겠어? 그래도 나는 대한민국 정규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인데―.”

 

현옥은 그 후로 부산에 내려가서 신혼살림을 차렸고, 남편은 다시 배를 타고 해외를 나다녔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성호도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식으로 동료들의 성화에 못 이겨 참한 색시를 소개받고 얼떨결에 결혼을 하고 말았지만, 맘속 응어리는 세월이 흘러도 앙금으로 남아서 항시 개운치가 못하였다. 그 앙금을 없애려고 매일 술에 절여 지내고 말았다.

 

세월이 흐를 만큼 흘렀나 보다. 중위 계급장을 달고서 미친놈같이 현옥을 찾으러 서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선임 중령이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마신 술로 건강도 나빠지면서 근무성적도 뛰어나지 못하는 판에 자주 병원신세를 지고 있을 무렵에, 성호는 그동안 간간이 들려오는 현옥의 근황을 심각하게 접하게 되었다.

 

(3)

어느 토요일 오후, 성호는 무척 오랜만에 시골 고향집에 들렀다. 갑자기 노환이 더욱 깊어진 홀어머니를 만나 뵙고 잠시 큰길로 나왔다. 그런데  시외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선술집 앞을 지나치다가, 의사가 그리 간곡히 경고를 줬는데도, 예전에 친구들과 즐겼던 텁텁한 막걸리를 딱 한 사발만 마시기로 하고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너무도 뜻밖에 현옥의 형부를 만났다.  

  “아니 형님 아니십니까? 이게 얼마 만입니까?”

  “어, 문 중위! 아니지 이제 계급이 어떻게 되나? 그동안 별이라도 달지 않았나?”

  “별은 무슨 별을요. 만년 말똥 2개죠.” 

 

현옥의 형부는 그동안 자기도 국제화물선 타는 기관사 일을 진즉 그만두고 선박 수리회사를 전전하다가 지금은 부산에서 횟집을 시작했는데 그것도 시원치 않아 걷어버리고, 또 무슨 일을 할까 궁리도 할 겸, 시골로 왔다고 하였다. 성호는 건성으로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서, 항시 앙금으로 남았던 현옥의 잔상에 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바로 현옥의 안부를 물었다. 

  “어, 그래-. 자네가 옛적에 한동안 처제 하고 잘 지냈었지?”

  “벌써 20년도 넘게 지난 일이네요. 어때 현옥은 잘 살고 있지요?”

  “음, 연년생으로 낳은 아들 둘 다 군에 갔구먼. 뭐 이제 좋으나 싫으나 같이 지내는 거지. 그 후배도 배 타는 걸 그만두고는 잘 풀리지 못해서 고생을 좀 했지-. 그때 내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네와 처제가 안정한 생활을 하면서 재미있게 지낼 터인데 말이야. 참. 인생사 앞날을 누가 점쳤겠어?”

 

현옥의 남편은 해가 갈수록 미모가 남다르게 빼어나고, 항시 매력적인 목소리에 눈웃음까지 곁든 현옥에 대한 의처증이 생겨,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출항을 여러 차례 미루다 가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항해사가 배를 타지 않으면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어렵사리 선박회사 사무직으로 취직을 하였지만, 수입이 신통치 않아서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부부가 같이 재래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장사가 어려워지면서 이 친구도 매일 고된 일이 계속되는 데도 첨 생각한 것보다 좀처럼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속이 타들어간다는 핑계로 집에 와서는 술을 자주 대하게 되었고, 한편 현옥의 고왔던 홍안은 검게 그을린 데다 잔주름도 잔뜩 진 그야말로 시장 아줌마가 다 돼버렸다. 그리고 그 남편은 어쩌다가 친구들하고 회식이라도 갖게 되면, 술에 걸식이 된 사람같이 마셔 대고 나서는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아무데서나 꼬꾸라지는 버릇도 생겼다.

 

성호는 그동안 먼 소문으로만 반신반의로 듣다가 이런 맘 아픈 소식을 바로 들으니, 맘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결국 자신도 그동안 자신을 학대하며 마구잡이로 마신 술로 인하여 몸이 다 망가진 사실을 구태여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형님은 여전히 건강하시고요? 술은 아직 잘 드시는지-.” 

  “옛날 같지는 않지만, 난 많이 절주하고 있지. 이젠 과음까지 가도록 마시지도 못하고 취기가 올라오면, 더 못 마시겠는걸.”

그러면서 성호가 따라주는 막걸리 사발을 쭉 들이켰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밖에 김이 나는 순대나 돼지머리며 족발들이 푸짐하게 보였다. 성호는 군침을 삼키며 아주머니한테 골고루 섞어서 큰 접시로 모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한 주전자가 비워지고 다시 새 주전자로 사발을 연신 채우면서 현옥의 형부는 말을 이었다.  

 “음, 그 현옥의 남편 되는 후배 말이야. 젊어서는 허우대도 멀쩡하고 능력도 있었는데, 무슨 연유로 그 고약한 의처증이라는 게 생기는 바람에 잘 나가던 직장 때려치우고 그리 인생살이가 꼬여 버린 게, 참, 허망한 건지 뭔지 갈피를 못 잡겠더군.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려운 거지만, 처제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이젠 몸도 엄청 불어 옛적의 아리따운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고 다짜고짜 소리나 벅벅 지르며 장사에 열 올리는 장똘뱅이 아주매가 다 돼버렸단 말이야. 자네같이 고급장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게 상상이 안 되지?”

  “무슨 말씀을요. 저희들도 그리 넉넉하게 사는 건 아네요. 당장 아파트 걱정은 안 하고 관사에서 살지만, 언젠 가는 큰돈이 들어가는 거죠. 국록을 먹는 직업군인이 잘 살면 문제가 있는 거고요.”

  “그래도 생활은 안정되지 않은가? 아니 부부가 맨 날 돈 때문에 으르렁대고, 남편은 홧김에 오나가나 술이나 퍼마시고. 요샌 거기도 몸 생각해서 절주를 한다지만, 분위기 좋다 하여 조금만 과음하면 어디서나 지 몸도 못 가누고 누워버리고 말이야. 참 안됐어.”

 

그러나 현옥은 이제 그런 일도 식상한 지 오래되어, 모든 걸 포기해버렸는지  더 이상 맘 상할 건더기마저 없어져버렸다. 어느 초여름, 비바람이 유난히 세차게 불던 날, 부산서 좀 떨어진 기장 포구 근처 해안가에 바로 붙어있는 천막으로 둘러친 횟집에서 현옥의 언니 부부와 더불어 서울에서 오랜만에 나들이 온 친한 친구 부부와 더불어 회식을 하는 중에 소주 몇 배가 돌아갔는데,천막이 요동치며 벗겨져 버릴 것 같은 비바람 치는 분위기가 술맛을 돋운다며, 식사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열심히 받아 마시고는 젤 먼저 눈이 풀어지면서 혀가 말렸다는 거였다. 그리되자 현옥은 부산 시내로 돌아오는 도중에 어설프게 웃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변명을 하였다. 

“이젠 나이가 들어가니까 조금만 마셔도 금세 저래요. 완전히 맛이 갔어요. 2차는 제가 살려했는데 하필 비까지 억수로 오고. 저 혼자 저이를 택시로 옮겨 태우기도 쉽지 않으니, 제가 그냥 타고 집에 가야겠네요. 죄송해요.”

하면서 나머지 일행들을 호텔에 내려놓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까지 해줬다.

 

성호는 가슴이 아팠다. 어쩌다가 모두 다 이런 고약한 시나리오 같은 삶을 사는지 울화가 터졌다. 술이 이래저래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망쳐 놓는 구나라고 중얼거리다가, 이미 망가진 자신을 잠시 생각해봤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그리 살아온 현옥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을 만큼 맘이 아렸다. 성호는 이제는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라 벼르더니만,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현옥의 형부한테 단호하게 물었다. 

 “형님! 현옥이 사는 집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거 있으면 좀 알려 주세요. 이제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 아주 오랜만에 안부라도 묻고 싶습니다.”

 

그날 저녁 성호는 어떻게 해던 간에 다시 만나 보겠다는 술 취한 생각이 가시기 전에, 떨리는 손으로 잠시 주저하더니만, 수화기를 들고서 다이얼을 돌렸다. 

  “아, 여보세요? 거기―.”

  “누구싱교?”

대답 대신에 현옥은 귀청이 달아날 정도로 큰 소리로 되물었다.  

“나, 성호야. 시골에 다녀왔다가 형님을 만나서 소식 전해 듣고 안부전화를 해보는 건데. 벌써 한 20년이나 됐나?”

“누구라고 예? 성호? 아, 그동안 잘 지냈능기요? 오빠, 넘 오랜만이네-.”

 

둘은 모두 다 그런대로 잘 지낸다는 말로써 서로를 대충 감싸는 인사를 나눴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꼭 할 얘기가 있으니 좀 만나자는 얘길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얼버무리다가 끊어버렸다. 그러나 성호는 뇌수 깊숙이 낀 앙금에서 다시 뭔 가가 강하게 들려오는 메시지에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이대론 안 돼. 다시 꼭 만나야 된다.’ 고 연거푸 별렀다.

 

그러나 성호는 그날 밤 속이 너무 쓰리고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서 이른 아침 겨우 집으로 돌아온 후로는 정신을 놓고 말았다. 집에서는 서둘러 다시 기지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동안 힘겹게 싸워 온 간경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꿈이 아니고 정말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리따운 현옥이와 같이 사관생도 군청색 겨울 복장을 한 그가  햇볕이 내려 쪼이는 눈부신 광안리 해안 모래밭을 웃으며  끝없이 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