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석이는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도 과외지도에 얽매여 고향이라고 내려와서도 한 1주 남직 보낼 때는 주로 동생들하고 어울렸다. 어느 날 여동생은 제일 친하다는 친구 미선일 데리고 왔는데, 꼭 다문 도톰한 입술이 웃을 때는 너무도 화사하고 꾸밈이 없이 보여 무척 호감을 주었다. 붙임성도 좋아서 바로 오빠, 오빠 하면서 스스럼없이 지내게 되었고, 그가 머무는 동안 두어 차례 놀러 왔는데, 눈발이 약간 휘날리던 오후,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러브 스토리’를 같이 구경 갔다. 미선과 동생은 너무도 감격하여 눈이 살짝 온 어두운 밤길을 걸어오면서 시종 그 영화 얘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1주가 금세 지나고 그는 서울로 올라 가버렸고 그 후 일 년 이상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동생을 통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는 동안, 가수지망이라는 열병에 걸리면서 연예계에 진출하려는 험난한 길로 뛰어들었는데, 결국 우여곡절을 겪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길 들었다. 그도 대학을 졸업 후 3월 초 공군에 입대하여 20주 동안 기본 군사훈련 및 긴 기술교육이 끝나고 10월 말쯤 대구기지로 첫 배속을 받아 영외에서 동기생들과 같이 하숙을 하였지만, 전투기 정비대대에 소속된 그는 껌껌한 새벽에 출근을 하여, 마지막 비행기가 내리는 날엔 저녁 9시가 다 되어 퇴근하며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해가 바뀌고 봄이 올 무렵, 기지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갈 때인데 뜻밖에도 미선한테서 편지가 날아왔다. 반가웠지만, 미선이 동생과 절실한 친구인 탓에 조심스럽고 체면이 먼저 앞서갔다.
그녀는 재수를 하는 동안, 석이 아버지가 퇴직 후 경험도 없이 벌린 교복 장사를 동생과 같이 거들면서 반년이 넘도록 고생만 실컷 하다가 그 사업이 결국 거덜 나면서 금전적인 보상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미선은 방석집 같은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하며 힘들게 지냈다는데, 넉넉지 못한 집안의 도움 없이, 자신이 해내는 생활을 위한 수단이니 아무도 탓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미선은 대학을 꼭 마치겠다는 결심을 저버리지 않고, 언젠 가부터 대전으로 내려와 C대학 국문과에 적을 두고,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첫 편지가 온 후로 몇 차례 대전엘 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싸늘한 겨울 기운이 드리워진 어느 주말 오후 다방에서 만났을 때, 미선은 엉뚱하게도 밝은 노란색의 소매가 길고 티셔츠에다, X자로 된 멜빵이 달린, 몸에 착 달라붙는 짙은 감색 바지를 입고, 짙은 화장에 입술도 붉게 칠하고 나왔다. 그런데다 그녀는 질이 좋지 않은 남학생들하고 잘 어울린다는 말을 태연히 하면서, 알고 보면 다 좋은 애들이라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해댔다.
석이는 그녀의 말을 잠시 들어주다가, 슬그머니 감정이 격해지며 목소리를 높인 끝에, 컵 물을 그녀의 얼굴에 끼얹어 버렸다. 그녀는 ‘오빠가 무슨 자격으로 이러 지요?’라고 맞섰고, 그는 ‘왜, 오빠가 그렇게 하면 안 되냐? 객지에서 살면서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지. 그런 외모가 남들한테 주는 인상을 잘 알 텐데?’ 하면서 계속 맞섰다. 다방에 있던 사람들이 연신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눈길을 의식하며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미선은 거기서 별로 멀지 않은 기숙사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조금은 쑥스럽게 된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 운동장 주변을 거닐었다. 오후가 되면서 우중충한 날씨로 변했다. 해 묵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도열해 있는 언덕바지에 나란히 앉으면서 석이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녀는 '아니에요. 참, 제가 잘못했지요.' 하며, 케터린 지다 존스 같은 그녀 특유의 화사한 웃음을 지여 보였다. 미선은 눈치가 빨라 갑자기 돌변하여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하여 쉽게 영화나 소설 속의 여주인공을 자기와 동일시하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에 매료가 된 듯 감명 깊었던 장면을 얘기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내 웃으면서 들어줬다.
그런 일이 있고 한 달 후에 다시 대전엘 올라가 만날 때는, 청바지 차림의 수수한 옛 모습으로 나왔다. 옛날처럼 오빠, 오빠 하며 호들갑을 떨면서 그들은 유성을 지나 동학사 계곡에 봄나들이를 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노래를 잘 불렀고, 석이는 잘 치지 못하는 기타로 반주를 해주면서 근처 널찍한 바위에 정겨운 한 쌍의 연인들처럼 앉아 있었다. 봄기운이 완연하게 무르익어 가는 계곡에 여울져 흐르는 물소리는 언제까지 들어도 정겹기만 하였다. 한참 ‘새노야’를 비롯해서 ‘이별’ 등을 메들리로 부르고 있는 데, 위쪽에서 젊은 부부가 경청을 하더니만 남자가 슬그머니 일어서서 그들 주위를 천천히 맴돌고 가서는 소형 녹음기를 틀어 보이면서 말을 걸어왔다.
"이게 뭔지 들어보세요.”
“저건, 우리 노래 아냐?”
“예, 노래를 너무 잘하셔서 녹음을 좀 했습니다. 두 사람 정말 보기 좋습니다!”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 잠시 당황하다가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 남자분은 그 보다 연배로 보였고 머리가 짧은 거로 봐서 공군인지 육군인지 몰라도 장교로 보였다. 미선은 목소리도 좋고, 또 가창력도 무척 뛰어났기에 그냥 썩히기에는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지만, 모두 다 성공의 길로 들어서지는 못하는 세태가 안타까웠다.
여름의 막바지에서 8월 1일부로 고달팠던 지난 1년동안의 전투기 정비대대에서의 소위 시절을 청산하고 중위 진급을 하였다. 그리고 대전에 있는 교육사령부 기술 교관요원으로 전속을 가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을 즈음, 소사 집에 들렀는데 여동생이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선이 하고는 오빠 동생 이상의 관계로 진전이 되면 안 돼요.”
“왜 그런데? 몇 번 만났지만, 네 친구라서 신경이 많이 쓰이지-"
“정말이죠? 기집애, 대전에서 좀 만난 일로 오빠가 저를 무척 좋아하고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애예요. 오빠 속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하고는 많이 달라졌어요.―. 어느 누구보다 인정 많고, 활동적이고, 영리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친구는 물론 그 가족들한테까지 간이라도 빼줄 듯이 열성인 그 애를 잘 알지만―.” 그러나 동생은 그 이상 얘길 하질 않았다.
그런데, 석이가 대전으로 전속 가기 전에 미선은 이미 서울로 올라와 있었고, 전에 다녔던 그런 업소에서 다시 노래를 하면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 동생 친구면 어떻고, 서로 좋으면 되는 거지,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같이 쉬쉬하면서 다짐을 하는 데에 기분이 개운치가 않았지만, 얼마 동안 대전생활에 적응하느라고 신경 쓸 여지가 없었다.
한편 그는 전에 큰 여동생한테 선배들 중에 오빠하고 잘 어울릴만한 사람 있으면, 눈여겨봤다가 소개 좀 해 달라는 부탁을 지나치는 말로 하였었는데, 일 년 후 뜻밖에 지난 2월 초 한 선배를 소개받았고, 2월 말 졸업 전까지 두 번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서울에 남질 못하고 뜻밖에 누구한테 밀려서 부산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를 듣고서, 3월 초 그녀에게 첫 위로의 편지를 띄운 것이 계기가 되어 자주 편지가 오갔고, 주말에는 부산, 대전을 무수히 오가면서 정 들이기에 부심하였다.
반년 남직 지난, 초겨울 주말이었다. 부산에서 올라오는 그녀를 마중 나가러 막 하숙집 대문을 나가는데, 뜻밖에 미선이가 그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이미 석이가 대전으로 전속을 오기 전에 휴학계를 내놨고, 인천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려고 호적등본을 떼러 시골집에 가기 전에 그냥 들렸다고 하였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소문은 들었는데 꼭 언니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고 조르는 바람에 같이 대전역으로 나갔다. 좀 어색한 자리지만 여동생하고 제일 친한 여고 동창생이라며 소개를 하였고, 중앙동에 있는 어느 경양식 겸 술을 파는 카페엘 갔는데, 미선은 시켜 논 식사는 하지 않은 채 포도주만 들이켰다.
“식사도 하면서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다. 좀 천천히 마시고―.”
“이까짓, 포도주는 잘 마셔요. 걱정 마세요. 오빠!”
그러면서도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취기가 오르면서 말수도 많아지고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지난 몇 해 동안 석이는 몸과 맘이 고달플 때, 만나면 즐거웠고, 아껴주고픈 맘도 가득했지만, 결국 어떤 이유로든 그들 사이에 가로막힌 벽을 넘지 못했기에, 맘속엔 항시 씁쓰름한 여운이 남았었다. 미선은 그날 그들 앞에서 한없이 초라함과 좌절을 느꼈겠고, 그녀가 그곳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지는 순간부터 모두들 긴 밤으로 이어졌다.
늦은 오후, 웨이터의 도움으로 축 늘어진 그녀를 업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같이 뒤늦게 합석한 대학 동기인 이 중위는 이런 꼴을 보고는, 창피하다고 뒷전에서 따라오다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당혹스러운 부산 아가씨는 만감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면서, 그녀의 가방과 구토로 젖은 코트를 들고 묵묵히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들이 붐비는 주말, 중앙동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무슨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사람들은 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 가관이었으리라. 미선은 밑이 짧은 청바지를 입었던 터라, 허리 자락을 다 내보인 채, 축 늘어진 등치 큰 여자를 등에 업고 무거워서 휘청거리는 공군 장교 뒤에 웬 젊은 여자가 소지품을 들고 따라오는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도 쓴웃음이 나온다. 창피하다고 줄행랑을 친 그 친구가 몹시 야속하였다.
“개시끼, 그렇게 인정머리 없는 놈이 뭐, 나중에 신부가 되겠다고? 우라질 시키―!”
석이는 늘어질 대로 늘어진 미선을 업고 힘들게 걸음을 재촉했다. 한 번 내려놓으면, 도움 없이는 다시 업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사력을 다해서 걸었지만,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중앙동 보도에서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이 무슨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구름처럼 모였다. 다시 있는 힘을 다해서 간신히 치켜 업고 여관들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의 모습을 쳐다보며 뒤 따라오던 그 아가씨는 무슨 생각을 생각했었을까?
근처 여관에 서둘러 들어가서 그녀를 눕혔다. 석이 허리는 두 동강이 나는 것같이 아팠고, 땀으로 군복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 아가씨는 대전에서 밤 12시 무렵에 서울에서 막차로 출발한 부산행 준급행을 타야만, 아침 7시부터 시작하는 오전 근무를 해야 할 처지인데도 잠시 망설였다. 미선은 간간이 정신이 들어 ‘언니 미안해요. 저는 괜찮으니까 근무를 빠지면 안 되잖아요? 어서 내려가세요.’라고 했지만, 여관방에 둘만을 두고 갈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내려가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시외전화로 대리 근무자를 찾아 부탁을 해두고, 새벽까지 밤새도록 치다꺼리를 하였다. 석이는 너무 미안하여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고 멋쩍게 얼쩡거렸다가 벽에 몸을 기대면서 조는 듯 마는 듯 밤을 지새웠다.
그 아가씨는 근무를 하는 대신 여관방에서 구토가 나면 얼른 세숫대야를 받혀주고 연신 닦아내면서 밤새도록 미선을 돌봐줬다. 이른 새벽이 되자 구토로 젖은 코트까지 빨아서 널어놓고 세탁소에 맡기기까지 했다. 사실 힘든 결정을 해줬던 그 아가씨한테 빚을 많이 졌다. 지나고 나서 하는 얘기지만, 그날 그녀가 부산엘 그냥 내려갔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미선과 석이가 그동안에 형식적으로 쌓아온 오누이라는 선을 쉽게 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그녀도 그런 상상을 했었겠지만, 같은 여자로서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발길을 뗄 수 없었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미선은 그 후 E대학교 국문과로 편입을 하고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석이는 그 후로는 그 아가씨와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무르익어 가고 있었지만, 한편 그녀는 정리되지 않은 맘의 갈등과, 출가 후의 집안에 대한 걱정까지 불거지면서, 그와의 장래에 대한 어떤 약속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전역을 두 달 남겨 논 1976년 5월 초, 홀연히 미국으로 취업이민의 길을 떠나갔다.
그 후 석이는 전역을 하고 H건설에 입사를 하여 서울 현장 근무를 마친 뒤 다음 해 울산에서 건설 현장근무를 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부친이 운영하는 방앗간 기계를 고치던 중에 실족을 하여 머리를 다치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녀는 부랴부랴 일시 귀국을 하였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다시 인연의 끈이 연결되면서, 일 년 후인 1978년 9월 중순에 결혼을 하였고, 그녀는 보름 만에 출국하였다. 그리고 석이는 비자가 나왔지만, 출국 전에 과년한 여동생을 출가시키는 문제나 꼭 마무리를 지어줄 집안일들이 산적하여 출국을 미루고 해를 넘겨 1월에 큰 여동생 결혼을 성사시키고, 3월 말경, 아내와 헤어지고 6개월 만에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3월 중순 어느 주말, 미선을 모처럼 만에 만났다. 떠나기 전에 인천 송도 엘 가서 싸늘한 겨울바다를 보고 가라는 미선의 말대로, 둘이서 전철을 타고 또 시내버스를 바꿔 타고 유원지 입구에서 내렸다. 그리고 인기척이 별로 없는 쌀쌀한 바다 쪽으로 걸어 나갔다. 바다 쪽에서 찬바람이 몹시 불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몸을 움츠렸다. 순간 그녀는 석이의 왼 팔을 두 손으로 꽉 끼고 머리를 가슴 깊숙이 기대면서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잠시 당황하였다.
“오빠, 가지 마세요! 네―?”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입술을 길게 다문 채 씁쓰름하게 미소만 지었다. 이미 결혼까지 한 석이에게 그런 말을 해버린 그녀의 맘을 이해해 주고 팠다. 그리고 얼마 동안 정겨운 연인들처럼, 침묵만 지키면서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바닷가를 걸었다. 겨울 바다가 주는 서글픈 낭만이 엄습해 왔지만, 결코 얼룩진 맘이 개운해질 수는 없었다. 여기 옆에 더 이상 어찌해줄 수 없는 그녀와 같이 걷는 바닷가는 그날의 짙은 회색빛으로 짓내려 깔린 하늘과 더불어 무척 어두워 보였다. 발밑까지 밀려온 차가운 바닷물에 손을 적시어 보면서, 태평양 건너 낯 설은 타국에서 밤낮으로 고생하는 아내의 얼굴을 저 멀리 그려보며 긴 한숨을 몰아쉬다가, 눈물이 글썽한 미선을 올려보면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웠다.
그 후로 유수와 같다는 세월이 흐르고, 자그마치 21년이 지나 2000년이 되었다. 10년 전부터 매년 들락거리는 고국이 되었지만, 그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어렵사리 대학 졸업 후 지방에 내려가서 교편도 잡았었지만, 오래 하진 못했고, 얼마 후 그녀를 무척 위해주면서 좋아했다는 오빠 친구하고 결혼하여 아들, 딸 둘을 키우면서, 억척스럽게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40대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에 아줌마가 된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은 모양인지, 몇 년 전에 들렀을 때 여동생과 통화를 하여 주말에 한 번 들린다고 말을 했다는데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석이는 간간이 고국 나들이를 나갈 때마다 여동생한테 미선의 소식을 물어봤지만, 요사이는 서로 바빠서 연락도 못하고 지낸다고 하였다. 그가 꼭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매년 늘어나는 흰머리에다 잔주름이 진 얼굴을 서로 쳐다보고 세월의 무심함을 탓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만나, 옛이야기도 하고 또 그동안 살아온 얘길 나누고 싶은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동생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수년 전에 조기 유학을 떠난 딸을 따라서 시애틀인지 뉴욕인지로 모두 건너가서 산다는 얘길 최근에 들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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