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주]: 한용운은 14살 때 집안끼리 맺게 한 맘에도 없는 결혼을 하였지만, 처가 출산이 임박하여 미역을 사러 나갔다가 그 길로 출가하였고, 그 후 출생하여 성장한 아들도 외면하였다. 그런데 훗날 55세에 다시 결혼한 파렴치한 면이 있다. 큰 일을 하는 사람은 가족도 그리 버렸어야 하는가? 성철도 찾아온 딸을 박대하며 "불필"이라 하였는데, 다 만해한테서 배운 모양이다. 시도 잘 쓰고, 큰 일을 많이 했으면 뭐하나? 자기 만의 득도를 위해서 처자식 맘에 대못 박는 일은 무슨 변명도 필요 없는 비인간적이고 표리 부동한 행동이다. (오래전에 들렸던 백담사에서 그의 누거와 흉상을 보며 뇌까렸던 내용을 거사의 "가족의 온도"에서도 언급했던 얘기입니다.)
1879년 8월 29일(음력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96년부터 속리사, 월정사, 백담사 등에서 불경을 공부했다.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양의 근대사상도 접했다. 1903년 세계일주를 시도했으나 포기후 만주를 거쳐 귀국, 석암사를 거쳐 백담사에 입산, 1905년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08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임제종 대학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1910년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승려대회를 개최, 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고 저지했다.
1913 년 조선불교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했고, 유심』을 창간, 주재했으며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 독립선언 준비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조선독립 이유서」를 집필했다.
1922년 출옥 이후에는 각지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강연을 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흑풍』(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과 한시, 시조 발표
1927년 신간회의 발기인, 경성 지부장 역임, ‘조선불교 동맹’과 ‘만당’의 지도자로 활약. 1931년 『불교』를 인수 ‧ 간행하여 불교 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1933년 서울 성북구에 지인의 도움으로 심우장을 짓고 거주. 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었다. 1944년 5월 9일 중풍으로 사망
알 수 없어요
한용운의 대표 시는 「님의 침묵」(1926)이다.
[해설]
항일 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다. ‘님’은 잃어버린 조국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한 한용운이 밝힌 것처럼 이 시의 ‘님’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상실하여 혹은 결핍되어 되찾거나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님’이다. 조국, 민족뿐만 아니라 진리, 정의, 연인 등이 ‘님’이 될 수 있다. 자유롭고 새로운 시의 형식, 독창적인 은유와 역설의 사용 등으로 한국 시사에서 가치 있는 시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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