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아침에 먼저 성산 일출봉과 섭지코지엘 들렸지만, 그곳도 비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리고 추억의 잔재를 찾으려고 중문관광단지를 갔을 때도 폭우가 반겨줬지만, 옛날에 머물렀던 호텔이며 백사장을 내려다보며 잠시 추억을 떠올렸다. 6/30 에는 서귀포 대정으로 돌아와서 추사 김정희 기념관에 왔을 때는 잠시 비가 그쳤다. 그리고 숙소로 가기 전에 서귀포항에 들러서 '서귀포 70리' 길의 의미를 살피고 근처에 있는 천재화가 이중섭이 피난 와서 머물었던 초가와 기념관을 둘러봤다.
[추억의 잔재를 찾으려고 중문단지에 들렀는데, 폭풍우가 심했지만, 숲길을 따라 갔더니 절벽근처에 Badabara 찻집이 있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즐기고 비바람치는 정원끝에 나가서 해안과 2001년에 어머니와 같이 들렀던 Hyatt Regency를 바라봤는데, 이름이 "파르나스"호텔로 바꿔져있었다. 그런데 해안가에는 폭풍우속에서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습이 보여서 매우 놀랬다.
[섭지코지와 성산봉에 들렸는데, 비바람과 해무가 급작스레 산을 감싸는 바람에 인증샷만 찍고 며칠 후에 날씨가 좋으면 다시 오기로 하고 철수하였다. 그런데 이런 날에 해안에서 Wind Surfing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놀랬다. 하기야 며칠 휴가로 왔는데--.]
[한라산 남쪽 기슭으로 서편 숙소로 돌아 오는데 비는 계속 내렸는데, "판포포구"에도 여전히 비가 와도 아쉬움에 바닷가에 나온 인적이 보였다. 메일 저녁은 성찬이라 이리 먹으면 살 좀 찌겠다. 오늘은 파전과 흑돼지 볶음에 전복 한 개씩 그리고 막걸리 한 잔도 필수---}
[추사 김정희의 본관은 "경주"이고 그의 모친은 "기계유씨" 라는데, 우리집과 똑같아서 매우 놀랐다. 여담이지만, 이 거사도 붓글씨를 잘 써서 초등학교때는 "우리들의 자랑"에 자주 올려졌었다. 전속 해설사인 "양찬성"씨가 해설을 잘 해줬는데, 그의 이름이 1967년 충북 구봉광산에서 갱도에 갇혔다가 16일만에 구조된 사람과 이름과 같아서 학교 다닐때 말이 많았다고 하여 웃었다.
[대정에서 흔히 볼수 있는 소나무 풍경인데, 강풍에 곱게 자라지 않게 보인는데, 추사가 세한도에 그린 항 겨울에 모진 풍상을 겪는 소나무와 매우 흡사하다. 추사가 그린 소나무와 집을 그린 풍경은 화가가 아닌 문필가가 그렸던 시화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추사 김정희의 고택과 묘소는 예산에 소재하지만, 그는 헌종때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자 안동김씨 세력이 그를 태풍과 장마로 견디기 힘든 제주도 대정에서 풍토병과 음식이 맞지않는 9년의 위리안치형 유배생활을 하게 했다. 그런데 통역관인 제자 이상적이 당나라를 다니면서 스승을 위해서 새로 나온 책자를 어렵사리 제주까지 여러차례 가져다 준 고마움의 표시로 세한도를 만들어어서 전해줬고, 이상적은 당으로 가져가서 많은 문인들에게 보여줬는데, 극찬을 받으며 세한도후미에 당대의 16명의 유명한 학자들이 찬사를 더한 글을 남겨서 원래 폭 23cm/길이 70cm인데 무려 13m가 되었다. 세한도는 일정때 고미술 수집가인 후지스카가 소장하고 있을 때 서예가 손재형이 간곡히 부탁하여 무상으로 양도 받았고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
[중문대포주상절리는 그 형태나 크기가 압도적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큰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천재화가 이중섭(1916~1956)이 제주로 가족과 같이 피난와서 1년동안 거처하전 초가가 있고, 근처에 기념관이 있다.]
[원래 의미는 서귀포구에서 성읍마을까지 70리라 하였지만, 지금은 천지연, 정방폭포를 포함한 해안선의 비경을 말한다. 70리길 싸인을 보면서 송민도의 "서귀포 사랑"을 뇌까리였다. 비는 좀 수그러졌는데 서귀포시 올레시장에서 김밥과 콩국수로 점심을-]
[거귀포를 거쳐서 숙소로 돌아 오는 길에 비도 오고 산자락에는 안개도 자욱하였다. 그리고 올레시장에서 사온 생선튀김으로 저녁을--. 열심히 찍고 다니다보니, 운전하는 동생이 더 피곤하겠지만, 나머지 일행도 피곤해졌다. 막걸리 한잔 생각이 절로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