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세상사는 이야기

어떤 금발 아가씨의 유혹

바람거사 2012. 8. 31. 23:51

 

 

<'80년 5월 어느날 오후 컬럼 아파트 입구에 와서 '문 좀 열어줘-!' 소리치는 색씨>

 

                                                    

                                                                 어떤 금발 아가씨의 유혹

  

1980년 초가을이었나30년도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뜻밖에 당한 일이라서 주저주저하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선 시내버스창가를 초점 없이 바라보며 당혹함을 감추려했었던 내 모습이 얼마전 일같이 생각나면서 빙그레 웃어본다.

 

1979 4월말쯤 시카고로 이민을 와서 첨 몇 달은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사람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오후 4시만 고대하면서 그 동안 꿈꿔 온 대학원 진학을 하려고 이런저런 시험 준비를 하며 지냈다. 그리고 그 시험이 끝나자마자 무슨 일자리라도 찾아야만 하는데, 너무도 막연하였다. 경력이랬자 대학 졸업 후에 공군장교 4년 근무하고 전역 후에 현대건설에서 건설 현장 기계설치 기사로 2년 반 남직하게 일한 게 전부이고, 영어로 의사통화는 원만하게 하는 편 이었지만 누가 ‘너 엔지니어 직책을 주겠으니 해 볼래?’ 한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었을 때였다. 그래도 기계공학을 전공한 학사인데 될 수 있으면 전공과 관련이 있는 직장을 찾아보겠다는 맘이 우선하였기에 공장에 가서 막 노동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펜대나 잡고 있다가 온 대부분의 남편들처럼 몇 년 동안 아무 일이나 닥치는대로 해서 밑돈이라도 모아지면, 조그만 꽃집이나 세탁소를 시작해보겠다는 생각은 첨부터 아예 제외해버렸다.

 

나보다 먼저 온 이민 선배들을 보니, 그런 식으로 대부분 공장에 다니거나, 첨부터 목돈을 가지고 온 몇 사람들은 세탁소, 꽃집, 동네 사거리에 조그마한 서양 식품가게, 소규모 여행사 따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규모가 제법 큰 한식품 가게를 하려면 가져 온 돈이 많지 않으면, 이민 온 지 제법 햇수를 넘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장사였다. 나야 그 동안 벌어 놓은 건 부모님한테 다 물려주고, 막상 떠나 올 때는 여권에 명시된 외환 한도 금액을 다른 사람한테 양도해주면서 시카고 가서 갚아주겠다며 500불 빌린 게 전부였고, 게다가 비행기표도 집사람이 할부로 끊어줘서 왔으니, 알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집사람이 먼저 와서 당시 월 120불짜리 침실 하나 딸린 아파트를 빌리고 깔끔하게 단장하여 신혼살림을 꾸릴 준비를 해놨으니, 눈물이 나도록 감지덕지 하였을 뿐이었다.

 

적당한 일거리를 찾아야하는데, 주변에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조언마저도 얻지 못하였고, 나보다 일 년 먼저 온 대학 동기인 상구는 공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조이고, 갈고, 때리는 일을 하다 보니, 팔목에 아예 붕대를 감고 지냈기에 같이 술 한 잔이라도 마시면, 신세타령을 엄청 늘어봤다. 또 집사람 선배 남편들도 주로 '템플'이라는 큰 공장에서 철판을 나르는 노동일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대학 때 전공이니, 왕년에 무슨 회사에서 어쩌고저쩌고 지냈다는 경력 따위는 모두 다 미시건 호수에다 다 내동댕이쳐버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실천하기 위해서 오로지 돈이라도 좀 벌어보자는 각오로 일을 했었고, 아니, 그 보단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부딪친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우선 일요일판에 구인광고가 가득 실리는 시카고 트리뷴지를 사서 훑어봤다. 그리고 엔지니어링 섹션을 훑어보니 의외로 제도사를 찾는 데가 많다는 걸 알았다. 제도사는 엔지니어링부서에서 엔지니어들이 설계한 기기를 도면화하는 제도를 하니까 그 일에 익숙해지면 설계일도 배울 수 있고, 또 대학원을 졸업하면 엔지니어로 승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림그리기에 소질이 있어서 스케치를 잘 했었고 또 대학 때도 제도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하였다. 또 건설회사에서도 기계설치 현장에서 기계설치도면을 많이 접하였기에,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때는 중고차 한 대밖에 없었기에 동네가 썩 좋지 못한 병원에 다니는 집사람이 주로 사용하고 나는 시내버스로 한 번 갈아타고 출퇴근을 할 수 있는 거리를 감안하여 몇 군데를 뽑아 정리를 하고, ‘미드웨스트 전자’ 라는 회사를 먼저 찾아갔다. 엔지니어링 부서라고 해도 주임 엔지니어 1명에 엔지니어 보조 1명 그리고 감독 제도사 1명에 제도사 3명 정도의 소규모 회사였지만, 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또 실기도 치른 후에 그날로 고용이 되었다. 사장은 최종 면접에서 그 당시 최소임금인 3 30센트에 비하면 말단 기술직이라고 시간당 4 40센트를 시급을 주었다. 그렇게 하여 신바람이 나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1980년 봄 학기부터 일리노이 공대 대학원에 조건부 입학을 하고서 전공 이수 과목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별러왔던 한을 풀었지만, 대학 졸업 후 8년 만에 듣는 대학원 과정 2과목은 너무 큰 부담을 줬다. 그래서 그해 가을 학기가 시작될 무렵 정식입학 허가를 받을 때까지 파트타임을 할 수 있도록 사장의 허락을 받았다.

 

그날은 모처럼 예전에 한국에서 맞춘 양복에 오렌지색 니트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일과가 끝나고 시내버스를 한참 기다린 후에 중앙 복도 옆에 자리가 나서 앉았다. 마침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의 하교시간이 되어 학생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나는 밖을 바라보면서 아주 떠나지는 않더라도 미국에서의 첫 직장에서 열심히 근무를 하여 인정을 받고, 미국의 엔지니어링 체제에 눈을 뜨게 해준 고마움과 감회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때 앞에 앉았던 한 여고생이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나지막하게 말을 걸었다.

Hi-!"

갑작스런 인사에 바로 대꾸도 못하고 그 당돌한 여학생을 빤히 쳐다보며 어설프게 고개만 살짝 끄덕 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나 쪽으로 좀 더 가까히 돌리더니만, 그녀 앞에 앉아있는 다른 여고생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She said she likes you!"

......

얼떨결에 바로 앞 쪽에 있는 그녀를 쳐다보니, 엷은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매력적인 여고생이 기다렸다는듯이 웃으면서 작은 손짓을 하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금방 쑥스러워져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졌고 입을 옆으로 잠시 늘이는 시늉만하면서 인사로 대신하였다.

 

나는 여고생들과 엮어지는 팔자를 가지고 태어났나? 순간 오래전 서울행 준급행에서 만나 애틋하게 헤어진 17살의 여고생 생각이 났다. 그 땐 나도 19살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이제는 10년도 더 넘게 세월이 지났고, 첫 아이가 9월이면 태어 날 신혼 초라면 신혼 초인데, 아무리 매력적인 여인이 꼬여도, 사랑하는 내 색시가 젤 예쁘다고 생각했던 30살 유부남이었으니 말이다. 하여튼, 이런 일이 지난 30년 동안 미국생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유혹이 된 셈이다. 헌데, 이런 에피소드가 불연듯 생각이 나니 나도 이제 늙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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