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자 주]: 예전부터 "옥이 흙에 묻혀-" 를 좋아했다. 지금 날 알아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그 누가 날 알아주는 이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준다. 그날을 대비하여 나를 다시 둘러보고 만전을 기한다.
<옥이 흙에 묻혀>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밟히이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해설] : 옥이 흙에 묻혀 길가에 버려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흙인 줄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행인들 발길에 흙과 함께 밟히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그가 나타날 때까지 흙인 듯이 있거라.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이다. 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산수·인물·초충·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자화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과 비견되기도 한다. 자기 내면을 투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매,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수염, 안면의 핍진한 묘사가 압권인 절세의 초상화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로 불린다.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
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조선국 한성부 출생 ~ 1671년 7월 16일(음력 6월 11일)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에서 별세)는 의금부 금부도사 겸 통덕랑 등을 지낸 조선 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이었던 (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경상도 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2]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가인으로 꼽히는 문인이다. 26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나 이후 수차례의 당파 싸움에 휩쓸려 여러 차례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는 윤선도가 당시에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는 서인 세력에 맞서 왕권의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서인의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의 생에 있어서 20여 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배, 은거 기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다지고 빼어난 작품을 세상에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 문학의 특징은 자연 친화, 자연과의 거리감이 극도로 좁혀진 삶을 다루었다는 점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윤선도의 삶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윤선도는 여타의 시인들과는 달리 자연을 다루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관념적인 경향으로 빠지지 않고 현장성과 사실성을 살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윤선도였지만, 그는 유배 기간 동안 바라보았던 자연을 단순한 도피처나 일시적인 피난처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을 진실한 삶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자연이야 말로 자신에게 인간 본연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윤선도의 자연친화적 작품들은 단순히 안빈낙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아일체의 자연관은 윤선도가 지향하였던 엄격한 유교적 윤리 체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가 자연에서 발견한 인간적 가치와 정서는 대부분 유교적 덕목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윤선도의 작품, 인격, 인생관 등 전반적인 이해를 필요로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소학〉이다. 윤선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왕의 정치이념이나 후학의 양성 등 사회 모든 곳에서 〈소학〉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윤선도의 작품에는 자연과 합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과 산림을 하나로 파악하여 연군지정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초기의 〈견희요〉, 〈우후요〉나 후기의 〈몽천요〉뿐만 아니라 자연을 노래한 〈산중신곡〉, 〈어부사시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윤선도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작품에 사용된 언어의 아름다움에 기인한 바도 크다. 교과서에 수록된 〈어부사시사〉 외에도 〈만흥〉, 〈오우가〉 등의 작품에는 한글이 지닌 멋스러움과 다양한 표현력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어부사시사〉 등의 작품에서는 조선 중기까지의 시조에서 지나치게 자주 등장하였던 한시구(漢詩句)를 순 우리말로 바꾸어 표현의 난삽함을 극도로 절제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밖에도 한글을 통한 여음구, 청유형과 의문형을 적재 적소에 배치하여 시조의 리듬감을 효과적으로 높이는 데에도 성공하고 있다.
<오우가>
내 벗이 몇 인고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오르니 그이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더하여 무엇하리.
水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서리 맑다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좋고도 그칠때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일로 피면서 빨리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다가 누르는가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 뿐인가 하노라.
松
더우면 꽃피우고 추우면 잎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줄 그로 하여 아노라.
竹
나무도 아닌것이 풀도 아닌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고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月
작은 것이 만물을 다 비취니
밤중의 광명(光明)이 너만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고산 윤선도가 56세 때 지은 오우가는 전체 6수의 연시조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 시조의 경지를 한 단계 높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 번째 수인 서시에서는 벗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다음부터 이어지는 다섯 수에서는 수(水-물), 석(石-돌), 송(松-솔), 죽(竹-대), 월(月-달)의 특질을 특출한 시각과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담겨진 자연물들은 모두 윤선도가 추구했던 유교적 덕목과 이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들로써, 다른 자연물들과의 대비(물의 경우에는 구름, 바람과의 속성 대비, 바위의 경우에는 꽃, 풀과의 속성 대비 등) 속에 그 특징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주요 소재와 몇몇 단어를 제외한 전 구절을 모두 한글로 표현하여 자연물이 지닌 관념성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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