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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부던 바람" - 선우협 (1588-1653)

바람거사 2023. 9. 9. 23:23

 

간밤에 부던 바람에

만정도화(滿庭桃花) 다 지거다

아이는 비를 들고 쓸으려 하는구나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 하리요

 

[해설 1]

떨어진 꽃도 꽃이다. 봄바람이 거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뜰에 가득 피어 있던 복사꽃이 떨어졌다. 아이는 비를 들고 쓸으려 한다. 떨어져 있어도 꽃은 꽃이다. 쓸어 무엇하겠는가?

선우협은 선조대부터 광해군, 인조, 효종 연간을 평북 출신의 성리학자다. 유년기에 임진왜란을 보았고, 30대에 인조반정으로 한때의 권력자들이 봄꽃처럼 흘리며 스러져가는 것을 목도했다. 이런 영향 때문이었을까? 당대에 그의 문명은 드높아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조정에 우뚝한 선비 누가 그를 넘을 있겠는가”라고 찬탄했던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마저 훗날 유배 중에 사약을 받아야 했다.

시조는 피어 있을 때는 모두가 우러러 바라보지만 결국은 져야 하는 환로(宦路) 무상함과 져도 꽃이라는 선비에 대한 연민을 읊은 것은 아니었을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이 불렀을 때도 인사만 드리고는 곧바로 평양으로 내려와 버렸다. 왕은 이를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평생을 피하듯 숨어 살면서 제자를 가르쳐 장세량을 비롯한 명현(名賢) 40명을 배출하였다. 시조는 도화를 빌려 현상세계의 변화를 그린 것이라는 도학적 해석도 있다.

[해설 2]

지난밤 불던 바람에 뜰에 가득 피어 있던 아름다운 복숭아꽃이 다 떨어져 버렸다. 철 모르는 아이 놈은 비를 들고 그것을 다 쓸어 버리려고 하는구나. 아서라, 떨어진 꽃인들 꽃이 아니냐. 구태여 쓸어 무엇하겠느냐. 그냥 두고 보는 것이 더 풍취 있는 일이 아니냐.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 멋을 아는 사람은 낙화나 낙엽, 또는 겨울에 내린 첫눈 따위를 박박 쓸어 버리지 않는 법이다. 박박 쓸어 버린다고 해서 깨끗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고정 관념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그 고정 관념, 그 선입관, 그 '작은 나'를 떨어 버릴 줄 모르는 사람은 마음에 '집착'이 있는 사람, 마음을 바꿀 수 없는 살마, '작은 나'에 사는 사람이다.

뜰을 벌겋게 덮은 '만정 낙화'. 그것이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사람. 그것을 쓸어 내는 것을 말리기까지 할 경지라면, 그는 확실히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