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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꽃 향기"- 거사(단편 2002)

바람거사 2023. 8. 29. 10:40

 

희숙의 외할머니는 일찍 홀로되어 세 딸을 데리고 하숙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하숙하던 어느 젊은이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미색이 뛰어난 큰딸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집안 어른들의 뜻을 거역치 못하고 혼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어린 핏덩이를 업고 나타난 한 여인네로 인하여 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신랑은 그 날로 행방불명이 되었고 다음해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서로들 영영 만날 수가 없었다.

 

그 애는 모친의 미색을 닮아서인지 큰 눈에 도톰한 입술이며 낭랑한 목소리는 당시 사춘기에 막 눈을 뜬 초등학교 6학년 사내애들에게 있어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애의 착한 맘씨는 어디에서 왔나?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한테서? 석이는 장난이 심하고 놀기는 좋아했지만, 수줍음을 잘 탔는데도 여학생들한테는 대단히 인기가 좋아서, 6학년 1학기 반장 선거 때 압도적으로 당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애는 부반장으로 뽑혔다. 담임선생님은 때로 숙제 검사까지 석이한테 일임을 해줬는데, 어느 날 그가 지휘봉을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검사를 하다가, 그 애 책상 옆으로 다가섰다. 그 때 희숙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고 큰 눈을 슬며시 치켜뜨면서 연필 끝을 입에 댄 체, 한 손으로 노트를 살며시 밀어 내 보였다. 순간 석이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그 앤 목소리도 예뻤고 조숙한 탓인지, 무척 어른스레 쓴 위문편지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을 땐, 사내애들은 낮이 간지러워 몸을 비비꼬다가 입을 딱 버린 채,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굴을 책상에 박아 버리곤 했다.

 

그런데,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서로 집을 자주 들락거리면서 놀았던 희미한 기억을 하고 있었지만, 무슨 연유로 학교를 다니게 된 후로는 이사를 간 것도 아녔는데 전혀 그 애 집엘 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5년이나 지나서 옛 기억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무렵, 처음으로 한 반이 되었다. 그 때는 누구누구가 조금만 가까이 지내기만해도 뜬금없이 연애 건다는 소문으로 퍼져 곤욕을 치러야했는데, 반장과 부반장으로 자주 만나다 보니, 석이와 그 애에 대한 이상한 소문은 발단도 모르게 퍼지게 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 과외수업이 끝나고 밖에 나오니 이젠 제법 어두웠다. 모두들 운동장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큰소리로 몇 마디를 하니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막 교문을 나설 무렵에 석이를 둘러쌌던 애들이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이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어, 어, 얼 레리 꼴 레리, 석이는 희숙이하고 연애한다네! 석이는 희숙이하고 연애한다네―!”

모두들 교문을 나와서까지도 기를 쓰고 외쳐 가고 있었다. 석이는 무척 당황하여서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잠시 휩쓸러 가다가, 저만치 앞서서 그 앨 따르는 여자 애들과 함께 총총히 걸어가는 희숙을 목격하고, 막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순간 찬물을 끼얹듯이 조용해지면서, 앞에 있던 애들이 길을 터 줬다. 그가 희숙이 앞을 가로막고 섰을 때, 구름같이 몰려가던 애들도 동시에 따라서 섰다. 그는 상기된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다가 엉겁결에 그 애의 책가방을 한차례 걷어차면서 소리쳤다.

“야, 너 때문에 내가 이런 곤욕을 치러야 하냐?”

희숙이 옆에 바싹 붙어있던 복님이가 얼른 가방을 받아 쥐었다. 그러나 그 앤 입술만 두어 번 굳게 고쳐 잡고 냉정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석이는 순간 당황하면서 쑥스러워지고 말았다. 미숙한 그의 행위에 금방 후회가 따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옆을 밀치듯 비키며 심복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모두들 조용히 그 모습을 한 동안 지켜보다가 삼삼오오로 갈라져 흩어지고, 허탈해진 석이도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떼었다. 그 후로도 오누이지간이라는 어이없는 소문까지 나돌았지만, 지난번같이 일이 크게 터지지 않았기에 그런대로 잊혀져갔다.

 

중학교입학시험 때가 되면서 희비가 엇갈렸다. 전교 일 이등을 다투던 석이를 포함해서 댓 명의 남자애들은 소위 지방 명문이라는 J 중학교엘 모두 낙방을 하는 대신, 그 애를 위시하여 서너 명의 여자 애들은 J 여중학교에 합격하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석이는 후기시험을 치르느라 졸업식도 참석 못하고 들어간 중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얼마동안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고 생각했지만, 곧 적응이 되어 버렸다.

 

그 앤 석이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서 아침 등교 길에 종종 마주쳤다. 석이가 좀 일찍 나오게 되면, 철로가에 앉아서 논밭건너 한 백 여 미터 떨어진 그 애의 집 골목어귀를 응시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그 애가 나오는 걸 확인하고 우연히 마주치는 것같이 걸어 나와 겸연쩍게 눈길을 마주치고서 등교를 했었는데, 그렇게라도 만나지 못한 날은 우울했다. 하지만, 말 한마디 없이 서로 마주치는 것만으로 흐뭇하게 생각하며 지냈고, 때로 조용히 만나서 무슨 얘기라도 하고픈 충동도 있었지만, 시종 맘에 두지 않아서인지 곧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 무렵에 석래라는 초등학교 6년 내내 같은 반이 되었던 녀석하고 자주 휩쓸려 다니면서 밤에 그 애 집 앞 울타리에 분필로 두어 차례 ‘희숙이 연애대장’ 이라고 휘갈겼다. 그리고는 뭐 가 그리 좋아서 낄낄거리며 줄행랑을 치곤하였는데, 다음날 으스름 초저녁에 몰래 확인을 해보면 깔끔히 지워져 있었다. 주위를 잘 살폈다가 또 써대고 도망가면서 짜릿한 기쁨을 만끽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석이가 희숙을 좋아하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퍼피 러브였을 게다.

 

그러면서 2년이 넘도록 얼굴 맞대고 말 한마디 건 내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중3때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숨은 내력을 알게 되었다. 석이와 그 애가 젖먹이였을 때부터 오랫동안 석이 아버지와 그 애의 어머니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사이였다는 거였다. 너무도 실망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고, 그제야 흐릿한 옛 기억들의 의미를 깨 닫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입학 바로 전까지 양쪽 집을 들락거리면서 그 애 이모를 따라 복사꽃 피는 과수원 길을 따라 어딘 가 갔던 일이며, 집 뒤꼍 울타리 밑에서 넌 엄마 난 아빠하며 괭이밥을 찧어 반찬을 만들고, 고운 모래로 밥을 지으며 노닐던 그 소꿉장난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석이 어머니는 그 애가 어려서부터 깜찍하게 말을 잘 하더라는 얘기도 하시면서, ‘석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석이 아버지’ 라는 말까지 하더라는 거였다.

 

그 무렵까지도 석이 아버지는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던 터라, 한 동네서 살면서 떡 행상을 하는 최 씨 마누라가 하루는 호들갑을 떨면서 들려주는 말에, 석이 어머니는 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다.

“아니, 석이 어멈은 죽 쒀서 개 줄려고 그려? 그 여편네가 살살 꼬여서 먼저 혼인 신고를 허면 어찌 되는 거여? 얼마 전에는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 석 달째 되는 애를 지웠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어? 독한 년!”

그러면서 서둘러 신고를 하라고 부추겼다. 그런 일은 응당 남편이 해 줄 거라 믿고 있다가 갑자기 겁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두어 살 박이 여동생을 들쳐 없고 호적등본을 띄러 고향인 부여엘 갔는데, 출생신고가 누락이 되어 서류를 띌 수가 없었다. 며칠을 그곳에서 묵는 동안 친척 어른들이 서둘러 비슷한 나이로 사망신고가 안 된 친척 동생으로 둔갑시켜 호적을 만들어 놓고, 실제보다 두어 살 어린 나이의 복순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돌아 왔다.

 

석이 어머니는 부여 귀암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엘 갔다는 얘기도 있고, 또 돈을 많이 벌려고 중국엘 갔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얼굴은 전혀 기억도 없고, 겨우 네 살 때 외할머니마저 두 살 먹은 남동생과 같이 염병으로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출생신고가 되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당시는 유아들이 어려서 죽는 경우가 많아서 두어 해를 기다렸다가 별 탈이 없이 잘 크면 신고를 했다는데, 집안이 풍비박산 난 마당에 출생신고는커녕, 어려서부터 시집오기까지 모진 고생을 다하면서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19살에 중매로 시집이라고 와서도 고생만 하고 있을 터에, 하늘같이 믿었던 서방인지 난방인지가 그런 바람을 피웠으니 피가 거꾸로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편을 하늘같이 받들고 살던 시절이라 차마 얘길 꺼내지도 못하고 혼자서 속만 끓이고 있었다.

 

한 동네에서 살면서 사소한 일에도 소문이 나면 떠버리 아낙네들이 신나게 입방아를 찧는 판에, 별 재산도 없고, 등치 또한 왜소하며 말재주도 없는 석이 아버지가 무슨 재주로 그 미모의 아낙을 꼬여 찼을 가에 대해서는 최고의 관심사가 되었다. 석이 아버지가 수박 한 덩이라도 들고 철다리를 건너 둑길로 바로 들어서지 않고, 곧장 철길을 따라 그 애 집 쪽으로 가는 날 저녁 무렵엔, 집 앞이 훤하게 트여 일거수일투족이 잘 보이는 도랑갓집 홍 씨네 마누라가 즉시 달려와 보고를 하였다. 석이 어머니의 심기가 날이 갈수록 편치 않았다. 해가 갈수록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면서, 어느 날 그 홍 씨 마누라가 귀띔을 해준 얘기가 도화선이 되었다.

“아, 글쎄, 희숙이 어미 년이 말이어, 석이 엄마하고 이혼을 해 버리면, 애들은 자기네들이 맡아 키우고, 할머니는 큰집으로 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석이 아버지를 꼬이더라는 얘길 했다는 디, 참말로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확 빼 버리려고 하는 것이여!”

그날 저녁 석이 할머니도 더 이상 참질 못하고 어머니를 나무랐다.

“애미는 속창아리도 없냐? 남편이 첩년하고 한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며, 별 수작을 다 꾸미고 지낸다는데 잠이 오는 거여?”

하면서 더 이상 이 꼴은 못 보겠으니 무슨 사단을 내라고 성화를 하였다. 그래서 그날로 끝장을 내리라 맘 단단히 먹고 허겁지겁 달려가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방문을 제키고 들어갔다. 모기장을 치고 두 사람이 막 잠자리에 들려다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서로 눈이라도 찌르겠다는 식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이년아! 그렇게 빌어 붙을 때가 없어서 여편네가 이렇게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애가 둘씩이나 딸린 남자를 꼬여 지내는 주제에 어쩌고 어째? 이혼을 허고, 누굴 또 어디로 보낸다고? 쥐뿔이나 아무 것도 없고, 왜소하니 볼품도 없는 사내를 도대체 뭐가 맘에 들어 찰거머리같이 붙어서 안 떨어지느냐? 이년아 -!”

“네 년이 석녀(石女)라며? 니 남편이 그러더라. 니하곤 사는 재미가 없다고 말이여. 그래 말 잘했다. 쥐뿔이나 빨아먹을 돈이나 재산이 있냐? 내가 혼자 산다고 며칠 굶은 늑대같이 덤벼드는 사내놈들이 수두룩 헌데, 직장에서 그래도 제일 인간적으로 대해 주고, 그 바보같이 착한 맘에 눈먼 정을 줬던 내가 잘못이지―.”

“아따, 그년 화냥년 같은 소리 잘도 허네! 별 남세스런 소릴 잘도 지껄이는구먼. 에라, 이 화냥년 오늘 맛 좀 봐라! 니년이 직장에서 내 남편을 이용하려고 들어붙었지 정을 주어? 지나가는 개도 웃겠다. 이년아!”

“니년이 서방 단속 못하니까, 겉돈 것이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던데, 니 남편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이 가만히 있는데 나 혼자 지랄했단 말이냐?”

“어쭈, 적반하장일세, 니년이 남의 눈치도 안보는 경우 빠지는 년이라는 건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 이년아. 니년을 첨 봤을 때부터 알아 봤지. 빨래터에서 딸년 기저귀를 빨려면 먼저 온 사람들 아래쪽에 내려가서 할 것이지. 아니, 뒤늦게 온 주제에 윗물에서 똥 기저귀를 훌렁 훌렁 생각도 없이 빨아 대는 걸 보고 싸가지가 한 푼도 없다는 건 일찌감치 알아 봤었구먼―”

 

결국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고 또 한 차례 엉겨 붙자마자 서로 머리채를 잡아 당겼다. 희숙의 이모들도 합세를 하는 바람에 저고리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한참을 엎치락뒤치락 끝에 한 움큼 머리를 잡아 뽑았던 황소 같은 석이 어머니 승리로 끝났다.

 

그런 대소동이 있고 나서 석이 아버지는 희숙이 어머니를 달래주느라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이미 어둠이 깔린 초저녁나절, 사죄라도 할 모양으로 석이 할머니와 어머니 몸보신하라고 쑥 돌로 된 둥근 확에도 잘 들어가지 않을 만한, 엄청나게 큰 잉어를 사들고 오면서, 팔뚝만한 꽈배기 봉지도 들고 왔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열심히 먹었던 꽈배기 덕분에 석이의 어금니가 일찍 감치 거의 다 썩어 버렸다.

 

결국 동네에서나 직장에서도 소문이 퍼지자 희숙 어머니는 더 이상 직장도 다니지 못하고, 다른 식구들은 모두 놔 둔 채 혼자서 고향인 K시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호구지책으로 역구내 매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석이 아버지는 일정 때 경성부청(京城府廳)에서 살수차(撒水車)조수의 경험을 되살려, 면허도 없이 직장에 있는 트럭을 윗사람 몰래 빌려서 생필품을 대 준다는 핑계로 K시를 들락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매점 뒷방에 들어섰다가 결국 못볼 꼴을 보고 말았다. 희숙 어머니는 양키물건을 뒷거래를 하면서 자연스레 미군들을 두엇 사귀고 있었는데, 싸전 잭슨이라는 난봉꾼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로 지내게 되었든지, 뻘건 대낮에 무릎을 베고 누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걸 목격하고 눈이 뒤집혀진 석이 아버지가 악을 썼다. 경황 중에 그 녀석이 기겁을 하고 도망쳐버렸지만, 이미 물 건너 가버린 그녀의 맘을 돌이 킬 수 없었다.

“아니, 이 손 못 놔? 나도 먹고살아야지. 딸린 입이 몇인데. 쥐뿔이나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당신한테 더 이상 붙어 있을 이유가 없지. 돈이나 잔뜩 내놔 봐! 어디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보게.”

그리 되면서 석이 아버지는 좁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되돌아 왔다. 그 날로 지난 4년 동안의 시간제 아빠의 역할이 끝나 버렸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이고, 남 주기 아까운 걸 놓아준 씁쓰름한 기분이 오래 갈 일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석이가 6학년이 되면서 둘은 다시 만났고, 또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 날 무렵 어머니한테 그 숨겨진 얘길 다 듣고 난 후로, 이제 둘은 결코 좋아지낼 수 없다는 실망감과 더불어 집안끼리는 이미 서로 반목한 입장이 되었어도, 은연중 커가기만 했던 그리움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크게 문제가 될 일이 아니라고 자위하였지만, 이뤄 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그리 알게 되었을 무렵에, 그 애 또한 그 내막을 모를 리가 없을 거고, 그 애 특유의 차가운 침묵을 지켰을 거라 생각했다. 석이는 그 애가 어쩔 도리 없이 주어진 운명에 너무도 속이 상했을 거라 생각하니, 연민의 정과 무척 좋아했던 맘이 어울려져 더욱 고민이 심해졌다.

 

그 앨 그리는 정은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한 ‘쌀’이라는 방화를 보고 서로 지극히 위해 주는 동창생들의 우정과 사랑에 감동하면서, 애틋한 그리움이 더욱 더 가슴속에 쌓여 가고 있었다. 고심 끝에 어느 날 석이는 편지를 써서 철모르는 여동생을 시켜 그 애한테 건네주러 보냈다가 그 애 할머니한테 들켜 된통 험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나름대로 화가 나서 어느 날 밤에 걔네 집 앞에 가서 전에 외국영화에서 본 대로 위험스럽게도 화살에 불평을 잔뜩 늘어놓은 편지를 말아 쏜 일로 인하여 대소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 일이 석이가 한 일이라 단정하고서 그 애 할머니가 마룻바닥에 박혔던 화살을 들고 석이 식구가 세 들어 사는 단칸방에 따지러 와서 영문도 모르는 어머니한테 억지소릴 실컷 퍼부었다.

“우리네 죽이려고, 애비가 시킨 일이 아니어?”

그렇게 한 바탕 난리를 치더니만,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지만, 그의 철딱서니 없는 활 장난이 탄로가 났다.

석이 어머니는 우선 위험한 짓을 했다는 점에서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 애의 집에 바로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였다. 그 애의 이모들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피는 못 속이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연애질을 하려고, 네 참!’ 하면서, 그를 도마 위에 얹어 놓고 어머니를 난처한 입장으로 몰아치는데, 그 애가 나서서 ‘석이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녀요. 나쁜 친구들의 꾐에 넘어가서 그런 일을 했을 겁니다. 용서 해주셔요.’라는 말로 석이를 옹호해 주더라는 얘기를 했었단다. 결국 어렵사리 마무리가 되었지만, 평소 필요한 말도 거의 하지 않는 아버지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석이는 크게 번지는 걸 방지할 요령으로, 얼른 회초리를 갖다 드렸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희숙이하고 혼례라도 치러 줄까? 야, 이놈아. 하필이면 왜 희숙이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 또 맹세를 하고, 스스로 자청하여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대 여섯 차례 맞았다.

 

입시로 인한 몸살을 또 한 차례 치르고, J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어느덧 2학년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다. 어느 날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있는 걸 알아채고 슬그머니 내다보니 그 애와 같이 온 영애가 주인집 아들 녀석한테 뭔 가를 묻고 있었다. 그 동안 석이는 걔네들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잽싸게 교복상의를 걸쳐 입으며 쏜살같이 뛰어 나가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시늉을 하였다. 허겁지겁 나오는 석이를 향하여 희숙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참, 오랜만이네. 헌데 지금 어디 나가는 길이니?”

“어, 아니, 그저 좀―.”

“이게 정말 얼마만 이지?”

영애가 몇 걸음 옆으로 비켜 줬다.

“초,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첨 이니까 한 5 년쯤 되었나?”

“정말 세월이 참 빠르구나.”

“으응, 정말 그러네―.”

그리고 둑길을 따라 한참을 거닐면서 담담하게 초등학교 동창회준비를 의논하면서 당시에 전교 어린이 회장을 했던 정길이네 집으로 향했다. 희숙은 줄곧 공부도 잘하여 어엿하게 J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곁에서 본 희숙은 이제 다 큰 처자가 되어 버린 듯 성숙해 보였다. 가슴도 제법 나오고 눈은 더욱 커져서 검은 포도 알같이 보였다. 흰 얼굴에 도톰한 입 매무새를 다시 힐끔 쳐다보는 순간 그도 모르게 목이 타면서 침을 삼켰다. 그러나 석이는 어떻게든지 고등학교를 무사히 끝내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가서, 그 지긋지긋한 가난의 누더기를 떨쳐 버리고픈 맘 뿐 이었는지, 동창회준비로 그 후 두어 번은 더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이태 전에 있었던 쑥스러웠던 일에 대한 사과며, 초등학교 6학년 때 가방을 찼던 그 유치하고도 어처구니없던 행동에 대한 뒤늦은 사과도 하질 못했다.

 

그 당시 석이 식구가 살던 집은 말이 독채이지 허름하기가 짝이 없었다. 집주인 박씨가 월세라도 챙길 요령으로 자신이 대충 지은 집인데, 부엌문이 없어 겨울이면 거적때기로 막아 놓고, 여름에는 말아 올려놓고 지냈다. 왼 종일 쥐들이 천장에서 운동회를 하는지 뜀박질하고 방 뒷벽 아래가 무너져 내려 누더기같이 누런 봉투로 겹겹이 부쳐 놓았다. 집 전체가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방문을 설 닫으면 그대로 활짝 젖혀졌다. 그토록 다 찌그러져 가는 집과 같이 그의 맘도 이미 찌그려 질대로 찌그러져, 같은 동네에서 자존심이 송두리째 뽑혀 시궁창에 처박히는 고뇌를 무릅쓰고, 여섯 식구가 북적대는 셋방살이를 수도 없이 전전하면서 그토록 우울한 고등학교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석이가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나 갈 무렵, 맘씨 좋은 아버지가 친하게 지내던 직장 동료에게 빚보증을 해줬었는데, 여러 사람 돈까지 챙겨서 야반도주를 해버린 바람에 수년 동안 빚 독촉을 당하다 못해, 결국은 석이가 태어나서부터 정들었던 집을 빚쟁이한테 헐값으로 넘겨주고 개울 건너 앞동네로 셋방살이를 하러 떠나갔다. 이사 가던 날 철없이,

“집은 팔렸어도 저 복숭아나무는 캐어 가면 안 돼?”

라고 물었다가 어머니를 울렸던 일도 있었다. 널찍한 텃밭에 석이가 태어나기 전 해에 심어 놨던 과일 나무들하고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픔이 따랐다. 방과 후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직 푸른빛이 띤 붉고 노릇한 복숭아 몇 개를 따서 소매로 대충 닦아 먹다가 입술 언저리며 볼이 따가워서 헉헉거리던 일이나, 노랗게 익은 살구나무를 털어서 마구 떨어지는 시큼한 살구를 신나게 줘 먹던 일이며, 서리꾼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한 밤중에 여러 차례 소동이 있었던 추억도 잊을 수가 없었다.

일단 허물어져 버린 가세는 해가 갈수록 더욱 기울어져갔다. 애들이 커가고 돈은 더 필요한데 아버지의 월급이 당하질 못하였다. 그렇게 허무하게 집을 팔고 처음 이사를 나온 후, 지난 5년 동안 평균 일 년에 한 차례씩 옮겨 다닌 끝에 독채로 두 칸 방이 있는 집 같지도 않은 곳에서 살고 있을 무렵, 너무도 뜻밖에 희숙을 그리 만나게 되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를 다니는 애들이 주선이 된 초등학교 동창회는 공부는 잘했어도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마저 진학 못한 피난민 촌에 살았던 민애나 무척 보고 싶었던 급우들이 대부분 나오질 않은 채 싱겁게 끝나 버렸다.

 

뒷마무리를 하고 주축이 되었던 네 댓 명이 나란히 교문을 나설 무렵, 석이는 엉뚱하게 6학년 때 일을 떠올렸다. 괜스레 혼자 얼굴을 붉히면서 두 사람 건너 희숙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멋쩍게 눈길이 마주쳤는데, 그 앤 단지 씩 웃어 보였다. ‘잊었군. 다 잊은 게야. 그 후로 난 죄책감이 들어 오랫동안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는데. 아, 또 그 어처구니없는 활 소동은 어찌하고. 참 미치겠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 와서는 허리가 잘쏙하게 들어가고 가슴 부분이 살짝 부푼 그 애의 하복상의와 한들거리는 감색 스커트의 모습을 곁에서 보고 싶어서, 좀 만나보자는 뜻을 담은 편지를 여러 차례 썼다가 찢어 버렸던 편지의 글귀를 새삼 떠 올려 보면서 실없이 웃었다.

 

희숙이가 살고 있던 집에서 조금만 가면 동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었다. 산자락에는 왜정 때 유도장건물을 개조한 교회가 있고, 그 교회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중턱에 이르기까지 고목이 다 된 아카시아 나무들이 꽉 둘러 차 있었는데, 5월이면 잔가지가 찢어지도록 흰 덩이 꽃들이 피었다. 바람이 불면 그 향내는 근처 아랫동네까지 날려 와 온 천지에 가득했다. 그리고 산 중턱을 지나서 정상으로 오르기 전에 널찍한 바위가 있는데, 거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면 희숙의 집 뒤뜰이 잘 보이고, 운이 좋을 땐, 들랑날랑하는 그 앨 볼 수도 있었다. 어둑해질 무렵 허전한 맘만 한 아름 안고 산을 내려오곤 하면서, 석이는 그렇게 멀리서 그 애의 주위를 맴돌았었다.

 

이제 또 그의 옆에서 간간이 화사하게 웃으며 여럿이 걷는 지금, 둘 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다 헤어질 때까지 여럿이 같이 가는 바람에 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석이는 그대로 집에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무심코 동산에 올라갔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내려와 맥없이 신작로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애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어귀에 다다라서 잠시 얼쩡거리다가 무거운 발길을 돌리려 할 때, 누군가가 불쑥 다가 왔다. 희숙이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 아니, 어떻게 알고 나온 거야?”

“네가 산에 오르는 걸 지켜봤었어.”

“그, 그랬었구나. 사실 만나고 싶었어, 정말로 오랫동안―.”

“중학교 때는 별 짓을 다해 놓고. 이젠 그런 용기도 없어졌구나? 아까 교문을 나서면서 눈치 챘지만……, 나도 꼭 만나고 싶었어.”

샛길 옆 원두막을 지나고 곧바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방천 둑길로 들어섰다.

“희숙아, 미안해. 모두 다 미안해. 집안끼리도 그리 꼬였었고.”

“네가 왜 미안해 하니? 우린 정말 좋은 소꿉친구이었고, 6학년 때는 다른 애들이 무척 부러워하는 사이였는데-. 운명이라는 게 있나 봐. 나의 의지와는 별도로 내가 태어나고, 또 끌려가는 그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거 말이야. 그런데 넌 무척 힘들어 보이는구나.”

“그래? 사는 게 그렇지 뭐. 그것도 내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인데도. 그런데, 희숙인 대학은 서울로 갈거니?”

“글쎄, 그러고도 싶지만, 잘 모르겠어. 형편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누구 도움이 필요한데 가능하지 않을 거야. 석이 너는?”

“나도 희망은 없지만, 길바닥에 나 둥그러져도 서울로 갈 거야. 꼭-. 그 길만이 지금의 나를 구하는 길인 거 같아.”

“넌 겉으로 보긴 잔잔한 강 같지만, 그 물살은 거센 모양이구나. 형편이 어려운데도 과외공부 한 번 안 하고도 J고교를 당당히 들어가고.”

“허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지 뭐―.”

 

둘은 둑길이 끝나는 언덕바지에 외롭게 서있는 해묵은 팽나무까지 걸어 왔다. 그리고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희숙이 손을 내 밀었다. 석이는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고 살그머니 잡았다. 철들어 첨이자 마지막으로 잡아 보는 손길이었다. 희숙의 큰 눈이 멀리서 비추는 시내불빛에 반짝였다.

“석이 너는 꼭 해낼 거야!”

“하지만, 정말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거니?”

짧은 만남이었다. 석이는 희숙의 희미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팽나무 옆에 서있었다. 갑자기 두 눈이 흐려지면서 세상 모든 게 범벅이 되었고, 한여름 밤의 무수한 별들도 모두 다 흐느적거렸다.

 

결국 희숙은 고향에 남아 교육대학에 들어갔다는 얘길 들었다. 만약 서울로 갔더라면, 어떻게든 또 만나 볼 기회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하면서, 글짓기에 소질이 많았던 그 애의 재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해봤다. 2년 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는지 모르지만, 고향을 떠났다는 얘기도 들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날들은 과거에 묻어 버리고, 새 생활을 하고픈 그 애였으리라. 다시 반추하고 싶지 않은 불행했던 엄마의 과거며, 맘 아픈 옛 일이기에 그 일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석이와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나절 이후로 30년이 넘는 긴 세월이 흐르고 있다. 더 세월이 가기 전에, 언제라도 연락이 되면, 다정했던 초등학교 동창생의 자격으로 까마득한 옛 일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단지 맘속에서만 겉도는 안타까운 일로 남았다. 올해도 탐스럽게 핀 아카시아꽃이 어우러진 공원 산책길에 바람이 불더니, 추억의 냄새가 스쳐갔다. 고개를 들어 치렁거리는 꽃송이를 한참 쳐다보다가, 이역만리 서편 하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늦은 오후의 햇살에 고공을 나르는 여객기가 은빛 점으로 반짝이면서, 새 하얗게 뿜어 나오는 비행운이 붉게 저물어 가는 하늘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