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문고

"이빨이 난 땅"(단편소설)- 리다설(중국)

바람거사 2023. 10. 13. 04:32

[거사 해설]:  해외문인협회지 해외문학 27호에 게재된 단편소설인데 단숨에 읽을 정도로 글 구성이 매우 탄탄하고 주제의 흐름이 유연하여,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였다. 단편 소설이라 분량이 많아서 포토 복사를 하기도 그렇고 해서 해외 문학지 발행인한테 부탁했는데, 바로 보내주셔서 올렸다. 일반적으로 단편 소설의 주 테마는 지지고 볶는 사랑 아니면 그런 삶이다.


리다설(李茶雪): 본명 리명화(李明華) 소설가:

1972년 5월.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출생. 흑룡강대학 졸업. 단편소설 「개개비를 아시나요」등 중단편소설 다수 발표. 연변작가협회회원. 흑룡강작가협회회원.

 

1
  "킁... 킁... 그릉 그르릉..."
  가래 끓는 소리가 비좁은 집안을 가득 채운다. 소리 때문일까. 아이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불을 잡아당겨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본다. 그래도 소리는 그냥 들린다. 발딱 일어나 앉는다. 옆자리를 내려다보는 아이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순간 소리가 뚝 멎는다. 잠잠하다. 아이는 다시 눕는다. 뒤척인다. 잠시 후, 아이는 살며시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온다. 옆에 누운 사람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본다.
  "할미 안 죽는다. 우리 강아지 혼자 냅두고 어케 죽노? 아직은 못 죽지. 킁킁... 콜락콜락..."
  자는 줄로 알았던 아낙이 또 다시 기침을 토해낸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없다.
  "똑... 똑똑..."
  화장실에서인지 주방에서인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로등 불빛이 카텐을 치지 않은 안방을 훤히 비추고 있다. 네모난 앉은뱅이 밥상 하나, 옷궤 하나가 보인다. 아낙과 아이가 누운 자리 외엔 거의 빈 공간이 없다.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롭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어느 청상이 흘리는 가슴 허비는 소리 같아서 아낙은 귀에 거슬린다. 래일엔 수도꼭지부터 고쳐야지. 아낙은 끙- 하고 일어나 앉는다. 무릎걸음으로 밥상 가까이에 다가간다. 상우의 약을 집어 물과 함께 꿀꺽 넘긴다. 낑-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눕는다. 아낙은 자신이 꼭 고장난 수도꼭지 같다는 생각을 한다.


2
  보글보글 장국이 끓는다. 아낙과 아이는 뚝배기를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아 아침을 먹는다. 김치도 있었지만 아이는 한눈 팔지 않고 맨 밥만 먹는다. 아낙이 장국에 밥을 말아먹으라고 해보았지만 아이는 들었는둥 말았는둥이다. 
  "저녁에는 고기 사오마. 다른 날 보담 비싸겠지만 명색이 명절인데 고길 묵어야제."
  그래도 아이는 대꾸가 없다. 여느 때 같았으면 앗싸, 하고도 남을 아이인데 말이다. 아낙은 아이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으나 말 안 하는 벙어리 속을 알 길이 없다. 
  아이는 밥그릇을 밀어놓고 소설책을 집어 든다. 아이는 이내 책에 정신이 팔린다.
  "할미 나간다. 쓰잘데기 없는 소설책만 보들 말고 숙제나 좀 하렴."
  아이는 대답 않고 힌들 돌아누워 버린다. 아낙은 아이의 종아리를 발로 툭 건드린다. 아이는 빽 소리를 지르며 돌아눕는다. 아이답게 종아리는 튼실했다.
  "숙제하라고!"
  아낙은 둬마디 잔소리를 더 하고나서 나갈 차비를 한다. 문고리를 잡던 아낙이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되돌아선다. 파스를 찾아 오른쪽 손목에 붙인다. 약도 입에 넣고 물과 함께 삼킨다. 나머지는 약병채로 주머니에 넣는다.
  아낙은 작은 공구 상자를 들고 걸음을 다그친다.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은백색 앞 머리카락이 절주 있게 이마에서 흔들린다. 
  아낙은 아파트 단지의 한 모퉁이에 이르더니 남색 작업복을 꺼내 입는다. 아낙과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낙보다 두세 살 어려보이는 뚱보여인이 한창 노인네들을 상대로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주위에 서너명이 더 대기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아낙도 도구들을 꺼내 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오늘은 음력 2월 2일, 중화절. 용이 머리를 쳐드는 날(龍抬頭)이다. 이날 아이들이 이발하면 용의 길운을 받아 건강하게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출인두지(出人頭地)한다는 설이 있다. 어른들도 이날에 머리를 깎으면 묵은해를 보내고 좋은 운을 불러들인다고 믿는다. 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날을 기다려서 이발을 하는 것이다. 또한 용두 대신 돼지대가리 고기에다 술 한 잔을 하기도 한다.
  "손님이 좀 와야 쓰갔는디."
  아낙은 혼자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때 마침 이웃인 장노인이 아낙 앞으로 다가온다. 아낙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날래 오우. 쭈토우로우(猪頭肉) 샀구만. 이게 얼마 어치입니껴?"
  아낙은 장노인의 손에서 비닐주머니를 받아 한켠에 놓으며 말을 건넨다. 한근 남짓해 보인다.
  "얼마일 것 같소?"
  "글쎄유. 한 40원?"
  장노인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요게 이래 뵈도 95원 어치라오. 저낙에 손주놈 오면 멕일라꼬 좀 샀소. 돼지고기가 금값이요."
  "에구. 뭣이 그리 비싸당가? 머리를 얼마나 잘라야 한근 사 묵을라나? 난 그냥 삼겹살이나 쪼매 사서 수육이나 해묵어야 쓰갔네유."
  아낙은 부지런히 가위질을 한다. 밤새 앓던 사람 같지 않게 재치 있는 손놀림이다. 잘린 머리카락들을 털어주고 이발 가운을 벗겨준다. 10원짜리 한장을 받고 광천수 한병을 건넨다. 뚱보여인 쪽을 바라본다.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얼추 대여섯명은 돼 보인다. 아낙의 손재간을 높이 사던 김씨 노인도 그 속에 끼여 있다.
  "이상하네. 내 손이 보배 손이라 할 때는 언제구. 다들 저쪽으로 몰려 갔지?"
  "몰랐소? 저쪽에서는 오늘부터 손님들에게 물 대신 박카스를 서비스로 한병씩 준다오."
  그래서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다들 박카스 한병씩 손에 들고 서있었다.
  "에이. 망할 놈의 여편네."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욕이 올라온다. 
  세번째 손님까지 마무리해놓고 아낙은 절뚝거리며 슈퍼로 간다. 
  "박카스 한병에 얼매요?"
  "두박스 사면 세일이예요. 한박스에 30원이예요."
  조금 뒤 한박스 더 사기로 하고 30원을 주고 먼저 한박스만 들고 나온다. 아낙의 얼굴은 잔뜩 찌푸러져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꾸만 중얼중얼 한다. 방금 전까지의 수입이 꽝이니 그럴 만도 하다.
  아낙은 <박카스 드림>이라고 쓴 종이를 옆에 있는 운동기구에 붙인다. 몇걸음 물러서서 보더니 마땅치 않은지 뜯어서 더 높은 곳에 붙인다.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거린다.
  네번째 손님이 왔다. 아낙은 반색을 하며 맞아준다. 이발 가운을 둘러주려는데 기침이 나왔다. 손님이 놀라면서 일어섰다. 미안하게도 아낙은 한번 터진 기침을 멈출 수가 없다. 손님은 언짢은 눈길을 아낙에게 던지고는 뚱보여인에게로 가버린다.
  "망할 놈의 코로나."
  아낙은 주머니에서 기침약을 꺼내 평소보다 많은 량을 삼킨다. 코로나가 문제다. 어데서 나타난 괴물인지 전세계를 강타한 이 불청객 때문에 사람마다 신경이 곤두서 있다. 거리두기는 물론 모임 자체도 공제하고 있다. 아낙의 이발 일도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아낙은 마스크를 두개씩이나 끼고도 시름이 안 놓인다.
  약발이 먹히는지 기침이 덜하다. 요즘 들어 아낙은 몸이 영 말째다. 환절기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낙은 기침이 나오려할 때마다 애써 참는다.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참기 힘들 때는 화장실에 달려간다. 용케 버틴다. 
  아낙은 한분 한분 손님들의 머리를 정성들여 만진다. 손님들도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대개 만족해하는 눈치다. 박카스 덕분인지 중화절 덕분인지 손님은 끊이지 않는다. 오전에는 뚱보여인 쪽에 손님이 더 많은가 싶더니 오후에는 역전이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좋갔네."
  아낙의 얼굴에 보기 드문 웃음이 걸렸다.
  손님이 뜸해지고 바닥을 쓸고 있는데 뚱보여인이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야! 너 왜 남 따라하고 지랄이야, 지랄은!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더냐? 너한텐 선후도 없냐!"
  마스크 안에서 살덩이가 씰룩거리는 것을 봐서 화가 여간 난 것 같지 않다. 아낙은 쓸던 바닥을 계속 쓴다.
  "굴러 온 돌이 배긴 돌 뺀다더니 내 오늘 버르장머리를 톡톡히 가르쳐주마!" 
  뚱보여인은 다짜고짜 아낙의 머리끄뎅이를 거머쥐고 흔들었다. 마치 독수리에게 잡힌 병아리 같았다. 뚱보여인이 아낙을 빌빌 돌리다가 콱 밀쳐놓았다.
  아낙은 쿵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가 떨어졌다. 뚱보여인이 아낙을 가로탔다. 공구상자 옆이였다. 공구상자가 쓰러지면서 공구들이 여기저기 널렸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쩌다 보니 아낙의 손에 가위가 쥐여져있었다.
  "어쭈, 찌르려구? 찔러봐. 찔러봐. 남은 다리 한짝마저 병신되고 싶지 않으면 어디 한번 찔러봐!"
  아낙은 가위를 놓아버린다.
  "경고하는데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눈치껏 하라고. 눈치껏!"
  뚱보여인은 모주 먹은 돼지처럼 날뛴다. 공구들을 걷어차며 한참을 욕지거리하고서야 가버렸다.
  아낙이 탕왕민족향에서 할빈 향방(香坊)구에 금방 왔을 때 단지 입구 공터에는 뚱보여인이 혼자 리발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뚱보여인은 그 공터의 터주대감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가사도우미를 하던 아낙이 이발기를 들고 나타났으니 뚱보여인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낙은 손님들한테 광천수까지 서비스로 주고 있었다.
  아낙은 부시시 일어난다. 흩어진 공구들을 주어 담는 아낙의 손발이 덜덜 떨린다. 그래도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해가 서켠으로 사라졌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제야 아낙은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머니를 털어 한장 한장 돈을 셈해 본다. 아낙의 얼굴에 씁쓸하면서도 옅은 웃음이 걸린다. 
  아낙은 시장에 들린다. 삶은 돼지대가리는 한근에 80원이다. 발길을 돌린다. 삼겹살을 30원어치 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쓰레기통을 뒤져 빈병과 종이박스를 줍는다.  
  "코로나 덕분에 박스는 많이 나오는걸..."
  예상보다 많은 박스를 주웠다. 아낙은 주은 폐품을 비닐로 막아놓은 간이창고에 가져다 놓고 층계를 오른다. 2층을 오르는 것도 힘겹다. 중도에서 한참을 쉬고 나서야 다시 층계를 오른다. 
  
3
  아이는 보던 책을 덮어버린다. 그러자 아이 앞에 납작 엎드려있던 초코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아이 품으로 안겨든다. 
  초코는 유기견이다. 곱슬곱슬 까만 털을 가진 초코는 얼핏 보면 성한 것 같지만 사실은 오른쪽 뒤 다리를 잘 쓰지 못한다. 어딘가에 다리를 크게 다친 모양이다. 하지만 다리를 절기 때문에 아낙에게 동정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걸 두고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아낙도 원래부터 다리를 절었던 것은 아니다. 십여 년 전,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차에서 굴러 떨어진 기름통에 깔리여 다리를 절게 되였었다. 절뚝거리는 초코를 봤을 때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도 하소연 할 곳도, 기댈 곳도 없이 억울하게 당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쩌면 초코가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원인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항상 아이를 졸졸 따라 다니지만 공부할 땐 조용히 쭈크리고 앉아 기다릴 줄도 아는 귀여운 강아지다. 물론 아낙에게 몇 번 혼줄이 나고서야 고쳐진 것이지만 말이다. 강아지가 아이의 관심을 얻기 위해 보내는 아이콘택트는 장난이 아니다.
  아이는 자기와 놀아줄 친구가 그립다. 이럴 땐 초코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숙제는 벌써 다 해치웠다. 길거리에서 똥값으로 사온 소설책도 벌써 세번째 읽는다. 어떤 부분은 외우라고 해도 외울 수 있다. 올해는 개학도 코로나로 인해 예정보다 보름이나 늦게 했다. 겨우 이틀 학교에 가고 오늘은 주말이다. 수업도 온라인으로 전환한다는 소문이다. 아이는 감때사납게 얼굴을 찡그린다.
  "초코야, 넌 할빈이 좋니? 난 모르겠다. 첨에 왔을 땐 좋았어. 층집도 거리도. 차들도 학교도. 그런데 지내보니까 여기 사람들 도시 사람이여서 그런지 세멘트바닥만큼이나 인색해. 정이란 게 없어. 애들도 나를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그러는지 은근히 깔보는 눈치야. 난 내가 다니던 시골학교가 좋아. 그래서인지 꿈을 꾸면 항상 선생님들이랑 동네어른들이 보여. 초코, 너 그거 알아? 내가 우리 학교 마지막 학생이였다는 거. 내가 여기 오면서 우리 학교는 폐교가 됬어. 닭을 기른다고 들었어. <아야어여> 하던 소리가 <삐약삐약>으로 바뀌었겠지? 선생님들도 다 다른 한족 학교로 전근이 되였을 거야. 다들 날 엄청 예뻐해 줬었는데. 아롱이를 데리고 등교해도 선생님들은 날 나무라지 않았어. 아롱이가 누구냐구? 아롱이는 아주 예쁜 멍멍이야. 아롱이는 어떻게 되였을가?"
  초코는 아이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이를 쳐다본다.
  "할머니가 못 데려오게 했단 말이야. 시내에선 강아지를 기르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너 그거 아니? 학급 친구가 많아도 난 걔들하고 놀기 싫단 말이야. 내 앞에서 쩔뚝쩔뚝 하는 놈도 싫고 쓰레기 줍는 시늉을 하는 놈도 싫어. 한바탕 시원하게 패줬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단 말이야. 한 학급 동무라는 놈들이 아롱이보다도 못해. 아롱이는 물에 빠진 나를 구한 적도 있었어."
  아이의 눈에 핑 눈물이 돈다. 아이는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아이의 손길을 느끼자 초코는 신바람이 났다. 아이의 바지가랭이를 물어 당긴다. 밖으로 나가자는 뜻이다. 아이는 초코를 안고 밖으로 나온다. 
  아이와 초코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빠트 단지를 뛰어다닌다. 아이와 초코가 만들어가는 풍경에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4
  아낙은 자는 아이 옆에 박카스 한병을 놓는다. 아이가 번쩍 눈을 뜬다. 손으로 연신 눈을 비벼댄다. 초코도 기지개를 켠다. 아이가 냉큼 박카스를 움켜잡는다.
  "우리 준이 좋아하는 삼겹살도 샀는데. 김치 잎에 싸서 맛있게 묵자."
  "쭈터우로우 먹는 날 아니에요?"
  아이는 은근 삶은 돼지대가리 고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눈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낙은 삼겹살에 된장을 풀어 넣고  삶는다.
  고기가 익는 사이 아낙은 아이의 머리를 깎아 주려고 이발기를 꺼내든다.
  "앗!"
  갑자기 아이가 새된 소리를 지른다. 아낙도 놀라 손을 멈춘다. 낮에 뚱보여인이 짓밟아 놓아 이발기 이빨이 고장이 난 모양이다.
  "아프냐?"
  "아니."
  "후- 돈 쓸 일만 자꾸 생기는구나."
  아낙은 공구상자에서 수동 이발기를 꺼내 이발을 마무리한다. 
  고기 익는 냄새가 온 방안에 퍼진다. 삼겹살이 밥상에 올랐는데도 아이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부지런히 고기를 입으로 나르는 일을 반복할 뿐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잠도 잘 못자는 것 같다. 아낙이 묻는 말에도 단답형으로 대꾸하기가 일쑤다. 늘 생글거리던 모습도 못 본지 꽤 되는 것 같다.
  "학교서 뭔 일이 있었던기가?"
  아이가 도리머리를 젖는다.
  "있다는 눈친데?"
  밥을 먹던 아이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할머니."
  "응."
  "있잖아요."
  "무신 일인데 뜸 들이나. 얼릉 말해 보거래이."
  "그, 그... 조학금..."
  "응. 조학금 탔나?"
  아이는 머리를 잘래잘래 흔든다.
  "와? 선상님이 꼭 널 준다고 그래 쌌더니?"
  아이는 그간 참아왔던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모양이다. 물어주지 않았더면 몰라도 물어주자 아이는 급기야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낸다.
  "몰라요. 외지 호구라구 그러는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너 그래서 요즘 잠 못 잤더냐? 괘안타. 까짓 1,500원 없어서 못살겠냐. 고기 식는다. 얼릉 묵어라."
  "태블릿피시도 사야 된단 말이에요. 곧 온라인 수업을 한대요."
  "태블릿피시는 뭐고 온라인 수업은 또 뭐다냐?"
  "그런 게 있어요. 핸드폰보다 더 크고 노트북보다는 작은 거. 몇천원 하는 거. 온라인 수업을 할 때 쓰는 거."
  "그니께 그 온라인 수업인지 하는 거가 뭐란 말인교?"
  "비대면 수업이에요. 학교에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수업하는 거."
  "코로나 땜시 학교에 안가고 기계로 겅부 한단 말이제? 그래서 태블릿피신가 하는 기계를 사야 한단 말이제?"
  "네."
  "알았다. 걱정 말거래이. 울 손자 겅부하겠다는데 이 할미가 당연히 사줘야제. 그니께 아무 걱정 말구 고기나 마이 묵어."
  그제서야 아이는 눈물이 쑥 들어간다. 억지로 웃어 보이는 아낙의 얼굴우로 한가닥 그늘이 스쳐지나간다.

5
  오늘은 오후 내내 기다려도 손님하나 없다. 오전에 두명 깎아준 게 다다. 아낙은 절뚝거리며 약방에 가서 파스를 사온다. 화장실에 가서 모르는 여인네의 도움을 받아 어깨죽지랑 허리, 골반까지 도배하듯 붙였다.
  "고맙네. 나이가 웬수라요. 어쩜 한 곳도 안 쑤시는 데가 없는지 모르갔네요. 따뜻한 아래 목에 누워 딱 반나절만 굽으면 좋겠구만."
  아낙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화장실을 나온다. 방금까지 고요하던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낙은 야윈 몸을 잔뜩 옴츠린다. 줄기침을 한다. 두터운 오리털 재킷도 추위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나이 탓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 수록 살가죽이 두꺼워져 추위를 모른다는데 아낙은 그 정반대인가 보다. 엷은 치마우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녀학생들과 스트링후드점퍼를 입은 남학생들이 아낙의 옆을 지난다. 그들은 추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깔깔거린다.
  아낙은 폐품들을 분류한다. 담을 것은 담고 묶을 건 묶는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아낙은 실루엣만 보고도 대뜸 누군지 알아차린다. 중절모에 지팡이, 영락없는 집주인이다.
  "고새를 못 참고 또 왔습니껴? 설마 내가 집값을 떼여 먹구 도망이라도 칠가봐 그러시우?"
  아낙은 머리도 들지 않고 곱지 않은 말들을 뱉어낸다. 벌레를 삼킨 사람의 표정이면 저러랴 싶다.
  "아따. 왜 또 벌처럼 톡톡 쏘고 그러우. 내가 왜 왔는지는 그쪽에서 더 잘 알면서. 그래 생각은 좀 해봤소?" 
  "생각은 무슨 생각.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생각을 하덩가 말덩가 하지."
  "외로운 사람끼리 어울려 살자는데 왜 말이 안 된다고 그러오?"
  "쓰잘데기 없는 소릴 허들 마오. 집값이나 싸게 해주면 고맙다구나 하지. 코구멍만한 집을 1,200원씩이나 받으면서..."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 그 쪽이 아니요? 내가 나이도 그쪽보다 어리지, 집도 두채나 있지, 바른 말로 그 쪽이 봉 잡은 것 아니겠소? 돈 안 내는 방법 알려줬건만. 싫으면 돈이나 빨리 주던가."
  말을 하며 중절모는 슬그머니 아낙의 엉덩이를 더듬는다. 아낙은 대뜸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둘러본다. 
  "보는 사람 없소. 만져주니 좋지? 히히."
  중절모는 능글거리며 아낙의 젖무덤을 더듬으려 한다. 아낙은 덴겁을 하며 뒤로 물러선다. 
  "좋으면서 아닌 보살은."
  아낙이 꺼지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다고 꾸짖는다. 중절모는 마지못해 집값 재촉 두어 번하고는 자리를 뜬다. 
  꿈에서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주정뱅이로 린근에 소문이 자자하다. 한겨울에 술 마시고 밖에서 자다가 한쪽 팔도 잘라 냈다. 그 바람에 마누라도 달아나버렸다. 이 녀자, 저 녀자 집적거려보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요즘은 아낙이 혼자 살고 있는 줄 알고는 부쩍 작업을 걸고 있다. 
  "망할 놈의 두상."
  아낙은 화가 나서 툴툴거린다. 재수에 옴 붙었는지 오늘은 머리도 얼마 깎지 못했다. 게다가 집 주인으로부터 희롱까지 당했다.
  퇴근해 집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아낙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애비냐? 에미다. 허리는 좀 괜찮나? 나는 아픈데 없다. 준이? 준이가 별일 있을 게 뭐가 있노. 준이 에미랑은 연락이 되고? 우리 걱정은 말고 빨리 몸이나 춰세거레이..."

 6
  아이는 소광장 귀퉁이의  돌우에 앉아 있다. 초점 없이 먼 곳을 응시한다. 초코도 얌전히 앉아서 아이만 쳐다본다. 
  아이는 때론 초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이가 곁에 있을 땐 세상 순하고 귀엽다가도 사람만 없으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곤 한다. 그 바람에 아낙에게 문전박대 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아이는 부르르 몸을 떤다. 해도 집에 들어 갈 생각이 아직 없다. 
  터덜터덜 걷다가 돌멩이를 발견하고 힘껏 걷어찬다. 돌멩이는 길옆에 세워 둔 하얀색 차의 바퀴를 맞히고 멈춘다. 초코가 절뚝거리며 돌멩이 쪽으로 달려간다. 그러던 초코가 갑자기 요란스레 짖어대기 시작한다. 아이도 웬 일인가해서 뛰어 가 본다. 
  하얀색 아우디 A6이다. 초코는 이상하게 하얀색 아우디 A6만 보면 정신없이 짖어댄다. 초코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초코는 아이에게 안겨서도 짖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기승스레 짖어댄다. 
  그때다. 아이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인다. 아이는 돌멩이를 집어 들고 가로등을 명중하여 힘껏 뿌린다.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어두워진다. 초코가 잠잠해진다.
  미구하여 초코를 안은 아이가 집 쪽으로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다.

7
  출근해 보니 뚱보여인은 벌써 나와 있었다. 손님도 두세명 있었다. 아낙도 아픈 몸이지만 모처럼 일찍 출근한 터였다. 아낙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떡을 한입 베여 물었다. 반쯤 먹는가 싶더니 도로 비닐봉지에 싸서 주머니에 넣는다. 입맛이 없는 모양이다.
  그때 광장 쪽에서 북적 고아대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웅긋쭝긋 서있는 것이 보였다.
  손님도 없는지라 아낙은 슬슬 그쪽으로 가 보았다. 누군가 차를 긁어놔서 엉망이 되였다. 뽑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차라고 했다. 차주인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가로등도 깨여져 있어 감시카메라를 확인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화가 난 주인과는 달리 사람들은 깨고소해 하는 표정이다. 
  "예서 뭘 하오?"
  돌아보니 고향동생이였다. 아낙처럼 외손자 뒤바라지 때문에 올라온 여자다.
  "손님도 없지 해서 구경나온 중이다."
  둘은 아낙의 일터로 돌아왔다.
  "요새 장사는 어떻소?"
  "보는 바와 같지 뭐. 장사 안되야. 집값도 내야 하는데 미치겄다. 돈은 안 벌어지고 집주인은 맨날 와서 지랄 옘병을 하구."
  아낙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어떤 것을 꼴깍 삼킨다.
  "언니. 차라리 주인영감하고 합치는 게 어떻소? 퇴직금도 있고, 보토리라던데."
  "넌 말을 해도 꼭..."
  아낙은 질색하는 눈길로 고향동생을 바라본다.
  "사는 게 보기 딱해서 그러지. 날 보오. 먹고 자는 거 한방에 해결했잖소. 어제는 우리 손주 준다고 핸드폰도 사왔지 뭐요. 5,000원도 넘게 주고 말이요. 나한테 얼매나 살갑게 하는지 모르오. 그니께 언니도 한번 생각해보란 말이요."
  아낙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고향동생의 말은 사실이다. 고향동생은 이 곳에 오자마자 같이 살 영감부터 물색했다. 여자에겐 남자 또한 사업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낙은 달랐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만 바라고 살았다. 여직 잘 버텨왔는데 이제 와서 남사스럽게 영감을  할 생각이 없다. 아낙은 자신이 렬녀는 아니더라도 렬녀 사촌쯤은 된다고 자신해오던 터였다. 하물며 지금은 손자 준이가 있다.
  "내 말 틀렸소?"
  아낙은 고향동생이 하는 말의 저의가 뭔지 가늠해보는 눈치다. 정말로 자기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팔병신 다리병신 두 병신이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웃자고 하는 소린지 대뜸 간파하기 어려웠다.
  "일보러 가는 길이믄 얼릉 가고."
  아낙은 대놓고 축객령을 내린다.
  "실은 언니가 저 뚱보년과 싸웠다는 소문을 듣고 우정 들렀소."
  아낙은 끙 하고 신음소리를 낸다.
  "우리 저 년을 확 그냥 뜯어놓을까?"
  "지나간 일이다. 조금 다퉜을 뿐이고."
  아낙은 고향동생이 염장 지르러 온 줄을 알아차렸다. 정작 싸움이 나면 옆에서 고함만 지르며 구경만 할 것이다.
  "준이아빠는 돈 잘 보내오우?"
  "이 코로나 시국에 어딘들 돈 벌어지겠나. 더구나 허리도 변변찮은 사람이."
  준이아빠는 농촌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처자를 만났는데 그만 푹 빠져버렸다. 도시화가 빠르게 진척됨에 따라 시골에는 남아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 없었다. 특히나 여자들은 보고 죽자 해도 없었다. 대도시로 진출하지 않으면 국제결혼을 했다. 준이아빠가 같은 조선족 아가씨와 짝을 묶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동네에서는 말이 많았다.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그 처자가 연변아가씨라는둥, 야반도무한 강너머 사람이라는둥, 남편과 자식을 다 버리고 도망친 패덕한 년이라는둥 별의별 소리가 다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이아빠는 그 처자가 아니면 못산다고 단식을 감행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아낙은 손을 들고 말았다. 
  둘은 처음에 잘 살았다. 일 년이 지나자 아이가 태여났다. 준이아빠도 농촌학교로부터 현성의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아낙도 함께 이사를 가서는 손자를 봐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준이엄마가 사라졌다. 좀 살만 하니까 일이 터진 것이다. 하루 밤새에 아내를 잃은 준이아빠는 혼이 쑥 빠져나가 버렸다. 준이아빠는 준이엄마가 한국으로 나갔다고 단정지었다. 그리고는 아낙과 반년밖에 안된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마누라 찾으러 한국으로 갔다.
  "준이엄마 그 나쁜 년은 찾았다오? 잡으면 다신 도망 못가게 다리갱이를 분질러 놓던가. 쌍년, 책임도 못질 것을 싸지르긴 왜 싸질러. 아까운 애만 부모 없는 애를 만들어놓고."
  "행여라도 그런 말마라. 준이엄마도 사정이 있었겠지. 그리구 준이가 없으면 내가 뭔 낙으로 살갔노? 준이만  없어봐. 난 산송장이나 다름없어."
  아낙은 고향동생에게 광천수 병을 넘겨주려다 자신이 따서는 벌컥벌컥 들이킨다. 
  아들은 얼마 전 현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쳤다. 목숨을 부지한 게 다행이다. 산재처리가 잘 되였다니 그나마 시름을 놓는다.

8
   핸드폰이 운다. 지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집에 들어서던 참이다. 아낙이 전화를 받는다.
  "뭐라꼬요? 우리 준이가요? 지금 어디라고요? 예. 예. 내 인차 갈께예."
  아낙은 급히 택시를 잡아탄다. <흑룡강성병원 향방본원> 앞에서 차를 세운다. 절뚝거리는데다가 허둥거리기까지 하다 보니 넘어질가 두렵다. 
  "선상님, 몇층이예유? 도착하긴 했는데 어딘지 몰라서유."
  30대 중반쯤 되여 보이는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낙을 데리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이가 두대나 부러졌대요. 지금 그쪽 애 아빠가 와 있어요."
  "아이쿠... 어쩌나?"
  아낙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어쩌다 이른 퇴근을 했는데 또 이런 일이 터졌다.
  "우리 준이 그럴 아가 아인데... 돈은 마이 든당가요?"
  아낙은 돈 걱정부터 앞섰다.
  응급조치를 마친 아이가 막 병원침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물색 재킷에 피가 얼룩져 있는 것이 선명하게 안겨온다. 입은 터지고 부어서 찐빵 같이 돼버렸다. 
  "얘야. 마이 아프제? 미안타."
  애 아빠인듯한 사람이 보였다. 아낙은 연신 미안하다며 굽석거린다. 주머니를 뒤져 있는 돈을 다 꺼내 아이 아빠에게 넘긴다. 전부라 해봐야 100원짜리 한장에 10원짜리 대여섯 장이다.
  "적은 줄 아네만 이거라도 몬저..."
  "아줌마, 장난하는 거예요?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이게 지금 돈이예요? 피도 못 닦겠어요!"
  아이 아빠는 아낙의 손을 탁 쳐버린다. 돈이 우수수 땅에 떨어진다. 아낙은 급히 돈을 줍는다. 아이 아빠는 잔뜩 상이 일그러져있다. 
  아낙은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남자는 아낙을 외면해 버린다. 그럴수록 아낙의 머리는 점점 아래로 낮추어진다. 
  "상세한 건 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애들 말로는 지민이가 먼저 걸고 들었답니다. 애들 싸움이니 좋게 해결이 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준이 할머니도 돈은 넣어두시고 일단 학교로 갑시다."
  학교로 가는 동안 아낙은 죄송하다는 말을 골백번도 더 조아렸다. 
  아이를 보자 아낙은 귀쌈을 불이 번쩍 나게 올려붙인다. 느닷없는 손찌검에 아이의 눈이 화등잔마냥 커졌다. 담임선생이 급히 말렸다. 아낙은 걸상에 주저앉는다. 작고 여윈 몸이 금세 땅속으로 스며들 것 같다. 
  아이가 꽉 입술을 깨문다. 원망인지 억울함인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빛이 어린 눈에 뒤섞여져 있다. 담임선생이 물었지만 아이는 입을 열지 않는다. 결국 다른 애들의 입을 통해서 사건의 윤곽이 그려졌다. 
  8교시가 끝난 후였다. 택배기사가 많은 량의 햄버거를 배달해왔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애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지민이가 나섰다. 자기가 한턱 쏘는 것이라면서 애들에게 햄버거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게 햄버거를 먹게 된 아이들은 시끌벅적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지민이는 개선장군이나 된 듯 의기양양해 했다. 그때까진 좋았다. 문제는 한 아이가 결석하는 바람에 햄버거 하나가 남았다. 
  "옛다. 준아, 이건 니꺼다. 너 먹어라. 니가 안 되는 바람에 내가 조학금 받았다. 다 너 덕분이다."
  지민은 남은 햄버거를 개를 주듯 준이 앞에 던졌다.
  "그런데 너, 햄버거 먹어봤니?"
  애들은 재밋거리를 만났다는 듯 일제히 초점을 두 아이에게로 맞추었다. 아이의 얼굴이 단통 벌개졌다. 
  "맞구나. 치킨도 못 먹어봤겠구나?"
  준이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듣자니 너 얼촨즈라며? 초코파이는 먹어봤니?"
  애들이 와그르 웃었다. 
  "하긴 니가 언제 이런 걸 먹어보겠니. 오늘 실컷 먹어라."
  갑자기 준이가 손에 쥐고 있던 햄버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어쭈, 거지 주제에..."
  "퍽!"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이의 주먹이 지민의 면상으로 날아갔다. 멱살을 잡아 멨다 꼰졌다.
  "악!"
  지민이가 책상 모서리에 얼굴을 박았다. 볼을 감싸 쥐는 지민의 손가락사이로 피가 새여 나왔다. 그래도 준이는 손발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이 달려들어 뜯어 말려서야 싸움은 겨우 중단되었다.
  "우리 애도 잘못 했지만 그 집 애도 잘한 것 같진 않구만."
  아낙의 말이 짧아지고 있었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론 그 쪽 애 잘못이니 우린 치료비를 받아야겠어요. 성형까지 하려면 꽤 많은 돈이 들 겁니다. 각오하시죠."
  "마넌이믄 되갔소?"
  아낙은 전과는 달리 허리를 굽석거리지 않았다. 
  "가자."
  아낙은 아이의 손을 잡고 교실을 걸어 나온다. 이런 말을 남긴다.
  "애 교육 잘 시키시오. 사람 그렇게 함부로 괄세하는 게 아니요. 사람우에 사람 없다고 공자님도 말씀 하셨소. 돈이나 많아선 뭘하겠소, 사람이 안됐는데."
  아낙의 두 눈엔 물기가 어린다. 아이가 볼세라 급히 앞장을 선다. 불편한 다리가 더 심하게 절뚝거린다. 

9
  "준아."
  햄버거 그림이 붙어있는 가게 문 앞에서 아낙은 걸음을 멈춘다. 
  "아께는 마이 아팠제? 할미가 미안타. 이 돈으로 너 묵고픈 거 맘대로 사묵어."
  아낙은 100원짜리 돈을 아이 손에 쥐여준다.
  "싫어요! 오늘부터 난 햄버거는 보지도 않을 거예요. 치킨도 안 먹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내가 먹으면 성을 갈 거예요!"
  "에구. 불쌍한 내 강아지."
  아낙은 준이의 볼을 어루만진다.
  "할머니 우린 왜 이렇게 살아야 해요? 못사는 게 죄인가요? 나는 왜 요 모양 요 꼴로 태어났을가요?"
  준이가 서쪽하늘을 잔뜩 노려보고 있다.
  "니 꼴이 어때서? 할미 눈엔 준이가 멋있기만 하구만. 글고 준이야. 태어난 건 잘못이 아니란다. 가난한 것도 죄가 아니란다. 다 시상을 요로코롬 만들어놓은 눈깔 삔 놈들 탓이란다. 배워먹지 못한 것들이 사람을 차별시한단다.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여. 그니께 준이야. 이제부터 어깨를 쭉 펴. 기죽지 말고. 할미가 낼 당장 태블릿피시인지 뭔지 하는 것부터 사주마."
  "할머니가 무슨 돈으로. 근데 할머니 난 엄마가 미워요."
  "아이다, 준이야. 이 시상에 엄마보담 준이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기다. 엄마는 준이를 할미한테 두고 간 거지 버린 게 아니란다. 엄마한테도 사정이 있을 거다, 그치? 그니께 준이야, 밥이랑 마이 묵고 무럭무럭 자라자, 잉? 그래야 엄마를 빨리 만나지. 글고 돈 걱정은 말거레이. 애들은 돈 걱정하는 게 아니란다. 알았제?"
  "네, 할머니. 그런데 지민이 새 이빨 나올 수 있을가요? 못나오면 임플란트 해야 되나요?"
  "아직 어리니까 새 이빨 날 기다. 설사 못 난다 하더라고 할미가 다 해결할 거니께 걱정 마라. 그리고 준아, 앞으로도 널 우습게 아는 놈들이 있으면 이빨 싹 분질러 놔도 되야."
  "정말?"
  "아이다. 너 그 호랭이 같은 이빨로 와구와구 물어뜯어도 되야. 뒤감당은 이 할미가 다 할꺼니께. 알았제? 호랭이도 이빨이 있어야 호랭이인게라. 이빨이 없음 강아지인게라. 우리 준이는 부디 호랭이로 크거레이?" 
  아낙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주인영감을 떠올린다. 까짓거, 다 늙은 몸을 아껴선 무엇 하리. 열녀상 받을 것도 아닌 것을. 내 손주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리. 이 몸이 백번 죽어 없어진다 한들 무엇이 아깝갔나. 비루먹은 말승냥이 앞에라도 나설 수 있응께로.
  아낙의 두 다리엔 갑자기 힘이 솟았다.
  그때 어디서 튀여나왔는지 초코가 눈앞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할미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준이가 반갑게 초코를 안았다.
  "그래도 초코가 좋아요. 내 친구들은 인정머리가 없는데 초코는 인정머리가 있잖아요."
  "우리 초코랑 같이 광장이나 한 바퀴 돌고 집에 갈가?"
  "그래요."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할머니, 노을이 꼭 피 같아요."
  "그렇구나."
  "태양은 피덩이 같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피가 하늘을 물들이고 있어요."
  "응."
  "할머니, 층집들이 이빨 같이 생겼어요. 저기 룡탑은 송곳이 같구요."
  셋은 노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절뚝거리는 초코와 할머니 또 그 뒤를 따르는 준이의 실루엣을 호랑이 이빨 같은 상현달이 우습깡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야기 마당 > 문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함형수  (2) 2023.12.20
단풍과 나목  (0) 2023.10.28
"그 찻집"(수필)- 리홍매(중국)  (1) 2023.10.12
단풍(시)---장영희  (1) 2023.10.04
"간밤에 부던 바람" - 선우협 (1588-1653)  (0) 2023.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