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사색의 오솔길

정약용에 대한 평가

바람거사 2024. 9. 5. 09:53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의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다. 정조 시기 중앙 관리로서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 부친의 임소(任所) 견문 등을 바탕으로 강진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자신의 학문·사상을 체계화해 정리할 있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 아님이 없다.

 

정약용의 철학사상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예론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 이후의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 이이·유형원·이익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시대의 학문으로 집대성하였고,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에 접촉하여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전연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 천() 유형천(有形天) 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 천명을 정치적으로는 인심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 주자의 천리설(天理說) 이기설(理氣說)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 인성론(人性論)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 금수지성(禽獸之性) 양성(兩性)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 있어 한원진의 인물성이(人物性異)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 ()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 부정하였다.

- 주자의 이기론(理氣論) 전면 거부,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

- 역리(易理) 성립과정을 합리/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 등을 미신적 교리(敎理) 보는 반대하였다.

- 성인(聖人) 신격화하는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 다하면 성인이 있다고 하였다.

-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사명으로 하였다.

-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 요컨대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있다.

 

사회주의 토지정책

1755 사형당한 유수원이 <우서>에서 비판한 대로, 다산 당시 농토의 100% 사대부가 독점하여 평민들은 모두 소작농이었다. 상태는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다. 1944 일제의 통계는 전국 농토의 64% 소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36% 사대부가 머슴들을 부려 직접 경작한 것이다. 이는 사대부 계층이 일제와 협력했다는 방증인데, 역사학자 이덕일이 《우리역사 수수께끼》(김영사) 따르면, 일제강점기의 농촌의 실제 권력은 일제가 아닌 향촌사회의 양반사대부라고 보기도 한다. 다산의 <전론> 따르면 당시 추정 인구 800(사망신고를 해도 사람으로 취급해 세금을 징수하는(백골징포) 등으로 정확한 추정 불가) 농토가 800만결이었다. 가구당 1결이 되어야 굶어죽지 않는다. 다산의 추정에 따르면 사대부 1인이 평균 990명분의 농토를 차지하였고, 영남의 최씨와 호남의 왕씨는 3990명이 소유할 농토를 독점하고 있었다. 사대부는 소작인에게 세금까지 부담시켰다. 소작료는 평균 소출의 25%였으나 30%까지 올랐다. 당쟁과 홍경래의 등으로 몰락한 양반들과 난에 가담한 평민들이 노비계층으로 떨어져 헌종 때는 노비의 인구비중이 35% 달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노비제도가 없어져 노예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양반사대부 계급인 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소작인들을 착취하였으므로 빈곤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갈등은 1923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소작농민들이 지주 씨와 친일 지주들과 결탁한 일제에 저항하여 소작쟁의를 계급투쟁에서 드러난다. 역사학연구소에서 펴낸 《교실밖의 국사여행》(사계절) 따르면 당시 소작인들이 농사를 지어 수확하면, 80퍼센트를 소작료로 가져가는 착취를 했고, 이에 소작농민들이 소작쟁의를 하여 소작료를 낮춤으로써 처지를 바꾸는 중요한 일을 했다. 당시 지주와 결탁한 일제 경찰에서 농민들을 구속하여 목포 지방법원으로 송치하자, 농민들이 목포 지방법원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였는데,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하늘을 이불삼아 싸운다."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계급갈등은 남북한에서 1946(북한), 1948(남한)에서 무상몰수-무상분배(북한), 유상몰수-유상분배(남한)방식으로 토지개혁을 함으로써 농민들에게 토지가 돌아감으로써 지주 계급이 소멸함으로써 해소되었다.

 

정전제의 내용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토지의 무상 분배, 공동 노동-공동 분배를 함으로써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사회주의 토지 정책인 여전론과 정전론을 상상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전론은 토지를 우물 ()으로 나누면 모두 9구역의 땅이 나오는데, 이중 8구역은 8명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1구역은 공동 노동을 하여 국가공동체의 복리를 위한 비용인 세금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전론은 (이문 ,) 농민들이 공동 노동, 공동 분배하는 사회주의 토지정책이다. 그렇지만 농민들이 공동으로 노동하고, 농업노동자가 일한 만큼 나눠주는 토지불평등 해소정책이니, 현재 북한과 같은 토지정책은 아니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사회주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점진적인 방법이 1819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군에서 유배를 때에 상상한 정전론이다.

 

청렴하고 평등한 경제

다산의 사상을 연구하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 의하면, 다산 선생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불평등을 풀어가고자 했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4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어린이, 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 등으로 분류해 사회와 국가에서 애민(愛民)사상으로 이들을 배려함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과학기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 만들고 그를 이용해 거중기를 고안하였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친인척 관계이기도 하다.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연구는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정약용은 언문으로 저술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나 대부분을 한문으로 썼으며, 심지어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도 한문을 사용했다. 국어교육학 박사인 김슬옹은 '우리문화신문' 기고를 통해, 정약용이 철저히 한글을 외면했음을 지적하며, 사상의 위대함이 표현과 소통의 위대함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또한 정약용 역시 성리학과 실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양반 사대부였음을 비판하였다. (-)

*위키피디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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