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마당/시카고사는 이야기

나의 Engineering Career에서 Highlight?

바람거사 2023. 11. 12. 04:52

[거사 주]: 여기 나오는 인명은 모두 미국인이고, 또 내 블로그에 찾아와서 읽을 확률이 0다. 더군다나 근 40년이 다 되는 옛이야기인데, 그저 아름다웠던 옛날 일을 생각하며 회고해 본 얘기다.  오늘이 11/11인데  같이 근무했던 이 중에서 혹시나 하며 Facebook에서 검색을 해보니, 솔레노이드/하네스 담당 엔지니어 Manu Jaywal 이 매우 반갑게 떴는데, 마지막 메시지를 올린 게 2017년이고 6년이 지난 지금 그냥 팽개쳐버린 거 같다. 그런데 2011년에 찍은 사진을 보니 머리가 거의 다 없어졌고, 몸집도 불었다. 그리고 올린 사진을 보니 미국 같지 않고 인도 풍경이 주로 올려져 있어서 은퇴 후에 귀국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Business Cards for WMS & MY Ind.
새 게임인 "Fire"의 광고 사진에 Mechanical Engineer이었던 본인(노랑 원내)도 한  다리 끼었다.

 

나이가 들어가면 자주 쓰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력이 그런대로 좋은 편인 나도 나이 탓인가? Williams Electronics에서 1982년 1월~1988년 8월까지 6년 반 동안 근무했던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이름을 써 봤다. 그런데, 첨에는 일부만 생각났는데, 쓰면서 실타래 풀어지듯 잊힌 이름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엔지니어링/ 프로그래머/게임 디자이너/기타 사무실 직원(휴먼 리소스, 자재구매, 세일즈, 마케팅, 자료실 등)이 한 100여 명, 공장 작업자들이 적어도 5~600명 이상의 규모였다. 점심시간에 공장 출입구 앞에는 Food Truck이며 작업자들이 붐벼서 장날의 장터 같았다. 더욱이 수많은 여공들이 풍기는 짙은 향수 냄새가 거리의 여인들이 줄지어서 호객하는 골목을 지나칠 때 맡았던 것처럼 코를 찔렀다.

 

내가 오전중에 일리노이 공대에서 꼭 수강을 해야 다음 학기 대학원 과목과 연결이 되어 주에 두 차례 두 시간 정도를 빠져야 할 상황인데, 매니저 재량으로 허락할 수 없어서 General Manager 허락이 필요하여 면담을 하였다. 그리고 내 휴가를 반납하겠다고 하였더니, 그는 빠진 날에 빈 시간을 채우라고 하였다. 또 업무 관련 공장 자동화의 주역인 로봇공학이라 수험료도 환불받았다. 이 글을 쓰면서 조회를 해보니 그는 일리노이 공대 졸업한 동문이었다. Ken Fedesna(General Manager, 1977~2005(28년), IIT, MSeEE/BSEE(1968~73), 나하고 비슷한 연령인데 지금도 게임 Software 개발 업체에서 공동 오너로 근무), Wally Smolucha(Enineering Director, 1979~2014), Leo Luzia(회의 때도 말끝마다 Fxxx를 습관적으로 해대는 욕쟁이지만 화통하였다.) ,Gary Burge(Mech Engineering Dept Manager 기회주의적이지만 성격이 무난), Les Sruck, Steve Kordek(Polish descendant, Chicago born, 1911~2012(100세), Pinball 업계 대부), Steve Richie(Game designer), Nancy Goodwin (Sales), Earny Pellegrino(Fin)- 바지 앞 호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약간 어깨를 움추리며, walking like an Italian Mafia style, 이 친구는 날 보면 하는 씩~ 웃으며 하는 인사가 “Hey~ Mark~, A nice looking young man!, Debby Yaguish(sales) St. Louis 출신, 기혼녀인데 내가 좋아하는 인상이었고 내심 관심이 많았다.  사내에서 만나면 서로 반가워서 사담을 나눴지만, 비즈니스 쇠퇴로 대량 해고가 따른 후에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좀 더 사귈 기회를 잡지 못했다.

 

내가 1982년에 첨 인터뷰를 했던 흑인 기계부 매니저 Jerry Hendrix. 그는 날 고용하면서 내가 요구한 $6.00 보다 $.50을 더 주었다. 그리고 기계 설계 엔지니어로 사람좋은 Russian 이민 1세 Ziggi, 매일 옷 갈아입는 칠면조에 골초 러시안 이민 1세, Eugenia(크리스마스 파티때 내 볼에 진한 뽀뽀를 해줬다. 보통 볼만 대고 입으로 뾱 ~소리를 내는데 말이다. 그녀의 러시안 액센트가 가미된 코 먹은 영어를 쓴다. 정리 해고후에 궁금해서 그녀가 옮겨 간 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그냥 맹숭맹숭하게 인사만 하고 말았다.), 아마 지금 쯤은 폐암으로 저세상에 갔었을 파이프를 물고 살던 Jim, 또 술꾼 John Lund, 나중에 엔지니어링에 합세한 Edward Domaq(스페인에 포도 농장도 있다는 데, 자존심이 억수로 센 아르헨티나 이민 1세, 멕시코인이 쓰는 스페인어는 천박하다면서, 조립 라인에서 자기가 구사하는 원조 스페니쉬로 말하면 여공들이 뿅~ 간다나? 잘 사는 데다, 두 아들이 Princeton에 갔으니 의기양양. 그런데, 그의 책상에서 모터인지 뭔지를 내가 가져갔다고 연일 투덜대기에, 어느 날 조용히 다가가서 귀에 대고, “내가 안 가져갔거든? 계속 지껄이면 목뼈를 부러뜨리겠다!”라고 속삭였더니 심각하게 날 쳐다본 후로 잠잠 -, 그러나 우린 젤 친하게 지냈다. 내 설계 능력을 알아줬고, 사무기기 제조 업체인 Martin Yale에 그가 director로 가면서 “Hey, Mark, 고인 물은 썩는다고-” 결국 나도 Sr. Engineer로 승급하고 급료도 더 받고 묻어갔다. 그러나 두 달 만에 사장 Bill Reed와 싸우고 fire 당하여 내가 그의 직책을 넘겨받고  Director 근무를 하였다. 그런데 몇 년 후 우리 동네에 있는 Walgreen 앞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부부가 다 암에 걸려서 치료 중이라고 했는데, 우리 집에서 운전거리로 5분 정도 걸리는 우리 옆동네인 Glenview에 있는 새로 진 큰 집도 가봤지만, 그 후로 연락 못 하고 지냈다. 아마도 둘 다 타계했을 거 같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무심한 데가 있다. 중학교 때 유일한 친구 이건용과 같은 전주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가정 형편상 자퇴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곧 찾아가 본다고 했지만 결국 못가고 말았으니, 참으로 후회 막심한 일이었다.

 

그리고 엔지니어 동료인  Glen Van Patten(월남 참전-Chopper gunner, 이혼 후에도 마누라하고 전화로 열나게 싸우고 죄 없는 전화기를 부서지게 패디기 치듯 내려놓았다. 그런데 엔지니어링 부서에 자주 드나들던 라틴계 Edna라는 이혼녀가 있었는데, Glen 왈; 빠구리 쳤다며 하는 소리가, "Wow! So good~!" 하며, 엉큼한 미소를-. 그녀는 허리가 길고, 엉덩이가 유난히 컸다.  한참뒤에 온 Craig Fitball(Gary Burge가 데려온 촌놈 또라이-, 내가 전화로 어떤 업자에게 Williams라고 소개할 때, 상대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회사 이름이 뭐냐고 되물어서 다시 말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걸 듣고서 연신 낄낄거렸다(엔지니어 사무실이 파티션으로 되어서). 나중에 다른 일로 Gary Berge와 같이 있을 때 찜빠를 줬다. Ralph Seidel(한국에서 헌병 근무, 아부 잘하고 실력이 전혀 없다. 내가 가끔 도와줬지만, 얼마 후에 해고되었다.), Joe Joos(헝가리 난민, 능력이 있어 보이는데, 얼마 후에 암으로 타계), 그리고 엔지니어 보조 Romeo Isaia(아시리아 난민,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상오입쟁이).

 

그리고 또 공작실의 수장, 멕시코 이민 1세 Al Cadenus, Mark Johnson, Arthur Gurget와 더불어서 점심시간에 Maxican /Greek 식당을 전전하면서 Carne Asada Burritos/Gyros /Beer 등을 즐겼다. 뒤늦게 합류한 Arthur는 (공작 실력은 별로, 장난기가 심하여, 계약직으로 기계부에 와서 Pay Phone metal box design 하던 키도 작은 데다 똥똥한 이탈리아계 Pete Ori의 되똥거리는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엄청나게 웃겼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Chicago시내의 Foster 근처, Clark St의 2층 아파트에도 놀러 갔었고, LP 레코드판도 몇 장 줬다. UIC 중퇴, Policeman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88년에 이직하여 확인 못 하였다.), 기계부에서는 제도사 Len Marquadt는 이직 후에도 게임 기기 감정하는 부서에서 일하는 그 뚱보 Engineer, Ron Jackson 하고 연락하여 2000년대 초까지 호텔 바에서 자주 만났었다. 같이 근무할 때는 우리집에 와서 불고기맛도 보여줬다. 좀 게으른 편이지만, 성격이 너무 좋은 탓인지 이혼 후에 혼자서 잘 키웠던 딸, Nichole이 간호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Blondie를 유난히 밝히는 Ron이 침을 흘려서 지 딸을 꿈에도 생각마라고 하였다.

 

기계부에서 제도를 하는 Earnie Griffin(흑인, 되게 순진하다. 당황하여 전화로 사내 paging도 버벅거리며 제대로 못 했다.), 역시 흑인인 Sherman Randall(아마도 Gay? 이 친구가 전화로 "Hi~, My~ name is Sherman Randall~. "하는 소리를 들으면 모두 기절초풍! 여러 명이 퇴근 후에 첨이자 마지막으로 너무 진한 성인 영화관에 갔었다. 상영전에 그래머 포르노 여배우가 무지하게 딱 달라붙은 주머니 없는 청바지입고 나와서 경음악 반주에 맞춰 살살 흔들며 관객들과 인터뷰도 하고. 누가 연애 좀 하고 싶다고 하니, 애인이 있어서 사절한다고- ㅋㅋ), Sofia Bill(Polish Refugee in 1984?, 역시 골초, 가끔 장난 삼아 껴안기도 하였는데 (요새 같으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할 일), 기록실에 근무하는 Polish 이민 후예인 홀아비 Jerry Skolsky와 몇 년 같이 묻어 다니길래 결혼 하는 가 했더니, FBI 요원과 결혼하여 아들 둘- Glenview Bredemann Lexus dealer에서 2000년도 초에 우연히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 외에 제도사로 일했던  Mark Talesky,  Eric Quenchun, Bart Drink(UIC 중퇴, 매우 성실하였고 몇이 어울려서 Chicago 교외 Oak Brook에 있는 걔네 규모가 큰 고택에도 갔었다. 퇴사 후 한 2년 후에 엔지니어로 다시 일하고 싶다고 인터뷰하였는데 고용은 안되었다.), Angela, 키가 너무 커서(6' +) 굽이 없는 스니커만 신고 다녔던 Annet, 마른 몸에 병색이 있어보였고, 근무중에 거의 혼절하기도 하였다. 또 몇 달 일하다가 해고당하고 울고 간 러시아에서 이민 온 그녀의 이름은 기억이 없다. 그때 그녀는 내 검은 머리를 보고 정말로 검다고 감탄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95%가 백발이다. 하여튼, 80년대 중후반에 WMS Game Business가 사향 길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사람이 정리해고로 떠나갔다. 20여 명 기계부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Manager Gary Berge, Me, Sofia Bill) 중에 나도 끼었다. 

 

기록실의 수장은 작은 키에 근육질로 역시 골초, 이름이 전혀 생각 안 난다. 이 친구는 자재부인지 뭔지 아래층 사무실에 근무하는 예쁘게 생긴 통통한 아가씨를 건드렸나보다-. 그런데 임신을 했는지 매니져 사무실에 찾아와서 훌쩍 거리는 소릴 다 들었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Jerry Skolsky 외에 Elaine Decardo 3인이 기록실 직원이다. Jerry Skolsky는 나하고는 잘 지냈지만, 흑인에 대한 혐오가 있어서 당시 흑인으로 첫 시카고 시장이었던  Herold Washington이 심장마비로 급사했는데, 아주 험한 얘길하여 거부감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동양사람에 대한 혐오 발언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기기 케이블 하네스 제작 견본을 만들고 또 전기부하 등 솔레노이드 작동(Pinball 게임기기에서 Ball을 치는 Flipper를 작동시키는 코일)테스트를 하는 부서에 일했던 몇 사람 중에 전 매니저는 Juan Chappa, 또 조그마한 체구에 도도하게 차분한 흑인 엔지니어, 후임자로 와서 Kellogg MBA 마친 Kenturky Louiville 출신인데, 모두 나하고 관련된 일이 거의 없었기도 하지만, 그 두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부서의 고참 테크니션 Al Lasco,  인도 이민 1세 Manu Jayswal, 퇴사하고 케이블 하네스 제조 자영업을 할 때, 그가 부탁한 Cable cutting tool 설계한 걸 Overcharge 한 게 지금도 맘에 걸린다. 반 값만 받아도 되는 걸(당시 내가 어려웠지만)-.아는 사람한테 바가지? $500 Check를 써주면서 좀 당황한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상한 생선을 동네 누님한테 판다는 속담도 있다.

 

그리고 기타, 엔지니어링 빌딩에서 허드렛일 했던 덩치가 산 만한 Alabama 출신의 흑인 Al, Pueto Rrico 이민자  Jose Dalgado 와도 친하게 지냈다. 나는 1982년에 제도사로 입사하여 6개월 만에 엔지니어 보조 그리고 6개월도 못 되어  엔지니어로 고속 승급하면서,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땐 나는 대학원 졸업하고 내 전공을 살려서 항공기 제작 회사같은 데로 옮겨서 근무할 거로 생각했는데, 부모님이며 기타 사정으로 시카고를 떠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그 시절이 내 Engineering Career에 있었던 Highlight이었나 보다. 가끔 금요일 점심때는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사용하는  하드웨어를 대는 업자들이 번 갈라서 점심 식사를 대접해줬다. 한 번은 세일드 맨이 가자는대로 동료 두엇과 같이 이탤리언 레스토랑에 갔는데, 거의 벗다시피 속이 훤이 보이는 란제리 쇼를 보면서 식사 중에 칵테일  마시고 또 운좋게 당첨도 되어 란제리도 받았다. 그리고 퇴근 후에 그걸 집사람한테 보여줬더니, 도저히 입을 상황이 아니라고 기겁하였다. 하여튼, 알딸딸한 기분으로 2시간이나 지나서 사무실에 왔다가 커피 한 잔하고 4시반전에 퇴근도 하였다.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요새 같으면 꿈도 꿔보지 못할 경험이었다.

 

푸로잭트 엔지니어는 설계만 잘 한다고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설계해서 제작된 기기가 실제로 조립 라인에서 문제가 생기면 조립 공정이 올 스톱 되어 담당 엔지니어는 급히 내려가는데, 나 역시 서둘러 내려간 적이 있었다. 한 라인이 멈춰있었고, 수백의 여공들이 웬 동양인 엔지니어가 여길 다 내려왔네~ 하며 서로 붙잡고 웃기도 하고 추파도 보내는 여인들의 숲을 지나가는데 좀 머쓱해졌다. 하루에 수 백대를 조립하는 라인을 오랫동안 멈추게 할 수는 없을 일이다. 라인이 재가동하도록 서둘러서 임시 처방을 내리는 것도 엔지니어 재량이다.

 

하여튼, 몇 년 후 1988년 8월에 내가 떠났고, 그 후로 Williams Electronics의 Pinball Business는 1999년에 완전히 접고서 WMS Gaming으로 탈바꿈하여 Slot Machine/Misc. Casino game machine을 제작하면서 다시 번창하였고, 최근에 검색을 해보니, 전에 있었던 곳은 우리집에서 19마일 정도 거리인데, 이제 65 마일이나 떨어진 East Chicago로 확장 이전하였다. 이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거 같다. 혹 내가 자주 껴안았던 그 Polish refugee로 미국에 온 Sofia Bill이 이제 60 이 좀 넘었을 거 같은데, 그녀가 살았던 동네에서 1시간 반 거리를 운전하며 아직도 근무하는지 모르겠다. 만약에 연락이 되면 옛 동료로서 무지 반갑게 만나보고 싶다.(-)